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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망명 요구에 시큰둥…조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과 강화 추진
임진왜란③…선조를 불신한 명나라
2022. 12. 05 by 김현민 기자

 

[에서 계속] 선조는 상국인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정작 명은 조선을 의심했다. 명나라는 왜군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부산에 상륙한지 보름 남짓만에 수도를 함락하고 두달도 되지 않아 평양에 도달한 것을 의심했다.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지 않고선 일본군이 그렇게 빨리 북상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15926월초 명나라는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최세신(崔世臣)과 임세록(林世祿)을 조선에 파견했다.

징비록에 따르면 유성룡이 임세록을 대동강이 보이는 곳으로 데리고 가 멀리 왜병이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성룡은 선조의 미움을 사 좌의정에서 물러나 명 사신을 접대하는 풍원부원군 직을 맡고 있었다. 유성룡의 설득으로 명 사신은 왜와 조선의 야합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고, 중국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조선의 자문(咨文, 외교문서)을 받아 돌아갔다.

명은 조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조선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 왜군이 대동강에 이르자 선조는 611일 급하게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다. 평양성에서도 백성들이 왕의 탈출을 막아섰으나 선조는 좌상 윤두수와 이조판서 이원익에게 평양을 사수하라고 명한 후 야반도주하듯 달아나 버렸다.

임금이 평양을 빠져나간지 이틀후 613. 윤두수와 김명원은 재빨리 도주했고, 왜군은 평향성을 무혈입성했다. 전쟁 개시 두달만에 일본은 평안도 북부만 제외하고 조선 전역을 점령한 것이다.

 

선조는 영변에 도착해 또다시 명나라로 내부(內附)할 의사를 강력하게 표시했다. 선조실록(1592613)을 요약한다.

주상이 요동으로 들어가는 일을 물으니, 영의정 최홍원이 요동은 인심이 몹시 험합니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선조는 그렇다면 내가 갈 곳을 말해보라. 내가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고 했다. 주상이 세자를 이곳에 남겨두고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정철은 왜적이 가까이 오면 동궁이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자, 선조는 또다른 신하에게 요동으로 가면 어떤가 하고 물었다. 그 신하도 명조가 지금은 비록 포용해주고 있지만 꼭 받아줄지의 여부는 알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항복이 들어와 상황이 위급하므로, 분조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선조는 광해군과 권력을 나눌 생각은 없었지만 분조론을 허락했다. 이는 조선은 세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요동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선조는 말했다. ‘말은 많은데 도움되는 게 없다. 백방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가는 곳에 왜적도 따라 올 것이므로 본국에 발붙일 곳이 없다.’ 영의정 최홍원이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들어갔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선조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널 것이다"고 했다.“

 

그렇게 막구가내이던 선조는 막상 의주에 도착하고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다. 신하들의 만류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명이 선조의 요구를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선조가 명나라에 망명하도록 해달라고 자문을 보냈는데, 명으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선조실록(25626)명나라는 우리 나라가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고 장차 우리 나라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고 쓰여 있다. 선조는 자신이 요동에 가면 명나라가 제후로서 대접해 궁궐을 하나 내주어 호화롭게 살도록 배려할 줄 기대했는데, 빈 관아에 거처하도록 하겠다는 답변을 받은 것이다. 그 말은 명이 사실상 선조의 내부를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다. 답신을 받고 선조는 내부를 포기한다. 때마침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군 파병을 약속해 왔다.

 

명이 항왜원조(抗倭援朝)를 결정한 것은 조선이 망하면 요동이 위험해지고, 중국 전체가 위험해 진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에 근거한다.

명의 칙사 설번(薛藩)은 귀국후 황제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걱정거리는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강역에 있고, 중국의 강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도 근처까지 진동될까 두렵습니다. 무릇 요동은 북경의 팔과 같고, 조선은 요동의 울타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동원해 적을 토벌하는 일은 한순간인들 늦출수 없습니다.”

이 논리는 360년후 한국전쟁에서도 적용된 중공의 주장과도 같다. 한반도를 바라보는 중국의 일관된 시각인 것이다.

