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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당시 후금은 명-조선 넘볼 정도로 강하지 않아…결전의식도 부족
강홍립에게 투항지시 내린 비겁한 광해군
2019. 07. 03 by 김현민 기자

 

161611일 누르하치는 스스로 칸()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이라고 칭했다. 그는 일곱가지 원한’(七大恨)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칠대한에는 명이 조부와 부친을 살해한 일, 예허(葉赫) 부족을 지원해 여진족 통일을 방해한 일 등이 적시되었다. 그리고 명이 침공해 오길 기다리지 않고 2만의 철기군을 이끌고 명나라 변경인 무순(撫順)과 청하(淸河)를 급습했다.

명나라는 화가 났다. 조선과 여진의 예허부족과 연합군을 구성해 누르하치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가 16193월에 있었던 이 전투를 중국에선 사르후(薩爾滸) 전투, 우리나라에선 심하(深河) 전투라 불렸다.

연합군은 명군 88,000, 조선군 13,000, 예허부족군 2,000명 등 10만을 넘어섰다. 이에 대항하는 후금군은 6만이었다. 무기는 명-조선 연합군이 월등히 우세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운용한 정예 조총부대를 파견했다.

결과는 명군의 대패, 후금군의 대승이었다. 전사자는 후금쪽에서 200여명에 불과한데 비해, 명 연합군에선 46,000명에 이르렀다.

사르후 전투는 후금이 만주에서 커지기 전에 싹을 자르기 위한 예방전쟁이었다. 조명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했다. 명나라의 작전이 서툴렀다. 후금군은 조명 연합군의 침입 정보를 미리 알고 매복작전을 폈고, 명군이 패하고 조선의 강홍립(姜弘立) 장군은 투항했다.

이 전투에 대해 많은 역사가들은 명과 청의 권력교체를 예고하는 승부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만주족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명은 물론 조선을 넘볼 정도로 강력하지 않았고, 누르하치도 이 전투를 이긴 후에 명을 정복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역사가들이 답을 알고 하는 평가일 뿐이다.

 

사르후 전투도 /위키피디아
사르후 전투도 /위키피디아

 

조선의 광해군은 명의 요청으로 13,000명의 조선군을 파병하고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만주로 보내기 앞서 밀지를 내려 후금군에게 투항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을 옹호하는 역사가들은 이 대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 광해군이 주화론자인 강홍립을 파병대장으로 삼은 것 자체가 투항을 지시한 것이라는 설과 강홍립이 독자적으로 투항했다는 설이 갈린다. 여하튼 광해군은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투항지시를 내릴 것을 사실로 보고 문제를 짚어보자.

광해군이 1만여명의 파병군을 보내면서 강홍립에게 사전에 투항하라고 지시했다면 너무나 잘못한 일이다. 이 전쟁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전쟁만은 아니었다. 나중에 후금은 조선을 두차례 침공하고 후임 국왕과 백성들에게 굴욕을 주었다. 어찌 임금이 전장에 군사를 보내면서 투항하라고 지시할수 있다는 말인가. 인류역사 책을 다 뒤집어보아도 그런 지시를 내린 군주는 없다.

투항 지시를 중립외교론의 근거로 대는 것은 일본 학자에겐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우리 역사학자나 정치인, 언론인들이 그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전쟁을 피하자고 1만여명의 군사에게 죽거나 포로로 잡히라고 한 지시를 어찌 미화할 수 있는가. 아무리 임금 자리에 있다고 해도, 그런 지시는 역사에 대한 배신이요, 백성에 대한 역적 행위다.

만약 중립외교론자들의 주장대로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투항을 지시했다면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조선군 1만여명을 후금에 보태주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는 명나라에 치명타를 입혔고, 후금에겐 기회를 제공했다. 후금은 곧이어 16198월에 예허 부족을 멸망시키고 1620년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등 요동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기회는 있었다.

