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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숭배 사상 엿보여…소지왕 계열 누르고 왕위 계승, 개혁 앞장
지증왕①…쿠데타로 집권한 개혁군주
2019. 06. 27 by 김현민 기자

 

지증 마립간은 신라 22대 임금으로 재위기간은 500~514년이다. ()씨 왕계로 이름은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 지철로(智哲老).

<삼국유사>에 지증왕에 대해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지증)왕은 음경의 길이가 15치나 되어 배필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사람들을 삼도(三道)로 보내어서 배필을 찾았다. 배필을 찾는 사람이 모량부(牟梁部)의 동로수(冬老樹)라는 나무 밑에 이르렀는데 개 두 마리가 북()만한 똥 한 덩어리를 물고 양쪽 끝에서 다투어 물어뜯고 있었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해주었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 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알아보니, 그 여자의 신장이 75치나 되었다. 이 일을 갖추어 왕께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황후로 삼았고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지철로왕)

 

감히 지엄한 임금의 성기에 관해 왈가왈부하다니. 하지만 이 글도 엄격한 스님 일연이 옮긴 글이다. 아마 그 시대의 상황을 그린 게 아닐까.

고대에서는 성기 숭배 사상이 있었다. 고대인들은 생식기는 생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해왔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토우나 안압지에서 나온 목제 남근에서 신리안들의 성기신앙을 볼수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증왕의 음경이 컸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그에 권력에 걸맞는 왕비로 모량부의 여인을 찾은 것이다.

지증왕 때부터 임금에 대한 호칭이 왕()으로 정착된다. 3대 유리 임금은 석탈해와 왕위 경쟁을 벌이다가 이가 많은(多齒) 사람이 임금에 오르기로 했다고 해서 이사금(尼師今)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증왕 대에는 음경의 길이로 왕의 칭호를 얻었다는 말인가.

 

<삼국사기>에는 전임 소지 마립간이 백성들의 신임을 잃어 계열이 다른 지증왕이 왕위에 올랐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나온다.

서기 500, 지증 마립간이 소지 마립간을 이었다. 지증 마립간은 소지 마립간과 마찬가지로 내물왕에서 내려왔지만, 내려오는 계통이 다르다. 소지 임금은 내물왕의 아들 눌지마립간의 장자 계열이다. 학계에서 논란이 있지만, 지증 임금은 눌지 임금의 동생인 복호(卜好) 계열로 파악되고 있다.

<삼국사기>엔 소지마립간이 아들이 없어 지증왕이 왕위를 이었고, 즉위 시 나이는 64세 고령이었다고 적고 있다. 뭔가 설득력이 약하다. 고대 사서에 아들이 없어서’, ‘천성이 착해서’, ‘국인(國人)들의 평이 좋아서등의 표현과 함께 권력 승계를 할 경우 후세의 사가들은 정통성이 없는 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파악한다.

소지 마립간에겐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소지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모순이 발견된다. 사학자들 사이에서 소지에서 지증 마립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혼란이 있었고, 일종의 쿠데타를 통해 지증왕이 즉위했다는 주장이 있다.

 

소지 마립간 마지막해의 기록에 뭔가 미심쩍은 문구가 발견된다.

 

소지왕 22(서기 500) 여름 4,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금성의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가득 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우물에서 용이 났다든지, ‘폭풍우가 불고 누런 안개기 끼었다는 기상이변이 발생했다든지 하는 기사는 고대 사서에서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인 반란의 조짐은 그 다음 문장에서 확인된다.

 

소지왕 22(서기 500) 가을 9, 임금이 날이군(捺已郡)에 행차했다. 그 고을 사람 파로(波路)에게 이름이 벽화(碧花)라고 하는 딸이 있었는데, 나이는 열여섯으로 실로 온 나라 안에서 뛰어난 미인이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수놓은 비단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서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음식을 보낸 것으로 생각했으나, 열어보니 어린 소녀였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궁에 돌아와서 그리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두 세 차례 평복을 입고 그 집에 가서 소녀와 잠자리에 들었다. 도중에 고타군(古陁郡)을 지나다가 어떤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요즘 백성들은 임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으로 여기지만 나는 의심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임금이 날이(捺已)의 여자와 관계하러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자주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무릇 용이라도 물고기의 껍질을 쓰고 있다가는 고기잡이에게 잡히 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의 임금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럽게 여겨 곧 몰래 그 여자를 맞아들여 별실에 두었다. 아들 하나를 낳기에 이르렀다. 겨울 11, 임금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날이군은 경북 영주로, 김씨 왕조의 시조 성한왕((星漢王)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학자 강종훈은 문무대왕비에 나오는 성한왕의 출생지가 죽령 바로 남쪽인 지금의 영주지역이며, 소지왕이 김씨 조상을 모신 신궁을 이 곳에 만들었다고 했다. 소지 임금은 재위 9년에 시조(성한왕)가 태어난 내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설치했다. 강종훈은 내을이 경주가 아니고, 영주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았다.

소지 임금은 날이군에서 벽화부인을 만나 아들을 낳았다. (소지 22년조에 9월에 벽화부인을 만나 아들을 낳았다는 기사에는 무리가 있다. 임신중이거나, 낳아도 아주 어렸을 것이다.) 왕조 시대에 임금이 후궁을 얻어 아들을 낳는 것은 봉건왕조 시대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게다가 정통 사서에 이런 일로 임금을 비난하는 글귀를 적기 힘들다.

진흥왕 시대에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柒夫)가 신라의 역사(國史)를 기록하면서 지증 임금 계승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지 임금의 잘못을 남겼던 게 아닌가 싶다. 경주에서 영주까지 순행할 정도로 강건하던 소지 임금이 여염집 미인과 사랑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아 두달만에 급사하는 장면은 정사(正史)의 기록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어느 노파가 무릇 용(임금)이라도 물고기의 껍질을 쓰고 있다가는 고기잡이(반락세력)에게 잡히게 되는 것이지요라는 말 속에서 소지왕과 지증왕의 교체기에 있었던 반전드라마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지 임금은 신궁을 짓고, 시조묘를 세 차례나 행차하며 김씨 세력의 중심임을 강조했다. 그가 김씨 왕족의 본거지인 영주(날이군)를 비롯해 안동(고타군), 구미(일선군)을 오갔다는 기록은 지방의 지원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며, 그곳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서라벌로 들어와 임금이 될 경우,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세력이 경주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반발한 것 같다.

지증 임금의 부인은 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으로 이찬 등흔(登欣)의 딸이다. 신라 김씨의 견제세력이었던 박씨 세력이 김씨 방계인 지증 임금과 연대해 김씨 정통을 주장하는 소지 임금의 아들 대신에 지증 임금을 세웠다고 그림을 그려도 무난할 것 같다.

경북 내륙의 토착세력과 손을 잡은 소지왕계와 해상세력(고기잡이)의 지원을 얻은 지증왕계의 권력 투쟁에서 지증왕측이 승리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2009년 5월에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현존 최고(最古)의 포항 중성리 신라비. 지증왕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2009년 5월에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현존 최고(最古)의 포항 중성리 신라비. 지증왕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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