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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 번갈이 수토…장오리진, 죽변진, 울진포, 구산포에서 출발
울릉도 수토사의 뱃길②…서풍이 불면 출발
2022. 10. 30 by 이효웅 해양전문가

 

(에서 계속)

. 울릉도 수토사와 어민들의 뱃길

 

울릉도 수토사의 출발지는 심현용의 수토사의 출발지의 변천에서 출발지가 장오리진, 죽변진, 울진포, 구산포 등 여러 곳이 사료에서 확인된다.’고 하였고(주1), 윤천수는 울릉도 수토 출발지 변천에서 수토초기에는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가 번갈아 수토관이 되므로 출발지가 장오리진, 울진포, 죽변진, 구산포로 바뀌다가 언제 부터인가 모두 구산포가 출발지가 되었다.’고 하였다.(주2)

 

1. 삼척 항로

 

조선시대 삼척에는 강원도 수군 진영인 삼척포진이 있었다. 삼척포는 오십천 하류의 죽곶도(오늘날의 육향산) 앞 자라소부터 수심이 깊어 자연항구가 되었다.(주3) 삼척포진은 오화리산성에 있던 것을 1511년 죽곶도에 진동루(鎭東樓)를 짓고, 1520(중종15) 삼척포진성이 완공되어 옮겨왔다.(주4) 수토 초기에는 삼척포진의 영하(營下)인 진동루 아래 선착장에서 바람을 기다렸으나 여름철 서풍은 자주 불지 않으므로 남쪽의 장오리로 이동하여 순풍을 기다렸다. 장오리진은 삼척포진에서 약 22km 남쪽에 있으며 미풍에 노를 저으면 반나절정도 걸린다. 장오리진은 동풍과 남풍을 막아주며 북풍을 제외하면 비교적 안전한 포구였다. 그리고 장오리진 어귀 두 곳(오늘날의 장오해변과 용화해변)에는 많은 선박들이 안전하게 묘박(錨泊)할 수 있고, 울릉도와 거리가 가까워서 수토선들은 이곳을 대풍소로 이용하고 바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장오리 대풍소는 구산포의 대풍헌처럼 육상에 대기한 것이 아니라 포구의 선상에서 바람을 기다렸기 때문에 많은 불편이 있었다고 본다.

 

최초의 울릉도 수토선들은 삼척 진영에서 바람을 기다리다 장오리로 이동하여 서풍을 기다렸는데, 최세철과 장한상의 항해(주5)에 잘 나타나 있다. 연구자의 항해 경험(주6)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1] 최세철의 항해

1694년 삼척 군관 최세철은 816일 두 척의 배에 사격을 갖추어 태우고 영하(營下)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18일에 본진 앞바다로 80리쯤 나아가 장오리 어귀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820일 유시쯤 다행히 순풍을 만나 두 척의 배는 돛을 달고 바다로 나아가 밤새도록 배를 몰았다. 다음날 여명에 하나의 섬 이 구름 사이로 보였다. 해가 뜬 뒤에 물안개가 가득하여 섬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동쪽으로 항해하다가 유시쯤 큰 파도가 배를 흔들어 대는 바람에 거의 십 여리를 나아가지 못했다. 아마 수지(水旨)(주7)가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였다. 술시에 또다시 허공을 때리는 사나운 파도를 만났는데, 이것도 물마루의 한 줄기였다. 또 하루를 바다에서 보내고 822일 묘시쯤 커다란 산이 눈앞에 보였는데, 잠깐이면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풍랑이 너무 거세서 돛대가 아무 소용없이 출입과 진퇴를 반복하는 사이에 지체되었다가 미시에 겨우 북쪽 해안에 도달하였다. 중략

830일 축시에 동풍을 만나 항해를 하다가 술시에 번개가 치더니 광풍이 비를 몰고 오고 파도가 거세어져서 돛대가 꺾여버렸고 뒤편 판목이 부러졌다. 동아줄과 쇠못으로 수리하여 동풍을 받아서 나는 듯이 항해하여 91일 술시에 돌아왔다. 왕복거리를 합산하면 7주야 걸렸다.(주8)

 

