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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학과 역사학을 연관시키는 연구 활발…“중국 역대 동란은 기후변화 때문”
기후가 역사를 뒤집었다…17세기는 ‘소빙기 위기’
2019. 07. 04 by 김현민 기자

 

강수량이 적으면 가뭄이 든다. 농민들은 평년작의 수확을 거두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해야 한다. 흉년이 들게 되면 죽음을 면키 어렵다.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몇 년째 계속되면 기아와 추위에 내몰린 백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물건을 약탈하고, 심지어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도 한다.

대만의 기상학자 유소민(劉昭民)은 저서 기후의 반역 - 기후를 통해 본 중국의 흥망사’(번역 2005)에서 중국 역사상 비교적 큰 역사적 동란은 건조와 추위와 같은 기후의 이변으로 말미암았다고 밝혀냈다. 예를 들어 () 왕조의 쇠망 왕망의 한() 왕조 찬탈과 그 멸망, 후한 말기의 황건적의 난, 삼국의 분열 ()5호의 중국 침략, 송대 금의 남침, 원대 송과 금의 멸망, 명말 류구(流寇)의 창궐, 만주인의 입관, 청조 삼번(三藩)의 난 청대 태평천국의 난등이 기후 변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건조하고 추운 기후와 그로 인해 발생한 기아와 황폐가 정치 변동을 일으켰다는 게 유소민 박사의 연구 결과다. 그는 또 중국 역사상 각 왕조의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및 물질문명의 진보와 발달도 역시 기후의 한랭건조 또는 온난다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소민은 청조 강희제의 명으로 편찬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란 백과사전 가운데 서징전(庶徵典)의 자료를 면밀히 분석해 이상기후에 대해 빠짐 없이 정리했다. 또한 중국 역대왕조의 사료를 통해 기상과 기후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이 자료를 통해 기상학과 역사학을 접목해 연구결과를 도출했다.

 

대만학자 유소민(劉昭民)이 추론한 역대 중국의 기온변화 /저서 ‘기후의 반역’에서
대만학자 유소민(劉昭民)이 추론한 역대 중국의 기온변화 /저서 ‘기후의 반역’에서

 

20세기 들어 중국의 역사변동과 기상학을 연결하는 연구가 급부상했다.

스웨덴의 고고학자 헤딘((Sven Hedin) 박사는 1900년경 중국 신장(新彊)에서 전한(前漢) 선제(宣帝)와 원제(元帝) 때 누란(樓蘭) 왕국의 유적지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당시 기후가 오늘날보다 따듯하고 습기가 많았음을 증명해 냈다.

1907년에는 미국 기상학자 헌팅턴(E. Huntington)아시아의 맥박’(The Pulse of Asia)을 발표하면서 중국 역사의 내우외환이 모두 기후 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입증했다. 동진 시대 오호(五胡)의 중국 침략, 북송 시기 거란·여진의 침입, 명말 왜구의 창궐, 만주족의 산해관 입관 등이 만주·몽고 지역과 중원, 중앙아시아의 기후가 가뭄으로 변한데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헌팅턴은 밝혀냈다. 가뭄으로 궁지에 몰린 민중이 결국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하고 심지어 무능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후 중국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상 및 기후 변화를 역사와 접맥하는 시도가 많아졌다.

 

1677년 얼어붙은 영국 템스강(그림) /위키피디아
1677년 얼어붙은 영국 템스강(그림) /위키피디아

 

주목할 사실은 서양의 기후변화와 동양(중국)의 기후변화 현상이 시대별로 거의 부합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12, 13, 14세기가 추웠다는 오스트리아 과학자 브뤼크너의 주장과 같은 시대인 중국의 남송, , 명조 초기에 몸시 추웠다는 중국 학자 축우방(竺藕舫)의 연구결과가 일치한다. BC 1000년경에 유럽 기후가 습기로 인해 눅눅해 삼림이 부패하고 토탄(土炭)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유럽의 학자와 중국 주() 목왕(穆王) 시대(BC 1000)에 강우량이 풍부했다는 중국의 연구결과가 부합한다.

 

근대에 들어 유럽이나 중국에서 기상 자료가 풍부해졌다. 동서양의 공통적인 견해는 17세기에 나타난 소빙기(小氷期) 위기론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Voltaire)17세기가 전세계적으로 위기가 닥친 시대로 파악했지만, 그 원인은 규명하지 못했다. 20세기 들어 기상학자들의 연구가 접목이 되면서 17세기에 동서양에 동시에 닥친 기후변화, 인구변화, 농민반란등이 비교 연구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 17세기는 지구가 소빙기에 속했고, 소빙기의 기온강하 현상이 필연적으로 농산물의 감소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 만연 등이 반란과 전쟁, 혁명등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국내 학자들도 기상학과 역사를 연결해 보려는 시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태진(李泰鎭)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17세기 위기의 주된 원인으로 소빙기 현상을 주목했다. 이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기온강하현상, 태양흑점 관찰, 기근, 전염병, 인구 감소, 재해(수재, 한재, 충재 등)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 분석하면서 천재지변과 관련한 분포도를 적성해 1500년부터 1750년까지 천제지변이 집중적으로 있었음을 밝혀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천재 지변의 원인으로 다량의 유성 출현, 운석의 낙하를 지목했다.

 

대만의 유소민 교수는 명말 후반기에 기후가 가장 한랭했고, 가뭄재해가 극심했다며 17세기 위기론에 가세했다. 이 시기에 해마다 극심한 한파와 가뭄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기근이 계속되고 명 희종(熹宗) 2(1622)에는 백련교 봉기가 발행했고, 사종(思宗) 연간에는 이자성(李自成) 장헌충(張獻忠)의 봉기가 발생했다. 마침내 변방에 있던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어와 명왕조가 존복되었다고 유소민은 기후와 왕조변천을 연관지었다.

() 초기의 삼번의 난도 한랭건조한 기후로 인해 백성들이 매년 기근에 시달리자 오삼계(吳三桂) 경정충((耿精忠) 상가희(尙可喜)의 삼번이 이 기회를 틈타 반청운동을 벌인 것으로 유소민은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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