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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군, 볼셰비키에 저항…연합군, 극동러시아에 9만명 파병
시베리아에 갇힌 체코 군단 구하기
2022. 12. 24 by 김현민 기자

 

1918~1922년 사이,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등 연합군 병력 9만여명이 극동러시아 연해주에 투입된 적이 있다. 191710월 러시아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후 시베리아에 갇혀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5만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까지 합쳐 14만명의 반볼셰비키 진영 병력이 시베리아를 점유했으면, 러시아와 시베리아는 갈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그런 가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1차대전 이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에 살던 체코인과 슬로바키이인들은 차르 니콜리아 2세에게 오스트리아와 싸우기 위해 별도의 군대를 조직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차르의 용인 하에 러시아에 살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원했다. 본국에서 오스트리아군으로 끌려가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포로로 잡힌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도 러시아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보충되어 1917년에 이르러 군단의 병력은 6만명을 육박했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19183월 볼셰비키 정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전선에서 군대를 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에 협조했던 체코 군단은 휴전할수 없었다. 그들은 유럽 서부전선으로 가려고 했는데, 적성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중간에 버티고 있어 길이 막혀 버렸다.

 

러시아 내전 시기인 1918년 시베리아 철도를 장악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위키피디아
러시아 내전 시기인 1918년 시베리아 철도를 장악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위키피디아

 

체코 군단은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극동으로 가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바다를 통해 유럽 전선에 참여하겠다고 볼세비키 정권에 요청했다. 이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체코인들이 첼랴빈스크에서 서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정전 협정에 의해 동쪽 방향으로 귀국하던 헝가리 포로들과 마주치며 소동이 벌어졌다. 이국 땅에서 민족간 앙금이 폭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폭동에 볼셰비키는 체코인들의 주장을 무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첼랴빈스크를 점령했다. 이에 볼셰비키들이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체코 군단은 저항을 시작했다.

 

폭력사태가 빚어지자, 볼셰비키군을 지휘하던 레온 트로츠키는 체코 군단에 조국으로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보장할 터이니,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체코 군단은 이에 응하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첼랴빈스크는 시베리아철도의 기점이다. 체코 군단이 이 거점도시를 점령하자 러시아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시베리아가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체코 군단은 시베리아철도의 주요 도시들을 점거했다. 첼랴빈스크, 페트로파프로프스크, 쿠르간, 마린스크, 칸스크 등 볼가강 일대를 선으로 장악했다.

 

체코 군단의 반란은 러시아 내전을 극적으로 전환시켰다. 체코군단의 봉기로 볼셰비키가 광활한 시베리아 지역의 통제권을 잃어 백군이 장악할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체코 군단은 19186월 사마라에서 적군을 패퇴시키고, 그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자 68일 러시아 혁명이후 처음으로 사마라에서 반혁명 정부가 수립되었다. 닷새후인 613일 옴스크에서 백군의 시베리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달 사이에 백군들은 바이칼에서 우랄산맥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볼셰비키의 시베리아 권력은 완전히 해체됐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그 자체가 이동하는 정부였다. 열차는 중무장한 포대와 기관총으로 무장했고, 화물칸에는 막사와 빵 공장, 병원도 꾸몄다. 그들은 열차 내에서 신문도 찍어 내 정보를 교환했다. 그들은 애국 열기로 가득찼고, 애국 영웅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독립가를 부르며 열차로 이동했다. 해외에 머물던 마사라크는 체코 군단이 지나가는 역으로 전보를 보냈고, 그들은 마사리카의 명령을 수행했다.

흥미로운 건, 체코 군단은 볼가강 중심도시 카잔에서 차르가 보관하던 금괴를 확보해 알렉산드르 콜차크(Alexander Kolchak)의 백군에게 넘겨줬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체코 군단이 금괴 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금괴를 볼셰비키에게 념겨 주는 댓가로 볼셰비키가 블라디보스톡행 기차의 안전을 보장했다고 주장한다. 또 군단이 금 일부를 가지고 귀국했다는 주장도 있다.)

 

체코 군단이 볼가강 일대 시베리아 철도를 점거하며 니콜라이 2세 가족들이 억류되어 있는 예카테린부르크로 이동하자 볼셰비키들은 당황했다. 만일 체코 군단이 차르 일가를 구출해 백군에 넘겨준다면 중립을 지키던 농민등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백군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러면 혁명군은 반란군이 되고, 해외 제국주의의 개입을 초래할수도 있다. 볼셰비키는 서둘러 황제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717일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처형했다.

체코 군단은 어쩌다가 백군의 동맹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무기를 소지하고 체포된 체코 군단 병사들을 즉결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볼셰비키 군대를 투입해 체코군단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 길목에 이미 정부를 세우고 서진하고 있던 콜차크의 백군이 버티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위키피디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위키피디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는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게다가 차르의 처형은 연합군의 개입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길 꺼려하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체코 군단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미군을 파견하기로 했고, 영국, 프랑스도 이들을 대독일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시베리아에 욕심을 내던 일본군은 한술 더 떠 7만명의 병력을 보냈다..

19188월 연합군은 9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극동 블라디보스톡을 점령하고 체코 군단이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오기를 기다렸다. 여기에는 일본군이 가장 많았고,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병력을 보냈다.

 

체코군단 선봉대의 일부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배를 얻어 타고 귀국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볼셰비키와의 전투를 위해 나중에 오기로 한 부대원들을 기다렸다.

체코 군단이 볼셰비키를 무찌른 소식은 서방국가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주었다. 체코군단이 승전보를 보내 오면서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는 191810월 연합국의 지지를 얻어 독립을 선언하고, 마사라크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Revolt of the Czechoslovak Legion

Wikipedia, Siberian interv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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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수 2023-01-31 16:33:35
러시아 영화 제독의 여인이 생각나게 하는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