군관 최세철은 장한상 영장의 명으로 울릉도의 형편과 거리, 물길 등을 정탐(偵探)하기 위하여 16948, 본대의 선척을 만드는 동안 빠른 어선 두 척을 골라 출항준비를 하였다. 816일 유시부터 삼척 진영 진동루 아래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바람이 불지 않자 남쪽 장오리 어귀로 이동하여 바람을 기다렸다. 820일 유시쯤 순풍을 만나 두 척의 배는 돛을 달고 밤새도록 달렸다. 다음날 해뜨기 전에 섬을 보았는데, 여기서부터 안개가 껴서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날이 맑아 구름 속으로 동쪽은 알 수 있어 항해를 하는데, 갑자기 파도가 치면서 배가 흔들려서 항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동해안의 유능한 선두들은 울릉도 항로에서 수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지역을 조심스럽게 통과하려고 하였는데, 술시에 또 한 번 사나운 파도를 만나 애를 먹었다. 군관 최세철은 820일 저녁에 떠나 다음날 저녁에 1차 수종이 발생한 해역에 들어섰고, 2시간 후에 2차 수종이 발생한 해역에 들어섰다. 22일 오후에 울릉도에 도착하여서 약 44시간을 항해하였다. 수종이 나타나는 지역은 중간이 넘는 지역에서 두 번 발생하였다. 귀항할 때도 돌풍을 만나 힘들었고, 항해시간은 왕복 7일이 걸렸다.

 

[자료2] 장한상의 항해

1694년 삼척 영장 장한상(張漢相)은 별견역관 안신휘와 각 방면의 일꾼과 사공, 격군(格軍) 도합 150명을 기선(騎船) 1, 복선(卜船)1, 급수선(汲水船) 4척에 배의 크기에 따라 나누어 싣고, 삼척부 남면 장오리에서 919일 사시에 서풍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술시에 바다 한가운데 들어서니 큰 파도가 치는 곳이 있었다. 이는 필시 물마루(水旨)이니 5리 밖의 두 번째 물마루로 가야 하였다. 하지만 배들이 파도에 휩쓸려 흩어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중략

섬은 북쪽에 보이는데 바닷물은 동쪽으로 흘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저어 뱃머리를 섬으로 향하였다. 죽을힘을 다해서 사시에 섬의 남쪽 켠 닻줄을 맬만한 바위가 많은 모퉁이에 이르렀다. 잠시 육지에 올라가 밥을 짓고 있는데 급수선 4척이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으나 복선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시에 남쪽 바다로부터 복선이 와서 모든 배들이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중략 (주9)(주10)

 

삼척 영장 장한상의 수토선 6척은 9월 중순경 삼척포 진영을 떠나 919일 삼척 장오리포에서 바람을 기다렸다. 920일 북서풍이 불자 출항하였으나 1차 수종지역에서 큰 파도를 만났고, 다음 수종 지역이 5리 밖에 있다고 하여 두 번의 고비를 넘겨야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최세철 군관의 사전탐사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6척의 선박들은 모두 흩어지고 기선은 치목이 부러져서 방향과 균형을 잡을 수 없었고, 해류는 동쪽으로 흘렀다. 기선은 920일 사시에 겨우 울릉도 남쪽에 도착하였고, 복선은 유시에 도착하였다. 항해 시간은 대략 기선은 약 24시간, 급수선은 약 26시간, 복선은 약 32시간 정도 걸렸다. 복선은 북서풍을 받아 남쪽으로 멀리 갔다가 노를 저어서 되돌아 왔고, 기선은 치목이 부러져 제자리에서 맴돌아 멀리 가지 못하였다. 귀항할 때는 동풍을 받아 30시간 만에 빠르게 왔고 수종은 없었다.

삼척 항로의 특징은 삼척포 진영에서 서풍을 기다리다 남쪽의 장오리로 이동하여 서풍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부 영장들은 죽변진까지 남하하여 항해하였다. 그리고 삼척·울릉 항로에는 수종이 두 곳에서 나타나서 항해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삼척 항로의 문제점으로 ‘1819년 삼척 영장 오재신(재임기간 1818.121819.7)이 울릉도를 가기 위하여 평해로 떠났다(주11)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월송 항로가 정식이 되었다고 본다.

 

연구자도 2002726, 동해시 어달항에서 울릉도까지 보트(코스모스 호)로 단독 항해를 하였다. 당시 울릉도 항해는 처음이라 항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출항할 때에는 날씨가 좋았는데, 울릉도 공해상에 들어서자 갑자기 50m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의 안개와 1.5m 파도로 항해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해경 함정의 물결만 보고 따라 갔다. GPS만 믿고 한동안 항해하여 이 지역을 겨우 통과하여 울릉도 가까이에 가니 기상이 좋고 파도가 전혀 없어서 많이 놀랐다.

