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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직전에 죽음을 두어차례 암시…부하들 만류에도 직접 출격
임진왜란⑩…이순신, 당당히 죽음을 맞다
2022. 12. 14 by 김현민 기자

 

7년 전쟁을 도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818일 숨을 거두었다. 나이 62세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네 명의 대로(大老)들에 의한 집단지도체제가 수립되었다. 4대로는 도요토미의 사망 사실을 비밀리에 붙이고, 828일과 95일 두차례에 걸쳐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철수를 지시했다.

왜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전쟁에서 공격 전술만큼 후퇴 전술도 중요하다. 물러나더라도 병력을 온전하게 보존해야 한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안전 철수를 보장받기 위해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과 진린(陳璘) 에게 뇌물을 썼다. 선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초에 행장(고니시)이 천위(天威, 중국군)를 두려워하여 유 제독과 진 도독에게 강화하자고 하면서 유 제독에게는 수급 2천을, 진 도독에게는 수급 1천을 보내 줄 터이니 자기를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였다. 진 도독은 그 말을 믿고서 말하기를 나에게도 수급 2천을 보내주면 보내 줄 수 있다고 하자, 행장이 날마다 예물을 보내고 주찬(0酒饌창검(槍劍) 따위의 선물도 끊이지 않았다.” (선조 31124)

명군 장수와 조선 장수의 차이가 여기서 나온다. 명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할 필요가 없었다. 적진에서 주는 뇌물을 받으면서 싸우는척 하면 된다. 전투를 걸다가 다치면 자신만 손해다. 그에 비해 조선 장수의 입장에선 이 땅을 유린하고 돌아가는 왜군을 온전하게 보낼수는 없었다.

고니시에겐 제해권을 쥐고 있는 이순신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이순신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했다. 그 대목이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숙부 곁을 지키며 기록한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기록되어 있다.

도독 진린이 부하 진문동(陳文同)을 적진에 보냈다. 얼마후 적장 오도주(五島主)라는 자가 배 3척과 말, 참검 등 물자를 가져와 도독에 바치고 돌아갔다. 이때부터 왜의 사절이 도독 막부를 끊임 없이 왕래했다. 도독은 공(이순신)에게 강화를 허락할 것을 명하고자 했다. 공이 말하기를 대장은 강화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인 적을 놓아 보내서는 안됩니다.“

도독이 무안해 했다. 왜 사절이 다시 오자 진린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 통제사(이순신)에게 말했다가 거절 당했다.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했다.

고니시는 공에게 사람을 보내 총검 등을 가져와 간절히 강화를 요청했다. 공이 임진년 이래 많은 적을 포로로 삼았고, 포획한 총검도 산처럼 많다. 원수인 적의 사절이 왜 이 곳에 왔느냐?“고 말했다. 적은 할 말이 없어 물러갔다.” (15981116)

 

임진왜란시 조선수군 전투도 /위키피디아
임진왜란시 조선수군 전투도 /위키피디아

 

이순신은 퇴각하는 적진에 뛰어들어 그들을 섬멸하다 1119일 새벽에 전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두어차례 했다.

그 첫 번째가 진린과의 대화에서다. 이순신의 조카 분()이충무공행록(행록)’에 이런 얘기를 썼다. 사망하기 3일전인 1116일이다.

진린이 적의 뇌물을 많이 받고 그들이 갈 길을 열어주고 싶어 했다. 진린이 공(이순신)에게 나는 고니시를 내버려두고 먼저 남해도의 적을 치려고 하오라고 했다. 그러자 공이 남해도에는 (조선인) 포로들만 있을뿐, 왜적은 없습니다고 했다. 진린이 화를 내며 황제가 내게 장검을 하사하셨소라고 말했다. (조선 장수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음을 시시한 말이다.) 이에 공이 말하길 한번 죽는 것은 애석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장으로 결코 적을 내버려 두고 우리나라 사람을 죽일수 없습니다.”라고 응수했다.

두 번째로 죽기를 각오한다고 한 날은 1118, 고니시 유키나가가 진을 친 노량을 습격하러 가던 날 밤이다. 중국 장수 진린과의 말다툼에서다. ‘행록은 이렇게 전한다.

유시(酉時, 오후 5~7)에 적선이 남해도에서 무수히 나와 엄목포(嚴木布)에 정박했다. (이순신)은 도독(진린)과 약속하여 그닐밤 2경에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4경에 노량에 도착해 적선 500여척을 만났다. 싸움이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그날밤 공이 선상에서 손을 씻고 하늘에 축원하며 말하기를 이 원수를 제거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고 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바다 한가운데 큰 별이 홀연히 떨어졌다. 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순신은 최후를 앞두고 죽음을 각오하는듯한 말을 여러차례 했다. 조경남은 난중잡기에서 이순신이 죽음을 자초한 것처럼 썼다.

