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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평양에서 도주한 임금에 거센 항의…송유진·이몽학, 왕조전복 시도
임진왜란⑥…“새로운 왕을 모시자”는 반란
2022. 12. 09 by 김현민 기자

 

[에서 계속]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은 조선의 승리였다. 7년의 장기전 끝에 왜군은 패퇴했다. 역사교과서는 이 전쟁을 국난극복의 담론으로 승화시켰다. 중국 명나라의 지원이 전쟁의 흐름을 돌린 것이 분명하지만 무엇보다 민관이 혼연일체로 침략자에 맞섰다는 점을 강조한다. 행주치마의 전설이 만들어졌고, 백성들이 혼연일치로 왜군과 싸웠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이순신 장군 영웅담에 강강수월래 민속이 가미되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에서 모든 백성들이 무기력하고 무능한 왕조에 충성했을까. 왕조국가는 근대적 국민국가와 다르다. 조선이란 나라의 주인은 왕실이었고, 지배자는 양반사대부였다. 양인과 천민은 피지배자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자 임금은 저만 살겠다고 도주하고 사대부들은 갈팡질팡했다. 옛 지배체계가 무너져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지배자가 찾아왔다. 백성들은 과거의 지배자에 마냥 충성하지 않았다. 일부는 도망간 지배자의 궁궐과 가옥을 불태우고 그들의 비겁함을 질타했다. 때론 생존을 위해 새로운 지배자에 부역하기도 했다. 지배권력의 붕괴는 역성혁명의 조건을 형성했다. 송유진, 이몽학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신립 장군의 충주 패전 소식이 조정에 보고된 것은 1592428, 선조는 서둘러 피난을 준비하고 이틀후에 한성을 떠났다. 선조가 파천을 준비하고 있을 때부터 임금이 평복을 하고 이미 도성을 떠났다는 와언이 유포되었다. 와언(訛言)은 요즘으로 치면 가짜뉴스다.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이 궁궐 멀리서 엿보기만 해도 죄인으로 취급되었다. 궁궐에 주인이 떠나자 백성들이 들이닥쳐 남은 물건을 가져가고 못난 왕에 대한 불만을 방화로 복수했다. 신경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당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년 430, 돈의문을 나와 사현에 이르자 동이 텄다. 뒤돌아 성을 바라보니 검은 연기가 하늘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난민들은 먼저 공사 노비의 문서와 장부가 있는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또 내탕고(內帑庫) 안까지 뛰어 들어가서 비단을 약탈하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하나도 빠짐없이 불태워 버렸다. 또 왕자 임해군의 집을 불태우고 병조판서 홍여순의 집까지 불태웠다.”

민중이 장례원과 형조를 먼저 불태운 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노비문서가 보관된 장례원을 방화한 점에서 천민층이 일어난 것으로 볼수 있다.

 

평양에서도 임금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 왜군이 대동강에 접근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서둘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그때 정황을 적어 놓았다.

적군은 대동강 변에 출몰하기 시작했고, 대신·노직 등은 신주를 받들고 궁인들을 호위하여 성을 나섰다. 이 모습을 본 성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칼을 빼어 길을 막고 나서며 폭행했다. 신주는 길에 떨어지기도 했는데, 그들은 재신(宰臣)에게 밀했다. ‘너희들이 평소에 편히 앉아 국록만 축내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마저 속이는 구나.’ 궁궐 문에 이르러 보니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에는 온갖 무기와 몽둥이를 든 난민들로 거리가 가득 찼다. 신하나 궁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채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한양에서는 임금이 떠난 후에 방화가 일어났는데, 평양에선 임금 앞에서 백성들이 시위를 벌인 것이다. 아직은 반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기층민중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1593년 평양성 전투도 /위키피디아
1593년 평양성 전투도 /위키피디아

 

적에 동조하는 반역행위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될 때 일어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성의 고발에 의해 임해군·순화군이 포로가 된 사건이다.

전쟁이 나자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근왕군을 모집하러 파견되었다. 두 왕자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함경도 마천령을 넘는데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군대가 쫓아왔다. 왕자들은 회령으로 도망쳤다. 당시 화령에는 국경인(鞠景仁)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국경인의 무리들은 두 왕자를 사로잡아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반란자들이 왜군의 앞잡이가 된 것이다.

 

전쟁 기간에 극심한 기근이 겹쳤다.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1593년의 상황을 전한다.