 

지 역

거리 km

해 리

성인봉 방위°

순 풍

삼척포

142.7

77.05

86.7 卯方

서풍

장호리포

133.4

72.03

80 卯方

서풍

죽변진

132.2

71.38

68.5 寅方

남서풍

구산진(월송포)

144.9

78.24

56 寅方

남서풍

영해(축산)

164.4

88.77

48.5 寅丑方

남서풍, 남풍

 

삼척 영장 이준명(재임기간 1701.81703.9)의 항해(주12)에서 숙종28(1702) 5, ‘울진 죽변진에서 배를 타고 이틀낮밤 만에 돌아왔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석연치 않는 점이 보인다. 영장이 죽변진에서 배를 탔다면 수토선을 미리 보내고 육로로 이용하여 죽변진까지 갔는지? 아니면 수토선을 죽변진에서 마련하였는지? 그리고 왕복에 이틀 낮밤 만에 돌아왔는지? 많은 혼돈을 주고 있다. 그래서 원문을 살펴보니 故浚明乘船于蔚珍竹邊津 兩晝夜而還歸 比濟州倍遠云하였는데, 숙종실록의 번역자가 이준명이 울진 죽변진에서 배를 타고 이틀낮밤 만에 돌아왔는데, 제주보다 갑절이나 멀다고 한다.’라고 하여 대부분 이것을 인용하였다고 보아진다. 이준명의 울릉도 수토기록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어 오해를 할 수 있으나, 연구자는 이준명은 배를 타고 울진 죽변진으로 갔다. 이틀낮밤에 돌아와서 제주보다 갑절이나 멀다고 하였다.’라고 해석한다. , 삼척포진에서 출항하여 죽변진까지 남하하여 울릉도 항해를 하였고, ‘이틀낮밤에 돌아왔다고 하여 귀항은 삼척포진까지 48시간 걸렸다고 본다.

 

2. 월송 항로

 

월송 항로의 중심항은 구미진(오늘날의 구산항) 대풍헌(待風軒)(주13)으로 만호가 있는 월송포진(주14)과는 약 2km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동해안에서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는 울진 죽변진으로 약 132km이다. 삼척이나 월송포(越松浦) 보다 약 12km 정도 더 가까워서 노를 사용하면 약 2시간 정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러나 죽변진에 모여서 출항하려면 많은 시간과 경비가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울진포는 1627년에 폐지되었고 삼척포영과 월송포진이 나누어 수토를 담당하였다.’ (주15)조선 후기에는 월송포진이 수토를 전담하였으나 월송 만호들의 수토와 항해기록을 자세히 알 수 없어 승정원일기에서 조사하여 <2>월송 만호 121명 일람표만들었다.

 