후금이 만주를 장악했지만 아직은 명나라를 넘볼만한 국력이 되지 못했다.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후금의 경제는 기진맥진했다. 목축국가는 농업국가와 교역을 통해 물자를 공급받았는데, 여진은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요동의 한족 농민들이 후금의 강압에 반발해 농사를 포기하고 봉기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누르하치는 수차례 만리장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광해군이 쫓겨난지 3년째 되는 1626년 누르하치는 만리장성의 영원성(寧遠城) 전투에서 대패했다. 명나라엔 원승환(袁崇煥)이란 맹장이 버티고 있었고, 당대 최신 무기인 홍이포(紅夷砲)를 대량 보유하고 있었다. 후금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홍이포 11문의 대폿밥이 되었다. 누르하치도 홍이포 유탄을 맞아 퇴각한후 곧바로 사망했다.

적어도 광해군 시기에 후금은 명과는 적수가 아니었다. 조선은 군사력을 키워 후금에 강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다. 조선이 후금의 배후에 강하게 버텼다면 전세가 달라졌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한 배기찬씨는 코리아-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1)  이 책은 노 대통령이 2005년에 이 책 한번 읽어 보세요라며 권하던 책이다.

“1608년 광해군이 집권했을 때 결사항전의 자세로 전쟁에 대비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7년전쟁(임진왜란)에서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입은 함경·평안·황해도에 전력을 다해 성을 쌓고, 군대를 기르고, 무기를 제조하고 군량미를 확보했다면, 그리고 역사를 읽으며 전략전술을 세워 두었다면 전국민을 하나로 결집할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7년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었고, 문명을 공유하고 대일전에 참전한 명과 대후금 공조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의 지도층들은 조선의 아래에 있었던 야만적인 여진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이런 노선을 견지했다면 후금에 승리하지는 못했다 해도, 참패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란의 침략을 격퇴한 고려처럼 후금의 공격을 막아 낼수 있었을 것이고, 후금이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명을 공격하는데 조선이 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사르후 전투후 만주의 형세 /위키피디아
사르후 전투후 만주의 형세 /위키피디아

 

문제는 광해군의 결전의식이었다.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해(1618), 광해군에게 재위 10년째에 접어든다. 즉위 후 북방이 요동을 치는 10년간의 긴 기간 동안에 광해군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광해군은 전쟁을 경험한 군주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를 이끌었다.

19524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다급해진 선조 임금은 전쟁 발발 보름만에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분조를 이끌게 했다. 선조는 하시라도 명나라로 도망갈 태세로 평안도에 머물면서 세자에게는 전국을 돌며 전투를 지휘하게 했다. 18살의 광해군은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를 돌며 전투를 독려했고, 서울로 돌아온후 다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돌았다. 무려 27개월 동안 풍찬노숙을 하며 전국 구석구석까지 다녔다. 조선조 27명의 임금 중 광해군만큼 전국토를 돌며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겪는 참상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전쟁을 피하려 했다. 전쟁은 왕실에게도 고통을 주지만, 백성들에게는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호전적 국가에 무조건 굴복할 일은 아니다. 일개 사대부나 백성이 아닌, 임금이라면, 나라의 군사력을 키우고, 적과 한번 붙자는 배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광해군은 그럴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광해군이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때는 이미 임진왜란이 끝난지 20년이 지났고, 즉위후 10년이란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초에 여진족에 대한 대책으로 정보 수집을 강화하고, 친히 전투 훈련을 참관하고 방어진지를 점검했다. 누르하치의 철기군에 대항할 무기는 화포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1813년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하고, 파진포(破陣砲)등 각동 화포를 생산케 했다. 그리고 변방 수령을 대부분 무신으로 임명하고 나름 병력도 확충했다.

하지만 광해군에겐 결전의식이 부족했다. 그에게 주어진 10년의 세월은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모 등 정적 제거에 몰두하고 궁궐 건설등 토목공사에 국력을 소진했다. 전쟁에 대비하는 의식이 있었다면, 국론을 통합하고 전쟁재원을 확보해야 했었다.

광해군은 그에게 주어진 10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1619년 명의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파병을 결정한다. 파병 후에도 후금이라는 독버섯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을 채택해야 했음에도 불리하면 투항하라고 몰래 지시한 것이다.

광해군 옹호론자들은 이를 중립외교라고 칭찬한다. 이때는 중립외교를 취할 때가 아니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군사력을 합치면 지린성의 야만 부족 정도는 제압할 수 있었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불리하면 투항하라고 지시했다면, 국제관계를 냉철히 판단한 결과라기보다는 전쟁에 대한 지나친 공포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1) 배기찬,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2005),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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