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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여진족, 삽시간에 조선 제압…명나라만 가졌던 비대칭전력 확보
오랑캐주의자 홍타이지, 홍이포를 얻다
2019. 07. 06 by 김현민 기자

 

1626년 누르하치가 영원성(寧遠城) 전투에서 홍이포 파편에 맞아 숨지고, 그해 821일 그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가 후금 2대 왕에 올랐다.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1637130일 삼전도 들판에서 조선 왕 인조를 무릎 꿇린 인물이다. 그는 한반도 정복자라는, 우리 역사에서 잊을수 없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홍타이지는 여진족의 오랑캐 정신에 선진문물을 받아들이 국력을 부강시칸 군주였다. 조선보다 가난하고 약했던 만주족이었지만, ‘오랑캐 전략을 자신들의 강점으로 잘 살린 것이다. 오랑캐 전략의 핵심은 허리를 굽혀 살지 않겠다는 굳센 자존심과 투지, 두려움 없는 용기와 지칠줄 모르는 정력, 수렵민족 특유의 발 빠른 지략, 호화사치를 배격하는 내핍의 검약 기풍, 명분보다 실질 중시, 개인보다 조직 우선 등으로 요약된다. 집단 사냥으로 먹고 사는 늑대 무리의 습성과 유사하다. 춥고 배고픈데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최악의 환경을 이겨내는 극한의 생존전략이다. 적은 인구에 생산력도 보잘 것 없었지만 오랑캐 전략으로 날을 세운 만주의 집요한 공세에 조선은 물론 중국도 무너지고 말았다.

여진족은 1234년 금()나라가 몽골()에 망한 이후 나라가 없는 상태였다. ()과 명()의 통치 술책에 휘말려 소규모 부락단위로 갈래갈래 찢어져 살면서 수백년 간 조선과 명의 변경을 약탈하거나 원조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던 여진족이 17세기가 열리자마자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17세기초 여진의 인구는 40~50만명에 불과했다. 중국 명나라는 15,000만명에 달했고, 조선의 인구도 1,400만에 이르렀다. 척박한 땅에서 소수 민족이 만주를 통일하고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원을 석권해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기적이나 다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홍타이지는 즉위 이듬해인 16271월 사촌형인 아만(阿敏)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그에겐 조선에서 물자를 확보하는 것으 최우선 과제였다. 아민은 사르후 전투(1619)에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과 반란자 이괄(李适)의 잔당을 앞세워 순식 간에 의주, 평양, 황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을 점거했다.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강화도로 달아났다.

인조가 아민에게 화평을 청하고, 형제국의 맹약을 맺은 후에 후금군은 철수했다. 이때 강홍립의 역할이 컸다. 강홍립은 후금군과 조선정부 사이를 오가며 조정을 했고, 더 이상의 전쟁 악화를 막았다. 하지만 인조정권의 서인파들은 강홍립을 역신이라며 배척했고, 그는 모든 관직을 박탕당한 채 투옥되었다.

 

그러면 정묘호란에서 인구 비교로 30분의1에 불과한 여진의 후금이 조선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이유는 무엇일까.

언론인 장한식은 저서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2015, 산수야)에서 인구수나 생산력, 문화전통에서 한참 뒤졌던 가난한 만주족이 한 세대 만에 한민족을 무릎 꿇리고 주인 노릇을 하고, 나아가 드넓은 중원의 패권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1)

첫째, 16세기 은()이 일으킨 세계사적 변화의 물결을 만주족은 잘 활용한 반면에 조선은 상공업을 억압하고 세계사적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만주족의 경제사회체제가 은이 준 기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수 있었다면, 조선사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질서에 갇혀 은의 힘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집단사유(集團思惟)의 차이다. 저자는 이 대목을 강조했다.

조선의 지배층이 즐거이 명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면 만주의 지도부는 반대로 명을 정벌하고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조선은 중국을 하늘()’로 보고 섬기려 한 반면 만주족은 정복할 ()’으로, 지배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충효의 유교이념이 구현되는 예의지국을 건설함으로써 작은 중화’(小中華)가 되기를 희망했던 조선은 오랑캐이면서도 오랑캐 근성을 버린 이른바 순이(順夷), ‘착한 오랑캐였다. 스스로를 좁은 울타리에 가뒀던 탓에 조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잠재능력 이하로 작아지고 약해져갔다.

하지만 만주족은 100배가 넘는 인구에다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하던 명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격차에 기가 죽지도 않았다. 역이(逆夷), ‘나쁜 오랑캐를 자처했던 만주족은 스스로를 작지만 강한 족속으로 단련시켰던 까닭에 어느 순간 조선이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존재로 성장했던 것이다. 두려워할 만한 상대를 겁내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 바로 나쁜 오랑캐 정신이다.

 

남양주 실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홍이포 복원품. /위키피디아
남양주 실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홍이포 복원품. /위키피디아

 

정묘호란에서 조선을 누른 홍타이지는 이제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명나라는 홍이포(紅夷砲)를 확보하고 있었고, 홍이포의 파편에 아버지 누루하치가 숨졌다. 홍타이지는 이 괴력의 화포를 얻지 못하면 명나라와의 대결은 이길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홍이포는 과연 어떤 무기인가.