연도

이름

연도

이름

연도

이름

1625

인조3

林東俊

1729

영조5

李徵

1816

순조16

朴載熙

1636

인조14

金得淇

1731

영조7

權尙德

1817

순조17

方一好

1638

인조16

崔良國

1734

영조10

鄭德章

1819

순조19

柳泰根

1640

인조18

元大健

1736

영조12

金道鼎

1821

순조21

李昌潤

1649

효종 즉

文士淸

1738

영조14

金文尙

1824

순조24

丁復禧

1652

효종3

韓繼姜

1740

영조16

韓宗大

1826

순조26

金聲烈

1655

효종6

禹濟民

1742

영조18

朴厚基

1829

순조29

黃在中

1657

효종8

朴懽

1745

영조21

鄭雲興

1831

순조31

李尙浩

1659

현종 즉

柳濠

1746

영조22

丁昌祿

1834

순조34

李錫麟

1661

현종2

鄭時允

1748

영조24

文世郁

1836

헌종2

林章熙

1664

현종5

權崇

1751

영조27

韓重良

1837

헌종3

李寅和

1665

현종6

崔斗平

1752

영조28

尹鑽

1839

헌종5

吳仁顯

1671

현종12

宋榮遠

1755

영조31

金應錫

1841

헌종7

看護之

1672

현종13

元萬

1757

영조33

崔挺良

1841

헌종7

金鍈哲

1674

현종15

曺信

1758

영조34

安天澤

1843

헌종9

吳信範

1678

숙종4

金聖胄

1760

영조36

申珹

1846

헌종12

徐興春

1679

숙종5

申應星

1762

영조38

洪大年

1848

헌종14

李圭祥

1682

숙종8

朴世重

1765

영조41

金振聲

1849

헌종15

李之柟

1684

숙종10

尹欽

1767

영조43

金成澤

1851

철종2

石忠先

1686

숙종12

李寅奭

1769

영조45

裵贊奉

1853

철종4

李東暹

1689

숙종15

李重五

1772

영조48

李世蕃

1855

철종6

池熙祥

1691

숙종17

池重源

1774

영조50

安載壽

1858

철종9

安養奎

1693

숙종19

洪爾長

1776

정조 즉

鄭潤基

1860

철종11

崔允秀

1694

숙종20

朱世基

1779

정조3

鄭泰興

1863

철종14

安光魯

1697

숙종23

邢時挺

1781

정조5

朴相豐

1865

고종2

金箕植

1699

숙종25

田會一

1783

정조7

金昌胤

1866

고종3

張源翼

1701

숙종27

丁萬興

1786

정조10

金宗赫

1869

고종6

徐兢洙

1703

숙종29

盧益有

1788

정조12

南宗禧

1870

고종7

韓斗錫

1705

숙종31

吳興良

1790

정조14

金珍澤

1874

고종11

崔鳳秀

1706

숙종32

金益俊

1793

정조17

金應極

1879

고종16

朴三秀

1707

숙종33

李俊發

1793

정조17

韓昌國

1880

고종17

元喜觀

1710

숙종36

尹徵商

1795

정조19

李壽鳳

1882

고종19

安永植

1712

숙종38

南重河

1797

정조21

盧仁素

1883

고종20

李裕信

1715

숙종41

朴尙廉

1799

정조23

申光載

1885

고종22

安敬學

1717

숙종43

朴東輔

1802

순조2

朴守彬

1887

고종24

黃鎭基

1720

숙종46

張泰興

1803

순조3

劉宗赫

1888

고종25

徐敬秀

1721

경종1

鄭二綱

1805

순조5

李泰根

1890

고종27

李鍾仁

1722

경종2

朴師脩

1808

순조8

崔獻祥

1892

고종29

朴之榮

1725

영조1

邊尙謙

1810

순조10

金元曾

1892

고종29

李完甲

1727

영조3

李衛相

1813

순조13

兪仁柱

1894

고종31

劉鉉, 朴濟榮

월송 만호 최초의 울릉도 수토사는 전회일(田會一)(재임기간 1699.4.265.6)숙종실록울릉도를 수토하고 대풍소(待風所)로 돌아왔다. 본도(本島)의 지형(地形)과 토산품을 진상하였다(주16)고 간략히 기록되어있다. 월송 항로의 항해와 항로를 월송 만호 김창윤과 한창국 그리고 검찰사 이규원의 항해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4] 김창윤의 항해

1786년 월송 만호 김창윤(金昌胤)419일 평해 구미진(丘尾津)에서 바람을 살피다가 427일 오시에 4척의 배에 80명이 승선하여 출항하였다. 28일 묘시에 울릉도가 보였고, 사경 끝에 네 척의 배가 모여 429일 저전동에 도착하였다.중략

수토를 마치고 54일 신시에 울릉도 대풍소에서 제를 지내고 돛을 걸고 출항하여 55일 유시에 월송 만호의 배가 삼척 장오리(長五里)에 정박하였고, 술시에 왜학(倭學)의 배 2척이 와서 정박하였으며, 해시에 하복(下卜)의 배 1척이 또 왔다. 57일에 대풍소에 돌아가 정박하였고, 58일에 진()으로 돌아왔다. (주17)(주18)

 

월송 만호 김창윤(1783.121786.12) 평해 구미진(구미포=구산포, 구산항)에서 419일부터 8일간 순풍을 기다려 27일 낮에 출항하여 429일 울릉도 저전동에 도착하였다. 귀항할 때는 동풍을 받아 삼척 장오리포로 모두 돌아왔고, 연안을 타고 노를 저어 남쪽으로 항해하여 귀항하였다. 이것으로 당시의 월송포진의 울릉도 항로와 항해 방법을 알 수 있으며 수종은 없었던 것 같다. 울릉도 수토는 만호가 있는 월송포진(주19)에서 출발하여 구미진에서 바람을 기다렸다가 항해하였고, 귀항할 때는 동풍을 타고 장오리에 모여 남하하였다.

 

[자료5] 한창국의 항해

1794년 월송 만호 한창국(韓昌國)4척의 배에 왜학(倭學)과 격군 80명을 싣고 421일 미시에 출항하여 유시에 북풍을 만나 4척의 배가 뿔뿔이 흩어졌다. 만호는 식량을 뿌려 해신에게 먹이고 바다에 기원 한 다음 횃불을 들어 신호하니 두 척의 배는 서로 호응하나 한 척은 보이지 않았다. 422일 인시에 두 척의 배가 가까이 오고 동쪽 구름 위로 울릉도가 보여 서쪽의 황토구미진(黃土丘尾津)에 배를 정박하였다. 울릉도를 수토하고 430일 울릉도를 출항하여 58일 본진으로 돌아왔다. (주20)(주21)

 

