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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건주여진, 왜란 7년 공백 틈타 해서여진 장악…명과 전쟁 돌입
누르하치, 호륜4부 병합…만주, 중국·조선 흔들다
2019. 07. 01 by 김현민 기자

 

중국 청()나라를 건설한 누르하치의 발상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산악지대인 건주여진이었다. 그곳에는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수렵과 채취로 생활을 하며 어렵게 살던 부족이었는데, 산에서 인삼을 채취해 명()나라에 팔아 나라의 기반을 잡아 나갔다. 당시 인삼은 재배되지 않고 야산에서 채취해야 했다.

명나라 시대에 만주에는 건주여진(建州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다. 이 분류도 명이 지역별로 구분한 것이지, 세력권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었다. 여진족은 뿔뿔이 흩어져 부족단위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각 부족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고, 땅을 빼앗고, 약탈을 일삼았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인삼을 팔아 조성한 자금력으로 군비를 확충했다. 1583년 장백산 일대에 부족들을 정복했고, 임진왜란 기간(1592~1598)이 터지자 이웃 강대국인 조선과 명이 전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힘의 공백을 활용해 세력을 불려 나갔다.

건주여진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해서여진을 엿보았다. 당시 해서여진에는 하다(哈達), 후이파(輝發), 우라(烏拉), 예허(葉赫) 4개 부족이 세력을 떨쳤는데, 그중 예허가 가장 세력이 강했다. 해서여진의 네 부족을 호륜(扈倫) 4부라고 불리웠다.

 

호륜(扈倫) 4부와 누르하치 합병 /김윤순 논문 참조
호륜(扈倫) 4부와 누르하치 합병 /김윤순 논문 참조

 

누르하치가 호륜 4부 가운데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곳이 하다(哈達)였다. 하다는 명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명이 국경무역시장으로 개설한 마시(馬市)의 남관(南關)에 가까웠다. 네 부족 중에서 비교적 힘도 약했다. 명나라는 해서여진에 무역허가장인 칙서(勅書)1,000개 발급했는데, 이중 하다에 700, 예허에 300개를 주었다. 하다를 손에 넣으면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칙서 500개를 더해 1,200개의 칙서를 갖게 되어 사실상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는 이점이 생기게 된다.

하다와 예허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예허의 부족장 납림포록(納林布祿)이 하다의 부족장 맹격포록(孟格布祿)과의 혼약을 파기하면서 두 부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여진족들은 부족장 자녀들의 통혼을 통해 동맹을 맺었는데, 혼인 약속을 파기하는 것은 전쟁 행위나 다름 없었다. 예허의 군사력이 월등하게 우세했다. 하다는 초전에 밀리게 되자, 부족장 맹격포록은 누르하치에게 인질을 보내며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병력 2,000명을 하다에 파견했다.

이에 예허의 납림포록은 하다의 맹격포록에게 우호적 관계를 약속할 터이니, 누르하치 군대를 죽이라고 제의했다. 맹격포록은 제의를 받아들여 누르하치에게 보내려던 인질을 되돌아 오게했다. 누르하치가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 누르하치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하다부를 점령하고 맹격포록을 죽여버렸다.

명나라는 호전적인 누르하치가 하다를 합병하면 국경을 맞대게 되므로, 여진족 분쟁에 개입했다. 명이 중재에 나서자 누르하치는 맹격포록의 아들 무이고대(武爾古岱)를 돌려보내 하다의 부족장에 앉혔다. 하지만 하다는 누르하치의 괴뢰정부나 다름 없었다. 얼마후 예허가 하다를 침략하자, 누르하치는 무이고대를 건주여진으로 소환하고 직접 통치를 했다. 1599년의 일이다.

 

다음은 후이파(輝發)였다. 후이파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고, 건주여진이 북쪽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었다.

후이파의 부족장 배음달리(拜音達理)는 누르하치의 호전성에 대응하기 위해 예허와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후이파에 반란이 발생했다. 반란자들은 배음달리의 숙부 7명을 살해하고 예허로 투항했다. 배음달리는 대신들의 아들을 인질로 하는 조건으로 누르하치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1,000명의 군사를 후이파에 파병했다. 예허는 하다에서 하는 수법을 후이파에도 써먹었다. 예허는 자기 부락에 투항해온 반란자들을 돌려보낼 터이니, 우호적 관계를 맺자고 했다. 배음달리도 예허 부족장 납림포록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갔다. 후이파의 부족장은 누르하치에게 보내려던 인질을 돌아오게 하고, 예허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허는 돌려보내기로 한 후이파의 반란자들을 송환하지 않았다. 그러자 배음달리는 다시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파견해 약속을 어긴데 대해 반성하며 누르하치와 통혼하자고 제의했다. 누르하치는 이번에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배음달리는 또다시 배신했다.

