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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소카왕 모델로, 전륜성왕 꿈꿔…순수비에 중국 천자 흉내
진흥왕②…황제가 되고자 한 신라왕
2019. 06. 30 by 김현민 기자

 

신라 진흥왕은 왕의 단계를 넘어 황제가 되려고 했다.

<화랑세기>에선 진흥(眞興) 대제(大帝)라는 표현이 나온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는 ()’, ‘제왕건호 막불수기이안백성(帝王建號 莫不修己以安百姓’, ‘공위건도(恐違乾道)’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라는 표현은 황제가 스스로를 부르는 일인칭 대명사로, 진흥왕은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음을 은연중에 표현했다. ‘帝王建號 莫不修己以安百姓을 풀이하면 제왕이 연호를 세워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으로, 진흥왕은 임금의 지위를 넘어서 황제의 덕목을 인용한 것이다. ‘恐違乾道에서 건도(乾道)는 천도(天道)를 의미하는데, 진흥왕은 삼가 하늘의 뜻을 어길까 두려워 한다며 중국 천자(天子)를 흉내 냈다.

 

진흥왕은 통치이념으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스스로는 인도의 아소카왕(阿育王)을 닮아가려고 했다.

아소카왕은 기원전 3세기에 정복을 통해 인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임금이다. 그는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지만, 전쟁이 끝난후 속죄하는 마음으로 불교에 귀의해 불교의 수호자임을 자임했다.

불교에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적인 제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한다. 전륜왕에는 금륜(金輪)은륜(銀輪)동륜(銅輪)철륜(鐵輪)의 네 왕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인간의 수명이 2만세에 도달할 때 먼저 철륜왕이 출현하고, 8만세에 도달할 때 금륜왕이 출현해 사천하를 다스린다고 한다. 인도인들은 아소카왕에게 전륜성왕 4단계중 가장 먼저 찾아오는 철륜(鐵輪)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진흥왕은 맏아들인 태자에게 동륜(銅輪)’, 나중에 진지왕이 되는 차남에게 금륜(金輪)’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화랑세기>에는 딸에게 은륜(銀輪)’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진흥왕은 스스로를 전륜왕 가운데 먼저 찾아오는 철륜(鐵輪)’으로 생각했고, 그의 자식들 대에 또다시 전륜왕의 성대가 이뤄지길 기대한 것 같다.

전륜성왕이 되고자 하는 욕구는 불교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신라말기에 민초들의 불만을 끌어들여 태봉이라는 나라를 세워 고려 건국의 기초를 제공한 궁예도 전륜성왕이 되려 했다. 또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성 천자인 측천무후도 전륜성왕을 꿈꾸었다. 진흥왕도 영토가 세배 이상 커지고, 영토확장 과정에서 숱한 살육현장을 겪으면서 살생의 죄과를 씻고 태평성대를 열고자 전륜성왕을 꿈꾸었을 것이다.

진흥왕은 자신보다 8백여년 전의 인물인데다 지리적으로 거리가 먼 인도 아소카왕과의 인연을 전설로 꾸며냈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 장륙존상에 얽힌 설화를 소개했는데, 그 스토리에서 진흥왕이 아소카왕과 대등하거나 더 높은 존재임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엿볼수 있다.

 

경주 진흥왕릉 /문화재청
경주 진흥왕릉 /문화재청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14(553) 2월에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고 했는데, 황룡이 그 땅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절로 바꾸어 짓고 황룡사(皇龍寺)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바다 남쪽에서 커다란 배 한 척이 나타났는데,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울주(蔚州) 곡포(谷浦)]에 정박했다. 배를 조사해 보니 공문이 있었다.

서축(西竺, 인도)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푼을 모아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부디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장륙존(丈六尊)의 모습을 이루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부처상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하곡현 관리가 이 사실을 문서로 아뢰었다. 왕은 그 현의 성 동쪽에 높고 밝은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고 세 불상을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과 쇠는 서울로 운반해 와, 대건(大建) 6년 갑오(574) 3월에 장륙존상을 주조했는데 단 한 번에 성공했다. 그 무게는 35,007근으로 황금 10,198푼이 들어갔고, 두 보살에는 철 12,000근과 황금 10,136푼이 들어갔다.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는데, 그 이듬해 불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발꿈치까지 이르렀으니 땅을 한 자나 적셨다. 이것은 대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엄청난 무게의 금속을 실은 배가 8~9백년의 세월을 걸쳐 인도양에서 동해 바다까지 왔다는 설화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흥왕은 아소카왕도 하지 못한 불상을 제작하는데, 한번에 성공했다고 자랑했다. 또 왕이 죽기 전에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발꿈치에 이르렀다며,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시도했다.

대규모 사원(황룡사)을 짓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은 탑(9층목탑)을 건립함으로써 진흥왕은 전륜성왕의 첫단계(鐵輪)를 이루었다고 자부했다.

 

경주 황룡사지 /문화재청
경주 황룡사지 /문화재청

 

진흥왕은 4개 순수비 가운데 가장 먼저 창녕비를 건립하면서(561) 비사벌 순수에 나선다. 그는 거칠부를 비롯해 최전방 군단장격인 군주(軍主)들과 그 아래 직책인 당주(幢主)들을 대거 대동해 위세를 과시했다.

진흥왕은 창녕비에서 과인은 어려서 즉위해 정사를 보필하는 신하에 맡겼다”(寡人幼年承基 政委輔弼)이라는 어귀가 나온다. 진흥왕이 어렸을 때 정사를 보필하는 신하들의 보필로 성장해 이제 스스로 망라사방의 위세를 떨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창녕비에는 사방군주(四方軍主)라는 표현을 하면서 비자벌(比子伐, 창녕) 군주, 한성(漢城, 서울)군주, 비리성(碑利城, 함남 안변) 군주, 감문(甘文, 경북 김천) 군주를 들었다. 신라의 영토 확장 방향이 동해안 방면, 한강 방면, 가야 방면, 소백산 방면이었음을 보여준다.

창녕비는 대가야(고령)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아직 대가야가 신라 영토로 편입되지 않았을 때였고, 곧이어 대가야를 공격하러 갈 것임을 시위하는 의미로 비석 건립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비 건립 이듬해인 562,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흥왕은 노장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을 앞세워 대가야를 먹어버렸다. 대가야는 이미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와 연대하다가 패함으로써 기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다함의 5천 기병에 쉽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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