월성 만호 한창국(1793.61795.12)421일 오후에 순풍 항해를 하였으나 저녁에 동해상을 지나는 저기압으로 북풍을 만나 모든 배가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기상이 나쁠 때는 바다에 제를 지내고 식량을 뿌려 해신에게 먹이는 것과 야간에는 횃불로 신호를 주고받는 항해방법 등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울릉도로 갈 때는 421일 오후에 출항하여 422일 저녁 무렵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귀항할 때는 통구미에서 제사를 지내고 바람을 기다리다 430일 출항하여 58일에 도착하였으므로 약 9일 걸렸다. 여름철에는 역풍(남풍)의 영향으로 대기하였다가 바람이 약할 때 노를 저어서 항해하므로 귀항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자료6] 이규원의 항해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은 427일부터 바람을 기다리다가 429일 오전 10시경 세 척의 배에 사공, 격수, 포수, 취수, 석수, 도척, 영리 등을 태우고 구산포에서 출항하여 바다 가운데 이르렀는데 바람이 약해지고 역류가 흘러 배가 잘 나가지 못하였다. 한 밤중에는 안개로 방향을 잃고 파도가 솟구쳐서 배의 앞 돛이 흔들려 배 안의 사람들이 놀랐다. 밤이 지나도록 망망대해에서 향하는 곳을 도무지 모르겠다. 이내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였다. 처음에는 寅艮方(동북동)으로 향하다가 甲卯方(동동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정오 무렵에 멀리 울릉도의 형상이 보여 곧바로 癸丑方(동북북)으로 향하였는데 순풍을 받아서 화살같이, 별같이 빨리 달릴 수 있었다.중략

511일 맑음. 산신에게 기도하고 오전 9시경 출항하였다. 큰 파도를 세 차례 넘어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바람은 자고 물은 거꾸로 흘러서 배가 나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에 바다 위에서 멈칫거리며 낮을 보내고 밤을 지새우는 것이 전날 같았고, 곤란함은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513일 저녁에 이르러 바로 울진군으로 향하였으나 파도가 심해서 정박하지 못하고 노를 저어 겨우겨우 평해 구산포로 정박하니 밤 10시쯤 되었다. (주22)

 

검찰사 이규원은 소용돌이 해류가 발생하는 지역에서 역류를 만났고, 한밤중에는 수종에 놀랐으나 사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시간이나 방향을 나타낼 때는 십이지(十二支)를 많이 사용하는데, ‘寅艮方, 甲卯方, 癸丑方24방위로 기록하였다.(주23) 망망대해에서 寅艮方(약 동북동: 60°)’에서 甲卯方(약 동동북: 75°)’으로 방향을 바꾸어 항해를 하다가 울릉도가 보이자 癸丑方(약 동북북: 15°)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보아 24방위 나침반(주24)을 사용하여 항해하였다. 당시 세 척의 수토선은 모두 강원도 선박으로 상선(上船)은 간성의 배이고 사공은 박춘달(朴春達)이며 종선은 강릉과 양양의 배였다.(주25) 당시 나침반을 이용한 항해는 원거리 항해를 하는 선박에는 일반적으로 나침반을 사용하였는지? 아니면, 검찰사 이규원이 이번 항해를 위하여 특별히 나침반을 준비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진 4>의 나침반은 일본에서 사용된 항해용 나침반으로 12를 나타내며 중국의 나침반은 24支干을 나타내는 것도 있으나, 범선의 항해는 속력이 늦으므로 12나침반이면 충분하다. 우리나라에서 나침반 항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이규원의 수토선은 울릉도를 항해할 때 패철 또는 나침반을 이용하여 항해하였다.

음력 5월에는 동해바다 기상이 안정되고 날씨가 더워지면서 무풍과 안개가 수시로 발생한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연안 항해를 하였기 때문에 나침반의 필요성을 못 느꼈으나 울릉도 항해 중에는 육지가 보이지 않을 때가 많고 특히, 해무 및 흐린 날씨에는 나침반의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에 육상에서 지관들이 사용하는 패철이나 나침반을 준비하여 수시로 방향을 살폈다고 본다. 귀항할 때도 역류와 무풍으로 바다 가운데서 약 하루 반나절 정도는 항해를 할 수 없었는데도 안전하게 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나침반 항해를 하였기 때문이다.