홍이포는 16세기 동아시아로 식민거점을 만들기 위해 진출하던 네덜란드의 포였다.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인을 몸의 털 색깔이 붉다고 해서 홍모(紅毛) 또는 홍이(紅夷)라고 했다. 즉 서양 오랭캐의 화포다. 서양에선 이를 캘버린포라고 했다.

명 말기에 베이징에 체류하던 독일 출신 신부 아담 샬(Adam Shal)이 명의 예부상서 서광계(徐光啓)에게 제작기법을 전해줬고, 명 조정이 홍이포를 수입해 자체 제작이 가능하도록 기술을 완성했다.

홍이포의 크기와 무게를 살펴보면, 구경이 약 77.8, 포신 길이가 186.6, 포신 무게는 약 298이었다. 사정거리는 최대 9가까운 것도 있었다고 하는데, 유효 사정거리는 2.8km 이내였다고 한다. 홍이포는 당시까지의 어떤 대포보다도 물리적인 파괴력이 우수했고, 적의 사기를 꺾는 데도 아주 위력적이었다.

 

임진왜란 때만 해도 명나라 군대는 홍이포를 구비하지 못했다. 조선의 요청으로 출병한 명군은 불랑기포(佛朗機炮)를 가져와 평양성 공격에 사용했다. 당시 현장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조선 대신 유성룡(柳成龍)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불랑기포의 위력은 과연 천하무적이었다라고 소감을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에 기록했다. 불랑기포는 프랑스를 뜻하는 프랑크(Frank)에서 나온 말로 이 또한 서양에서 전래한 포였다. 하지만 서양은 불랑기포를 뛰어넘는 홍이포를 개발해 동아시아 해안에 출몰했고, 명나라는 오랑캐와의 전쟁을 위해 이 최신식 포를 확보해 두었다.

홍이포가 동양의 전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26년 정월, 만리장성 근처 영원(寧遠)성 전투에서였다.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의 군사력이 집중된 산해관(山海關)을 피해 주변 성인 영원성을 만만히 보았다.

당시 명의 장수는 원숭환(袁崇煥). 누르하치는 영원성에 주둔한 명군의 다섯배인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요하를 건넜다. 공성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후금군은 인해전술로 성벽에 바짝 붙어 구멍을 내고 공격했다. 이때 원숭환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11문의 홍이포였다. 명군은 포문을 열었다. 후금은 당시 홍이포의 위력을 몰랐다.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대포소리가 나면서 후금군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후퇴를 모르고 돌진하던 후금의 팔기군은 두려움에 떨면서 진격을 하지 못했다.

후금은 그후 두어차례 성벽 접근을 시도했지만, 능수능란하게 홍이포를 쏘아대는 명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공격이 늦춰지면 보급선이 끊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퇴각을 명령한다. 이때 누르하치는 명군이 쏜 홍이포의 파편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누르하치의 첫 패배였다. 심양(瀋陽)으로 퇴각한 누르하치는 나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싸웠는데 이때까지 공격해 점령하지 못한 성과 요새는 없었고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영원성만은 점령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그해 8월 누르하치는 항간의 소문처럼 홍이포의 파편으로 인한 부상이 도졌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홍타이지(청 태종)가 그 뒤를 이었다.

만일 청이 홍이포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만주에 한정된 변방 오랑캐정권에 머물렀을 것이다.

 

1626년 영원성 전투 /위키피디아
1626년 영원성 전투 /위키피디아

 

홍타이지가 후금의 새 칸이 되어 이듬해 1627년 조선을 침공했을 때(정묘호란)만해도 후금군이 홍이포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후금이 형제국 협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퇴각한 것은 홍이포를 갖춘 명군이 배후를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만이 보유하고 있는 비대칭무기인 홍이포 입수에 전력을 투구했다. 곧 기회가 왔다. 162910월 후금은 명의 영토인 하북성 영평(永平)을 공격할 때 홍이포를 만드는 장인들을 찾아내 포로로 압송한 것이다.

명나라의 입장에선 홍이포 제작기술이 핵무기와 같이 이전을 하면 안되는 기술이었다. 그것을 후금군이 훔쳐냈고, 명나라는 그 기술을 잃은 것이다. 남은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그 기술을 확보해 대량의 홍이포를 만들 때까지 명나라는 후금을 제압해야 했다. 후금은 서둘러 홍이포 기술 개발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홍이포라는 비대칭무기를 대칭 무기로 전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포로로 잡아온 한족 장인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고, 무기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했다. 기술을 완성한 후 한족 장교와 장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그 결과 만주에서 홍이포를 주조하게 된 것은 16316월이었다. 기술을 훔친지 2년만이었다. 오랭캐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던 홍타이지는 홍이포의 이()라는 글자가 오랑캐를 뜻한다고 해서 홍의포(紅衣砲)라고 이름을 바꾸고, 대량제작에 나섰다. 후금군은 16318, 대릉하(大凌河) 공격시 명군보다 많은 홍이포를 가졌다. 난공불락이라던 대릉하는 홍이포의 덕분에 함락되었다.

 

홍타이지(청 태종) /위키피디아(중국판)
홍타이지(청 태종) /위키피디아(중국판)

 


1) 장한식,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2015, 산수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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