날이 이미 밝았다. 이순신은 친히 북 채를 잡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들을 추격해 죽였다. 적선의 선미에 엎드려 있던 적들이 순신을 향해 일제히 조총을 발사했다. 이순신은 적탄을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런 증언들이 이순신의 죽음 자초설 또는 자살 유도설을 확산시켰다. 최근 발견된 유성룡의 경자년(1600)의 대통력(大統曆)에 주목할만한 표현이 있다. 요즘으로 치면 다이어리에 해당하는 달력에 유성룡은 이순신이 부하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출전해 전쟁을 독려하다가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는 메모를 남겨 놓았다.

 

유성룡의 비망록이 기입된 대통력(大統曆) 경자(庚子). 이순신의 죽음에 관해 적혀 있다. /문화재청
유성룡의 비망록이 기입된 대통력(大統曆) 경자(庚子). 이순신의 죽음에 관해 적혀 있다. /문화재청

 

이순신이 직접 기록한 난중일기는 죽기 이틀전인 1117일자로 끝이 난다. 다만 조카 이분은 이순신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이다. 조카는 영웅의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19일 여명, 공이 싸움을 독려하고 있을 때, 갑자기 탄환에 맞았다. 공은 싸움이 지금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돌아가셨다. 공의 맏아들 회외 조카 완이 활을 들고 곁에 있었는데, 소리를 죽여 서로 말하길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매우 망극하다. ‘만약 공의 죽음을 알린다면 군대가 동요하고 적이 그것을 이용할 것이므로, 시신조차 온전히 돌아갈수 없을수 있다. 참으면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낳다.’

그리하여 시신을 안고 방에 들어갔다. 오직 공의 노비 김이(金伊), , 완 세사람만 이 사실을 알았다. 측근 송희립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도독(진린)의 배가 적에 포위되어 거의 함락 직전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구하러 갔다. 싸움이 끝나자 도독이 급히 배를 옮겨 가까이 와서 통제사는 빨리 나오시오라고 말했다. 완이 뱃머리에 서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숙부께서 돌아가셨습니다고 알렸다.

진린이 세 번이나 넘어지면서 크게 통곡했다. ”이미 죽은 뒤에도 나를 구할수 있었구나.“ 진린은 가슴을 치며 오랫동안 울었다. 도독의 군사들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이렇게 썼다.

화살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이순신은 직접 나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알에 맞고 말았다. 총알은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로 빠져 나갔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겨 놓자 그는 지금 싸움이 급한 상황이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조카 이완은 이순신의 뜻대로 죽음을 알리지 않은태 이순신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면서 싸움을 지휘했다. 그 때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를 본 이완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그를 구해 냈다. 왜적이 달아난 후 진린은 사람을 보내 이순신에게 사례했다. 그때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진린은 의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주저 앉으며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발입니까라며 통곡했다.“

 

선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이순신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선조 311127)

사신(史臣)은 논한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 애석하다.”

 

다만 선조는 이순신이 죽음으로 맞섰던 노량해전을 평가절하했다. (선조실록 3222)

이덕형이 아뢰기를, "18일에 이순신이 진린에게 적의 구원병이 수일 내에 당도할 것이니 나는 먼저 가서 요격하겠다.’ 하니, 진인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듣지 않고 요격하기로 결정하고서 나팔을 불며 배를 몰아가자 진인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중국 배는 선체가 작은데다 뒤쪽에 있으므로 그저 성세(聲勢)만 보였을 뿐이고 등자룡(鄧子龍)과 진린 두 사람이 판옥선(板屋船)을 타고 가서 싸웠다고 합니다."

주상이 수병이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된 말인 듯하다"고 했다.

이에 이덕형이 아뢰었다. ”수병의 대첩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소신이 종사 정혹을 보내 알아보니 부서진 배의 판자가 바다를 뒤덮어 흐르고 포구에는 무수한 왜적의 시체가 쌓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굉장한 승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이 사망한 시각에 적장 고니시는 전장을 빠져나갔고,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7년의 지리한 전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공교롭게도, 이순신이 사망한 1119일 유성룡도 실각했다. 반대 당파들이 유성룡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렸고, 선조도 전쟁이 끝난 마당에 유성룡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한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2008, 중앙북스, 옮긴이 하경진

징비록, 김흥식 옮김, 서해문고, 2003

이덕일,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2007,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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