 

(사진1) 패철과 자작 12지 나침반 /이효웅제공
(사진1) 패철과 자작 12지 나침반 /이효웅제공
(사진2) 일본 항해용 12지 나침반 /이효웅 제공
(사진2) 일본 항해용 12지 나침반 /이효웅 제공

 

연구자도 20188월 말경 태풍 직후에 범선 코리아나 호(주26)SCF 극동범선대회(주27)에 참가할 때 무풍을 두 번 만났다. 일반적으로 태풍이 지나고 34일 후에는 기압이 안정되어 무풍 상태가 되는데, 아침에 울릉도를 보았는데 저녁에도 울릉도가 보여서 하루 종일 해류를 타고 울릉도 북쪽 공해상에서 맴돌았다. 밤에 바람을 만나 항해를 하였으나 아침부터 또 무풍을 만나 해류를 타고 북대화퇴 어장의 중국 쌍끌이 어선들 사이를 하루 종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20028월 단독으로 독도탐사를 마치고 울릉도에서 귀항 중에 전자장비 일체(GPS, 무전기, 휴대폰)가 순간적으로 고전압이 흘러 모두 고장이 났다. 그러나 다행히 파도는 없어서 위험하지 않았으나 한번 정지하니 해무로 방향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비상용 나침반을 찾아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삼척의 이정표인 두타산(1,353m)과 동해화력발전소 굴뚝을 찾아 무사히 귀항하여 나침반의 중요성을 느꼈다. 이후부터 모든 장비는 두 개씩 갖추게 되었다.

 

월송 항로의 특징은 북동쪽으로 약 35°의 사행항로로 여름철의 남서풍이나 남풍을 이용한 순풍 항해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초여름의 동한난류는 세력이 점점 강해져서 삼척까지 올라가므로 순풍 항해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귀항할 때는 울릉도에서 동풍을 타고 삼척 장오리 대풍소에 모여 노를 저어서 남쪽으로 항해하였기 때문에 귀항이 더 힘들었다. 그러다 19세기 말에는 나침반 항해를 하면서 귀항할 때 장오리를 거치지 않고, 해무에도 헤매지 않아서 시간도 단축하고 안전하게 항해 할 수 있었다. 범선 항해는 순풍을 기다려야 하는데 대풍소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데는 짧게는 23일에서 길게는 보름(주28) 정도 걸렸으므로 식량, 식수, 부식 등의 체류 비용이 많이 들었고 특히, 구산지역 주민들은 수토군들의 뒷바라지에 많은 노고가 있었다. (주29)

 

3. 수토사의 항해기록

 

[자료7] 대한민국 독도

조선은 울릉도분쟁이 수습된 17세기 말부터 약 100년 동안 3년에 한 번씩 울릉도 등지에 관리를 파견했다. 이 기간에는 독도를 잘 지켜 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서 조선은 80년이 넘도록 울릉도 등지에 관리를 파견하지 않았다. 조선은 1511년경에도 약 180년간이나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지 않아 조·일간 영토분쟁의 빌미를 제공한 적이 있었다. (주30)

 

2010년에 출판한대한민국 독도(주31)에는 수토기록이 많이 발굴되지 않아서인지 ‘19세기에는 80년이 넘도록 수토사를 울릉도 등지에 보내지 않았다고 하였고, ‘일본에 영토분쟁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수토한 모든 기록을 수집·발굴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안무사, 경차관, 검찰사, 영장, 만호 등 울릉도를 수토하거나 조사한 모든 자료(사료, 각석문, 일기, 족보, 현판 등)를 수집·검토하여 울릉도 수토기록 및 항해기록을 체계적으로 알아보고자 수토 일람표를 제작하였다. <3>조선시대 울릉도 수토 62회 일람표(주32)는 학자들이 수집한 자료와 사료, 각석문 그리고 김기백(주33)의 증언 등을 참고하여 조선시대 전체 62, 1694년 장한상 영장부터 56회를 조사하여 제작하였다. 그리고 항길고택(恒吉古宅) 일기(주34)강원도관초등에서 추정되는 것은 ?’으로 표시하여 구분하였다. 이 일람표에는 16세기의 수토는 기록하지는 못하였으나 비교적 기간별로 많은 자료들을 수집·발굴하여 정리하였고, 19세기에만 35회의 수토기록을 조사하였다.

 

 

<3>의 결과를 보면, 울릉도 수토는 1694년 장한상 영장의 특별수토 이후 1699년 전회일 만호부터 3년 주기로 시행되다가 1795년 이동헌 영장부터 2년 주기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수토 초기에는 나라 사정으로 수토가 일정하지 않았고 해척 사건 등으로 특별수토를 하기도 하였다. 1867년 장원익 만호부터 월송 만호가 수토한 것으로 보아 1860년대부터 울릉도 수토는 월송포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 이후 1883년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주46)로 임명하면서 울릉도 수토를 1년 주기로 시행하였을 것 같으나 기록을 찾지 못하였다. 표에는 1888년 서경수 만호부터 1년 주기로 시행하여 1894년 평해 군수 조성성을 마지막으로 울릉도 수토는 울릉도감에 넘겼다. (으로 계속)

 

(그림1) 울릉도 수토사의 항로 /이효웅
(그림1) 울릉도 수토사의 항로 /이효웅
(그림2) 울릉도 어민들의항로 /이효웅
(그림2) 울릉도 어민들의항로 /이효웅

 


주1) 심현용, 조선시대 울릉도 수토정책(搜討政策)에 대한 고고학적 시·공간 검토, 영토해양연구6, 동북아역사재단, 2013, 185~189.

