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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은 모멸감을 느껴보았을 것이고,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남에게 모멸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거리의 인문학자로 알려진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모멸감을 주제로 저술한 책 ‘모멸감’(2014, 문학과지성사)은 사회과학적 이론을 근거로 했다기보다는 여러 일화 등을 모으고 논평한 에세이집이다.
그가 이 주제에 매달리게 된 것은 언젠가 김우창 교수의 저술 ‘정치와 삶의 세계’를 읽다가 “한국사회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설파한 대목에 끌리면서부터라고 한다. 그후 김찬호는 ‘모멸’이란 두 글자를 키워드로 삼아 우리 사회를 분석해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모멸감이란 단어는 뉴스,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자주 쓰인다. 김찬호는 모멸감을 주제로 인문학·심리학 서적을 읽고, 뉴스 기사,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오가는 대사, 문학작품 등에서 적절한 예를 찾고, 일상생활에서의 에피소드를 들어가며 모멸감이 우리사회에 주는 파장을 조망했다. 이 책은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저자가 서술한 내용을 간추린다.
▲ “나도 모르는 나” - 감정은 언제나 블랙박스다
“감정은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다. 감정은 생각과 행동을 좌우한다. … 그런데 그 감정 자체가 불가사의다. … 감정은 나 자신에게도 매우 낯선 ‘타자’로 종종 다가온다. 나의 생각이나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이는 감정에 당혹감을 느낀다.”
“감정의 돌연변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험으로는 연애가 으뜸이다. … 감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고, 스스로 위장을 잘한다. 우리가 편치 않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잘 다룰수 있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즉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감정들이 한 감정의 가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감정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생명체인 듯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심술을 부린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감정을 바꾸는 것이 훨씬 어렵다. 감정은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바뀔 때가 많다.”
‘사람들은 매우 이기적이지만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다. 거기에는 오랜 관성의 힘이 작용하기도 하고, 인지적인 착각에서 비롯되는 오류가 생겨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탐욕이나 두려움, 선망 등의 감정이 개입하여 엉뚱한 선택으로 이끈다. 게다가 감성을 자극하는 수많은 마케팅 기법들이 우리의 판단력을 흐려 놓는다.“
”감정은 이성보다 더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감정은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또다른 나는 누구인가. 그 ’타자‘의 정체를 탐구하는 것이 나다운 삶에 한 발자국씩 다가갈 수 있다.“
▲ 한국인의 마음 풍경 – 나는 분노한다. 고로 존재한다.
”많은 나라가 한국의 경제적 성취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 풍경은 사뭇 음울하다. 자동차에서 냉난방과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물질생활의 불편은 줄어들었지만, 불만과 불안과 불신은 오히려 늘어난다.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 넘어왔다는 지적도 있다. 피로사회, 불안증폭사회, 허기사회, 트라우마 한국사회,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산업국가로선 대국이다. 하지만 정치·사회제도와 경제력 간의 미스매치가 일어나고 있다. … 경제의 규모는 막대하지만, 그 결실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나누는 시스템이 부실하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성은 쇠퇴하고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면서 죽음을 준비하기는 훨씬 힘들어졌다.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혹독하게 경쟁하면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을 견디기 어려워 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감정은 복잡한 응어리로 꼬여가기 쉽다. 루저, 찌질이, 잉여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인다. … 그 간극이 자괴감과 열패감으로 드러난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등의 표현이 함축되어 있듯이 이른바 르상티망(resentmnet)이 번식한다. 피해의식과 원한 감정이 깊어진다. 그래서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받고,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억누른다.“
”한국인들은 사소한 차이들에 집착하면서 경쟁에 신경을 곤두 세운다. … 누가 자기를 손가락질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위축되는 것이다 은근히 깔보는 마음이 느껴진다.“
▲ 수치심의 두 얼굴 – 인간다움의 징표이자 존재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감정
”인간은 그 사회가 마련한 일정한 기준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날 때 창피해 하는 것이다.“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그 마음이 옳음의 극치라고 말했다.“
▲ 모멸,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
”수치심은 본인의 잘못아니 결함에 대한 타인의 지적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부끄러운 감정이고, 모욕감은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화가 나는 감정이다.“
”미국에서 살인죄로 수감 중인 재소자들을 심층 인터뷰했는데, 범죄의 진짜 이유를 설명할 때 “그놈이 나를 깔보았다(disrespeicte)”는 표현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어느 범죄자는 살인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었느냐는 질문에 ’자부심, 존엄, 자존감‘이라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모멸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파괴한다. 그래서 모멸감에 사로집한 사람은 극도의 적개심으로 무장하기 쉽다.“
”모멸은 ’정서적인 원자폭탄‘이라는 비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수 있는 가장 무서운 폭력이며, 평생을 두고 시달리는 응어리를 가슴에[ 남기기 일쑤다.“
▲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자본주의
”굴욕감은 어디서 보상받을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소비시장이다.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처럼 쓰고 싶다. 돈 벌면서 받은 ’천대‘를 돈 쓰면서 받는 ’환대‘로 덮어 씌우려는 것이다. …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그 동력은 부러움이라고, 박민규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소설에서 말한다.“
”우리는 남들을 열등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한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과 선 긋기를 통해 스스로의 잘남을 확인하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 절대적인 기준이다. 경제수단으로 고안된 돈이 사람의 목적이 된다.“
▲ 한국사회의 모멸구조
”한국사람들이 ’억울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는 것은 역사적 상황이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고 볼수 있다. 크고 작은 힘에 휘둘려 손해를 입거나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 힘이 정당하지 않고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기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결과에 동의할수 없다. 그럴 경우 부조리한 권력에 맞서거나 개선을 도모해야 마땅하지만, 많은 경우 그와 비슷한 권력을 획득하려고 애를 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한국사회의 신분적 질서가 급속하게 무너지면서 그 자리에 학력, 빈부, 외모, 지위 등이 강력한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사람들은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과민하다. 체면과 위신에 대한 집착은 지체 높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 ’폼 잡는다‘라는 표현이 있다. 기회만 되면 권력(끗발)을 뽐내기를 좋아하는 정치인들처럼 보통사람들의 일상에서도 과시적인 문화가 자주 드러난다.“
▲ 모멸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눠진다. 저자 김찬호는 모멸을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의 일곱 가지의 범주로 조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