 

고양시 행주산성 행주대첩비 /문화재청
고양시 행주산성 행주대첩비 /문화재청

 

그해 12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4만여명의 명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12월말 명군이 평안도 안주에 이르자 선조는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해 군무를 맡겼다. 조명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이듬해인 159319일 평양성을 탈환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 서군은 한양으로 퇴각했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이여송의 명군은 경기도 고양시의 벽제관에서 발이 묶였다. 그에 비해 212일 권율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한강변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한양을 가운데 두고 양측이 교착상테에 빠졌다.

 

명군은 조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적당히 일본과 타협해 전쟁을 중단하고 싶어했다. 일본측도 강화를 원했다. 이에 비해 그동안 도망치기 급급했던 선조가 이젠 강경론자로 변신했다.

명과 왜는 주전론을 펼치는 조선을 제외한채 강화회담을 열었다. 3백년이 더 지난 후에 열린 6·25 휴전회담에서 한국이 회담에서 제외된 것과 같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심유경(沈惟敬)용산 강가에서 만나 협상조건을 교환했다.

일본군은 명군과의 협상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고 15934월 한양에서 철수하고 경상도 남부해안으로 내려갔다. 420일 조선군은 서울을 탈환했고, 선조는 개성에 머물렀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있는 왜명강화지처비(倭明講話之處碑).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강화회담이 열렸다고 한다. /박차영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있는 왜명강화지처비(倭明講話之處碑).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강화회담이 열렸다고 한다. /박차영

 

강화회담에서 조선분할론이 제기되었다. 조선분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조선 8도 중 4도를 달라고 했다.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이 반동강 나든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강화를 맺고 물러날 생각을 했다.

명나라의 조선주둔군 총책임자 송경응(宋應昌)은 일본군이 조선 남부를 점령한 상태에서 전쟁을 마치려 했다. 조선 조정은 송응창, 이여송 등이 베이징 당국을 속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사신을 보내 잘못을 알려주려고 했으나, 송응창은 요동에서 조선 사신의 입국을 저지했다.

명의 경략 송응창은 선조가 강화를 반대하자 선조의 힘을 빼는 전략을 수립했다. 송응창은 조선의 권력을 양분해 하삼도, 즉 충청··전라경상도를 세자 광해군에게 맡기는 방안을 선조에 요구했다. 선조실록 26816일자에 송응창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듣건대 왕의 둘째 아들 광해군(光海君)이 영웅의 풍채에 위인의 기상이 드러나 준수하고 온화하며 어린 나이에 재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저의 생각에 광해군으로 하여금 전라·경상·충청도를 차례로 순찰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그의 결재를 받도록 하여 군병(軍兵)을 선발할 때 반드시 친히 검열(檢閱)하게 하십시오. ……

송응창의 하삼도 경리안(下三道經理案)은 선조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시도나 다름 없었다. 권력 변동에 대단히 민감한 선조가 이를 알아채지 못할리 없었다.

선조는 선위 카드를 던졌다. 임금 자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반생(半生)을 약으로 연명(延命)하고 있는데, 이는 약방(藥房)의 제인(諸人)들도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선위(禪位)에 관한 여러 일들을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26830)

그 다음 내용은 뻔하다. 광해군과 대신들이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 명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하고, 그러길 며칠, 선조는 선위의 명령을 거둔다.

그런 정치쇼가 끝난후 1593101일에 선조는 한양으로 환도했다. 선조는 이제 명나라의 조선담당 총책 송응창을 몰아낼 궁리를 한다. [로 계속]

 


<참고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덕일,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2007,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징비록, 김흥식 옮김, 서해문고, 2003

배기찬,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위즈덤하우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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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바이오 2022-12-10 19:23:09
일본이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욱일승천하고 있음이 보이지 않은 명과 청. 조선은 성리학과 붕당정치에 몰두한 시절. 선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고종 때 한일합방, 일제36년통치. 해방 과 좌우대결, 남북분단, 625전쟁과 휴전에 나라의 역할이 없었음. 이후 급속한 경제개발과 민주화 과정에서 정치대결과 분열. 글로벌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코리아. 일본을 극복하고 앞서나가고 있는 한류의 시대. 너무나 바쁜 기업과 개인활동에 정치가 방해를 하지말기를 기원하는 상황.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심사수고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