주2) 윤천수, 월송포 진성 발굴 의의와 울릉도 수토 출발지 변천사, 이사부와 동해5, 한국이사부학회, 2013, 115117.

주3) 김진원, 육향정, 가락종친회, 1984, 72.

주4) 진동루는 조선시대 강원도 삼척포진성의 동문루로 영장이 수군을 지휘하던 곳이다. 삼척포진성은 둘레가 900[270m]이고 높이가 8[242]이며, 영동 9개 군(평해, 울진, 삼척, 강릉, 양양, 간성, 고성, 통천, 흡곡)과 울릉도의 수군(水軍)을 총괄하였다.

주5) 손승철, 울릉도 수토와 장한상, 이사부와 동해5, 한국이사부학회, 2013, 50~51.

주6) 코스모스 호 제작(16피트, FRP 자작보트, 1인용, 50마력, 120리터, 연비 3km) 8,000km 항해2002725, 동해 어달항에서 코스모스호 단독으로 울릉도·독도를 항해하여 729일 독도탐사에 성공하였고, 수종 현상과 무풍 등을 경험하였다. 2002년부터 2022년까지 울릉도·독도 항해 경험은 보트 3, 요트 2, 범선 코리아나 7, 함정 1, 여객선 4, 18.

주7) 물마루 현상으로 水旨 또는 水宗이라한다. 본고에서는 이해하기 쉽게 수종(水宗)이라고 하였다.

주8) 손승철, 박미현 편저, 울릉도·독도 품은 강원도 사람들, 삼척시·강원도민일보, 2012, 409411. [자료1]울릉도의 군관 최세철 항해를 연구자가 요약했다.

주9) 『숙종실록, 한국고전번역원DB, 숙종 20(1694) 814, 원전39344.

주10) 손승철, 박미현 편저, 앞의 책, 411414. [자료2]울릉도 사적의 삼척 영장 장한상 항해를 연구자가 요약했다.

주11) 심현용, 앞의 논문, 187쪽 재인용, 원본 한길댁 생활일기, 1819년 윤49.

주12) 심현용, 앞의 논문, 187쪽 재인용, 원본 한길댁 생활일기, 1819년 윤49三陟營將李浚明倭譯崔再弘 還自鬱陵島 獻其圖形及紫檀香靑竹石間朱魚皮等物 鬱陵島間二年 使邊將輪回搜討 已有定式 而今年三陟當次故浚明乘船于蔚珍竹邊津 兩晝夜而還歸 比濟州倍遠云.

주13) 대풍헌은 조선시대 구산포에서 울릉도로 가던 수토사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건물로 건물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산동사 중수기에 의하면 1851(철종 2) 중수하고 대풍헌이란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주14) 월송포진은 평해 동북쪽에 있으며, 1555(명종 10)에 둘레 489~628, 높이 6~7척의 석축을 쌓아 조성되었다. 여기에 수군만호 1명과 수군 400명을 주둔시켰으며 울릉도를 수토할 때 수토군이 이곳 월송포에서도 출발하였다.

주15) 심현용, 위의 논문, 187. 울진군은 19621212일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주16) 『숙종실록,한국고전번역원DB, 숙종 25년 기묘(1699)715, 25-07-15.

주17) 『일성록, 한국고전번역원DB, 정조 10년 병오(1786) 64, 10-06-04[08].

주18) [자료3]월송 만호 김창윤의 항해를 연구자가 요약했다.

주19) 『향토문화전자대전, 월송포, 월송포진은 평해에서 동북쪽으로 7리에 있으며, 1555(명종 10)에 둘레 489~628, 높이 6~7척 되는 석축을 쌓아 만들었고, 수군만호 1명과 수군 400명을 주둔시켰다.

주20) 『일성록, 한국고전번역원DB, 정조 18년 갑인(1794) 63.

주21) 『일성록, 한국고전번역원DB, 정조 18년 갑인(1794) 63.

주22) 손승철, 박미현 편저, 앞의 책, 424444. [자료5]검찰사 이규원의 항해를 연구자가 요약했다.

