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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혐의 씌워 연해주에서 한인 인종청소…비밀경찰 동원해 집행
고려인 강제이주①…20만 극동한인 오디세이
2022. 10. 12 by 김현민 기자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 1937423일자에 발로진이라는 사람의 기고가 실렸다. 제목은 소비에트 극동에서의 외국간첩이었다. 발로진은 기고에서 소비에트 한인의 얼굴을 가장한 만주와 조선의 요원들이 콜호즈, 노동조합, 그리고 콤소몰 조직으로 침투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고용된 한인들이 적군(赤軍)의 집결과 전함의 이동, 철도 등에 대해 정탐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썼다.

이 글은 당시 소련 공산당 관료들 사이에 극동 한인들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소련 공산당 수뇌부는 일본과 전쟁을 할 경우, 연해주를 중심으로 극동시베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20만이 일본 편에 설 것이라고 의심했다. 소련 지도부는 내전 시기에 일본군이 이르쿠츠크에 진주하고, 외국 간섭군과 타협책으로 시베리아 영토를 떼어내 극동공화국을 수립해야 했던 뺘아픈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과 10여년전의 일이었다. 1932년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수립하고 중일전쟁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소련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연해주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한인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스탈린 정권이 극동지역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려는 계획은 1937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소련은 1927년에 포시에트와 우수리스크 거주 고려인들을 내륙지방으로 이주시키려고 했고, 1928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을 하바로프스크로 이주시키려고 계획했지만 성사시키지 못했다.

1926년 소련 센서스에서 극동지역에 한인이 169,000, 중국인 77,000, 일본인 1,000명으로 집계되었다. 극동지역 러시아인들에겐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다. 1925년에 한인들은 유대인 자치주가 형성되는 것을 보고 한인 자차주 설립을 추진했다가 거부되는 일이 있었다. 극동에서 반한인 감정이 노골화되면서 1828~1932년 사이에 5만명의 한인들이 만주와 식민지 조선으로 되돌아갔다.

 

1937년 연해주 고려인 강제 이주 /위키피디아
1937년 연해주 고려인 강제 이주 /위키피디아

 

1937717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국경 일대를 특별방위지역으로 선포하고, 독일인, 폴란드인, 한인 등이 소비에트 안보에 위협을 주고 있다고 선언했다. 당 기관지 프라우다가 앞장 서서 한인이 일본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실었고, 당국은 국경이동을 폐쇄했다.

그해 821일 소련 인민위원회는 포고령 1428-326сс를 채택했다. 포고령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스탈린 서기장의 승인을 받아 곧바로 시행되었다. 포고령은 극동의 모든 한인은 카자흐와 우즈벡으로 재배치한다 이주는 즉각 시행하되 193811일까지 완료한다 한인은 동산과 가축을 동반해도 좋다, 다만 포기할 경우 보상한다 한인 이주를 위해 3,000명의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렇게 해서 연해주를 비롯해 극동시베리아의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다. 전체 이주인원은 소련 공식 집계로 171,781명이다. 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원까지 포함하면, 20만명 내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동 거리는 6,400km, 124대의 열차가 동원되었다. 이동 중에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려 사망한 사람만 16,500~5만명으로 추산된다.

극동 한인 강제이주는 소련 비밀경찰이었던 내무위원회(NKVD)가 집행했고, 그 책임자는 스탈린 시대에 대숙청의 칼을 휘둘렀던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ov)였다.

스탈린은 1930년에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를 간첩 혐의를 씌워 숙청하고, NKVD를 앞세워 자본주의 제국의 앞잡이들을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스탈린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파시즘으로 규정했고, 반파쇼 연합전선 구축을 위해 국내 소수민족의 반역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사전에 스파이 혐의를 씌운 것이다. ‘스탈린의 개라는 별명을 가진 예조프가 NKVD를 거머쥐고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예조프는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명령서를 근거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담은 비밀지령을 하달했다. 예조프가 보낸 비밀 전문에는 이주대상 한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작성할 것, 반소비에트 행위자들과 간첩행위자들을 체포할 것, 적군과 군수업체와 관련 있는 한인들이 국경을 드나드는 것을 금지할 것, 이송을 위한 열차를 준비할 것, 이주준비 과정과 진행에 대해 보고할 것 등 10가지 항목이 담겨 있었다.