““각 도의 인민이 유리(流離)하고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송장이 서로 잇달았고 거지가 길에 가득하였다.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느릅나무의 껍질·뿌리·줄기도 모두 다 없어졌다.”

국가는 굶주린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토적(土賊)이 되었다.

 

조선왕조에 정면으로 맞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변하복(邊遐福)의 반란 사건이 159442일에 발생했다. 변하복의 역모와 관련자는 400여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사건은 전쟁 전 정여립 사건과 연관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전란과의 직접적 연관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 초래한 통치체제 이완을 틈타 일어난 왕조교체의 반란 주모자로 송유진(宋儒眞)과 이몽학(李夢鶴)을 들수 있다.

송유진은 159312월과 15941월 사이에 충청도 아산과 경기도 평택을 반란을 기도했다. 이 지역은 왜군의 점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관의 수탈이 심했고, 부역의 강도가 높았다. 또 왜군을 피해 온 무리들이 많았다. 송유진의 난은 고변자가 생기는 바람에 무산되었지만, 조선 왕조를 타도하자는 기치를 내걸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송유진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왕의 악정이 고쳐지지 않고, 붕당(朋黨)은 해소되지 않으며, 부역은 번거롭고 과중해서 민생이 편치 못하여 목야((牧野)에서 무용(武勇)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는 부끄러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죄를 추궁하노니, 실로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빛남이 있도다.” (우리역사넷)

탕왕과 무왕은 중국 고대사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모델이 되는 군주다. 송유진은 선조를 갈아치고 새 왕을 옹립하려 한 것이다.

송유진은 굶주리는 백성 및 병졸을 모아 천안·직산 등지를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계룡산 일대에까지 세력을 폈으며 무리는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칭하고 한양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1594년 정월보름날 한성에 진군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해 정월 직산에서 충청병사 변양준에 체포되어 왕의 친국을 받고 사형당했다.

 

왜군이 남해안에 주둔하고 있는 시기에 왕조전복 반란이 시도된 것은 당시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송유진의 난은 불발했지만, 2년후에 이몽학의 난은 실제 거병이 이루어졌다.

이몽학은 15967월 초 충청도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초기 반란군의 규모는 약 600~700명에 이르렀다. 홍산을 시작으로 인근의 군현들을 차례로 점령하는 과정에서 반란의 규모는 3~4천 명 정도로 커졌다. 이후 반란군은 홍주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관군의 반격이 강화되면서 부하들이 이몽학의 목을 베고 투항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몽학은 왕실의 서얼 출신이다. 반란자들은 반란을 위해 홍산 무량사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 송유진의 반란보다 더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몽학의 반란동기가 선조수정실록(2971)에 정리되어 있다.

이몽학은 그들에게 속임수로 꾀기를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고 했다. 모두들 좋다고 떠들면서 그를 따랐다.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聖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와 속인을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의 청현직으로 가칭하니 사족 자제와 무뢰배들이 많이 그들에게 붙었다.”

이몽학의 난은 관군의 진압으로 실패했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이 33명이며 외부에서 처형된 사람이 100여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의병세력도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김덕령·최담령·홍계남·곽재우·고언백 등 의병장 이름이 반란자를 문초하는 과정에서 튀어 나왔다. 그중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당하거나 옥사했다. 김덕령은 뒤에 신원되었으나 희생된 사람은 반란 처리가 끝난 뒤에도 늘어났다. [으로 계속]

 


<참고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이덕일,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2007,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김만호, 壬辰倭亂期 民人反王朝 活動, 전남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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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바이오 2022-12-10 13:21:35
붕당정치의 최고조인 선조와 그 끝인 고종의 동일한 특징은 나라나 백성 보다는 자신의 왕권지키기에 전념. 대양시대와 산업화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여 청나라와 같이 멸망의 길. 한일합방과 일제36년, 해방 후 좌우대립과 남북분단, 625전쟁에 주도적 역할을 못함. 419, 516 혁명과 민주정치, 산업화 과정에서 좌파 우파대립과 운동권 팬덤정치로 국민분열. 살고자하는 노력으로 기업과 국민이 글로벌선진국에 들어섰고 일본을 뛰어넘는 단계에 이름. 문정권이 국민분열 팬덤정치의 최고봉에 이르렀고 우파정권교체 후에 분열된 사회를 통합시키는 과정. 국가와 국민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