누르하치는 더 이상 배음달리의 배신에 속지 않고 후이파를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후이파의 성()은 견고했다. 누르하치는 우선 정예병사 수십명을 뽑아 장사치로 변장시켜 후이파 성내로 잠입시켰다. 곧이어 대군을 이끌고 후이파를 공격했고, 이미 성내에 들어간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주었다. 후이파의 추장 배음달리는 전투중에 죽었고, 부족민들은 누르하치에게 복속했다. (1607)

 

우라(烏拉)의 부족장 포점태(布占泰)는 건주여진과 한때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누르하치의 딸과 결혼해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라는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두만강 중하류를 영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만강 북쪽의 여진족은 인구가 많았다. 조선이 국경 방어를 위해 쌓은 6진의 외곽에 모두 289개의 부락에 8,523호가 살고 있었다고 당대의 기록은 전하는데, 여진족은 10인 이상 대가족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 인구는 10만여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세력을 확장하려는 누르하치에겐 두만강 유역의 이 인구를 손에 넣어야 병력을 증강시킬수 있다.

누르하치는 포점태가 성장하는 것을 두고 볼수는 없었다. 건주여진과 우라는 두만강 북쪽과 동쪽 지역을 놓고 충돌했다. 1607년 누르하치는 군대를 파병해 오갈암(烏碣岩)에서 우라군을 패퇴시켰다. 오갈암은 현재 북한 함경북도 나선시에 위치하고 있다. 여진족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 전투는 선조수정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누르하치와 포점태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1608년 누르하치는 병사 5,000명을 내어 우리를 공격했다. 이에 포점태는 누르하치의 딸에게 모욕을 주고, 건주여진에 복속한 부족을 침략했다.

1614년 누르하치는 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우리성을 공격했다. 포점태는 놀라 잘못을 후회한다며 군대를 철수하면 자신의 아들과 대신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겠다고 화평을 구했다. 누르하치는 그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군대를 철수했다. 하지만 포점태는 인질을 보내지 않고, 누르하치 딸들을 감옥에 감금시키고, 예허와 연합해 누르하치에게 대항하는 태도를 보냈다. 누르하치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오랍을 정벌해 합병해 버렸다. 포점태는 패잔병 100여명을 이끌고 예허로 도망갔다.

 

이제 호륜 4부 가운데 예허(葉赫)만이 남았다. 건주여진과 예허는 오래전부터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아내 맹고(孟古)는 예허 귀족 양길노(揚吉努)의 딸이었다. 1601년 맹고가 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누르하치는 사신을 예허에 보내 장모를 건주여진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는데, 부족장 금태희(錦泰希)가 거절했다. 누르하치의 부인은 어머니를 보지 못한채 죽었다. 이에 누르하치는 금태희를 그릇이 작은 인물이라며 곱게 보지 않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하다, 후이파, 우라를 복속시킨 이후 예허를 정복하려 했다. 1609년 누르하치는 군대를 이끌고 예허를 공격했지만, 예허군에 대패하고 돌아왔다. 예허는 누르하치의 공격을 명나라에 보고했는데, 명은 예허를 지지했다. 누르하치가 예허를 손에 넣으면 완충지대가 사라지게 된다. 이른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론이다.

포점태는 누르하치와 잘 지내 보려는 차원에서 자신의 여동생을 누르하치의 아내로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1613년 금태희는 누르하치와의 혼약을 깨고 여동생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냈다. 이에 누르하치는 4만의 군대를 이끌고 예허를 공격했지만, 예허는 명나라의 군사지원을 얻어 누르하치 군대를 물리쳤다.

건주여진과 예허가 자주 전쟁을 벌이자, 명나라는 차제에 누르하치를 진압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명은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명분으로 군대를 보내달라고 압박하고, 예허와 연합군을 형성해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침공한다. 이른바 1619년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의 시작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곧바로 예허 정벌에 나서 복속시켰다. (1619)

 


참고논문) 김윤순(강원대), 누르하치의 扈倫4통합과 후금의 건국(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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