주23) 손승철, 박미현 편저, 위의 책, 435. ‘寅艮方24방위를 오늘날의 16방위 동북동이라고 고쳐서 기록하였다. 그러나 24방위는 한 방위가 15도이고, 16방위는 22.5도 이므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주24) 24방위는 열두 개의 지지(地支)와 간(), (), (), (). (), (), (), (), (), (), (), ()로 방위를 나타낸다.(甲卯,正卯,乙卯,辰巽,正巽,巳巽,丙午,正午,丁午,未坤,正坤,申坤,庚酉,正酉,申酉,戊乾,正乾,亥乾,壬子,正子,癸子,丑艮,正艮,寅艮).

주25) 손승철, 박미현 편저, 위의 책, 434435.

주26) 코리아나 호 제원: 전장 41m, 전폭 7m, 135, 마스트 4, 마스트 높이 30m, 항해속도 8~10노트, 승선 인원 72(크루즈 약 30), 선장 정채호, 선적 대한민국 여수.

주27) 2018 SCF 극동범선대회는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 이벤트 행사로 개최함. 여수-블라디보스토크 범선경기에서 코리아나 호 종합 준우승. 연구자는 코리아나 호 항해팀장으로 참여하였다.

주28) 손승철, 조선후기 수토기록의 문헌사적 연구」「울릉도 수토 연구의 회고와 전망, 한일관계사 연구통권 51, 한일관계사학회, 2015, 120.

주29) 심현용, 앞의 논문, 194~196.

주30) [자료6]대한민국 독도, 1독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 16. ‘고종, 공도 정책을 이주 정책으로 바꾸다를 연구자가 요약했다.

주31) 호사카 유지·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 저, 대한민국 독도, 성인당, 2010.

주32) 심현용 앞의 논문, 178-179쪽 표(김호동, 손승철, 배재홍의 표를 수정 보완함)와 김수문, 삼척도호부 암각문 연구, 역대 울릉도 토포사 일람표, 퍼플, 2020, 325쪽을 참고하여 추가하였다.

주33) 김기백, 전 울릉도 관광과장 겸 독도박물관장.

주34)  『항길고택(恒吉古宅)일기2018, 강릉 김씨 후손이 동북아역사재단에 기증한 자료를 배재홍이 한길댁 생활일기로 학계에 소개하였다.

주35) 왕세자께 수토를 보고하고 논의 함. 백인기,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제도의 주기성과 그 의의, 이사부와 동해6, 한국이사부학회, 2013, 165174.

주36) 이만협 영장은 1727년 왜학 최만적 외 98명을 인솔하고 411일 출항하여 52일 죽변진에 회착.

주37) 배재홍 옮김,국역 척주선생안, 120, “삼척 영장이 수토할 차례이지만 흉년으로 임금이 그만 두라고 하였는데, 영장 홍우보는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어 산삼을 몰래 캐내던 일이 발각되었다.”

주38) 1776년 월송 만호 이름은 두 가지다. 영조 50619(安載壽), 621(安載素)라 기록하였다.

주39) 1787(정조11) 725, 경상도 울산의 해척 추잇돌, 최잠돌 등 곁군 14(秋㗡乭·崔潛乭等, 率格軍十四名)이 울릉도에서 어복, 향죽 채취하고 돌아오다 본부 포구에서 적발됨. 주범과 종범으로 나눈 것 같음. 실제 울릉도를 수토한 것은 아니다.

주40) 『비변사등록, 정조11829, 선박 4척과 편죽 1,164부 울릉도에서 제작하여 덕원 신도에서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다.

주41) 울산 사공 2명이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복어(전복)를 채취하여 발매하였다. 무단으로 들어간 것을 숨기고 보고 하지 않아 파직 당하였고, 동래 왜학도 함께 죄를 받았다.

주42) 『경상좌병영계록, 철종1(1849) 89, 통영군관 서문억과 김이방 곁군 28, 이양선을 수토함.

주43) 『승정원일기, 고종18522, 울릉도 수토관 보고에 나무를 베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7명에게 글을 써서 물어보니 일본사람으로 나무를 원산과 부산으로 보내려고 한다.”고 대답하였다.

주44) 이원택, 조선후기 강원감영 울릉도 수토 사료 해제 및 번역, 영토해양연구8, 2014, 185196.

주45) “울릉도는 외국인이 잠상(潛商) 벌목하고 있는바 일찍이 월송 만호를 도장(島長)에 겸차하여 검찰하였을 때도 이러하지 않았으니 만큼 하거(下去) 후에는 각별히 찰칙(察飭)하여 전과 같은 폐()가 없게 하라고 하였다.

주46) 1883(고종 20) 조선 정부가 울릉도를 비롯해 동해안에 있는 섬들을 보호·개발하기 위하여 신설한 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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