이주 명령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20일간 지체되었다. 그들은 한인 농가가 추수를 마치길 기다렸다. 한인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빼앗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주는 그해 91일 시작되었다. 한인들이 밀집한 포시예트와 그로데코보 지역의 한인이 우선 대상이었고, 그 인원은 11,807명이었다. 사전 통보도 없었다. 옷가지 몇 개와 식량 일부만 가지고 그들은 열차에 탔다. 나머지 가재도구, 주택 등은 교환증 하나만 달랑 주었다. 여행경비는 1인당 하루 5루블, 기껏해야 한 사람이 370 루블을 받았다. 그것도 말 잘 듣는 사람에게만 주었다. NKVD 요원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대상자에게 이주를 통보했다. 비밀경찰은 간단한 것만 소지하고 반시간 내에 자신을 따라 올 것을 명령했다.

갑작스런 이주명령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한인들도 있었다. 193794일자로 예조프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NKVD 연해주지역의 통지가 있자, 92일 한인 공산주의자들, 9어업 콜호즈 농장원들이 레이네카 섬에서 당대회를 가졌고, 이 집회에서 이주에 대한 문제들이 토론되었습니다. 이 집회에서 이주문제를 둘러싼 선동적인 행위들이 나타났는데, 이 선동들은 이주정책이 당의 민족정책과 스탈린 헌법에 위배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자세한 조사와 체포를 위해 NKVD 지역 위원장이 떠났습니다. 결과를 보고하겠습니다.”

이주를 거부한 사람은 체포되었다. 그 인원이 2,500명으로 추정되며, 대부분 처형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저항할수 없게 만들어 두달만에 20만명의 인구를 사지로 내몰았던 것이다. 소련공산당이 저지른 인종청소 범죄였다.

 

고려인 강제 이주에 이용된 열차 /위키피디아
고려인 강제 이주에 이용된 열차 /위키피디아

 

1025일 예조프는 한인 이주가 완료되었다고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보고했다.

“19371025일 극동지역 한인들의 이주는 완료되었습니다. 36,442 가구 171,781명이 124개의 집단수송열차로 이주되었습니다. 극동지역(캄차카, 오호츠크 등)에는 총 700명 정도가 남았는데, 이들도 올해 111일경에 집단열차로 이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즈베키스탄공화국에 보내지고 배치된 한인들은 16,272가구 76,525명이고, 카자흐스탄공화국은 2170가구 95,256명입니다. 목적지에 이미 도착하여 짐을 하역한 열차는 76개이고 48개의 열차는 이송중입니다.”

예조프가 보고한대로 캄차카 등지의 한인 700여명은 111일 강제로 열차에 올라탔다. 이를 합하면 극동한인의 이주인원은 172,481명이 된다. 한인 이주는 극동에 그치지 않았다. 부랴트, 치타 등 중부시베리아의 한인들도 강제로 이주해야 했고, 심지어 북유럽 핀란드 옆에 있는 무르만스크 거주 한인들도 알타이 크라이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강제이주된 한인 수가 20만명이 넘는다는 추산이 나온다.

 

한인 강제이주를 담당한 사람들은 스탈린에게 개처럼 충성했지만, 끝내 숙청당했다.

총책인 예조프는 19393월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고, 410일 체포되어 정부기금 착복, 독일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 194024, 그는 모스크바 근교에서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한인 강제이주의 실무를 주도한 사람은 NKVD 극동담당총책 겐리히 류쉬코프(Genrikh Lyushkov)였다. 그는 스탈린 정권에 충성했지만 끝내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19386월 일본으로 달아났다. 극동한인에게 일본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 씌운 그는 일본에 부역하다 일본 패망직후인 1945919일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관해 자살했다는 설, 총살당했다는 설 등 다양하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Deportation of Koreans in the Soviet Union

Wikipedia, Koryo-saram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려인강제이주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원인 및 과정, 이원용(동국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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