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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국제시장에 부정적 뉴스 봇물…일본은행들, 저혼자 살기 위해 만기연장 거절
[IMF의 기억①] 일본 돈이 먼저 빠져 나갔다
2019. 07. 06 by 김현민 기자

 

1997년말, 우리 경제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그해 초에 한보와 삼미 부도사태가 터지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시중은행의 부실 여신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해외 은행들은 한국경제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중 한국에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준 일본은행들은 한국에서 돈을 떼일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중에 그렇게 실토했다.)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사가 아시아의 단기외채를 지적했지만, 해외은행들은 한국에선 그럴 일이 없다고 시큰둥한 반응 보였다.

그러던 분위기는 그해 하반기들어 돌변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간 자금은 일본 엔화차관이었다.

일본 은행들은 부실 여신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고, “한국에서 돈을 떼이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일본 은행들은 결코 이웃사촌이 아니었다. 일본 은행들은 다른 나라보다 옆집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계 은행보다 한국을 더 죄어들어 왔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사의 국가신인도 담당 존 체임버스(John Chambers)씨는 19979월에서 11월까지 3개월 동안 한국을 빠져나간 일본 자금이 9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1)

 

22년이 지난 지금, 왜 일본 자금이 미국이나 유럽계 자본보다 먼저 빠져 나갔는지에 대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반일 발언과 연결시키려는 시각이 있다. 2)

일본 대사를 지낸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 때 IMF 행이라는 굴욕을 겪게 한 결정타가 일본의 단기외채 회수였다면서 한국을 가장 잘 지켜 주는 게 일본이라고 생각해 왔던 뉴욕·런던·홍콩의 금융시장은 큰일이 난 걸로 보고 앞을 다퉈 한국에서 돈을 뺐다고 말했다.

앞서 19951114일 김영삼 대통령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삼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다. 일본은 경악했고, 당시 대통령 외교비서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유 전 장관은 이 발언이 IMF행을 불렀다고 기억했다.

유명환 전 장관의 판단이 옳은지는 입증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국제 은행들이 왜 갑자가 한국을 빠져나갔던 것일까. 한국 정부가 원화를 방어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해외부채 지불부담이 커져 지불불능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시장은 탐욕(greed)과 두려움(fear)이 지배한다. 은행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황금알을 낳는 아시아로 몰려들었다가 돈을 떼일 걱정이 생기자 황급히 빠져나갔다. 어쩌면 한국은 글로벌 은행들의 음모적 히스테리의 희생양이었다. 국제금융시장, 특히 뉴욕 월가에는 한국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 시각이 한꺼번에 몰려 왔다.

11월초 일본 엔화가 120엔을 넘어서자 아시아 통화 가운데 한국 원화가 관심의 초점이 됐다. 골드만삭스나 메릴린치는 한국 외환보유액이 조만간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당시 뉴욕 월가에 한국에 관해 어떤 부정적 시각이 돌아 다녔는지를 되살려보자.

 

월스트리트 저널

한국 경제는 단기성 대외채무 누적, 은행의 악성 대출확대등으로 동남아와 같은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금융위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데이비드 헤일씨(취리히 투자사의 자문역)

한국의 은행 위기는 정부의 산업정책과 대출을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기간산업의 과잉생산과 은행의 악성대출 확대를 초래했다. 한국 경제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다가올 대선에서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한국은 1년 내에 군사 쿠데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블룸버그 통신

한국의 금융위기는 태국보다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으며, 금융기관 부실 여신이 급증해 도산 사태가 우려된다.”

비즈니스 위크

한국의 단기채무가 700억 달러에 달해 IMF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에는 이런 과장되고 부정적인 시각들이 순식간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말을 함부로 해댔다. 심지어 야당 유력후보자였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여럿이 나서서 한사람을 병신 만들기는 참으로 쉽다.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 유력 언론이라는 것들이 일제히 나서서 일개 국가를 조져 대는데, 한국에서 돈을 빼지 않는 외국인 투자회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부도가 날 것이 분명한데 누가 한국에 돈을 묻어두려고 하겠는가.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하는 수 없어도 당장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채무의 경우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자료: IMF
자료: IMF

 

그러면 과연 한국 경제가 정말로 위태했던가.

한국의 GDP 대비 순외채 비율은 호주보다 나았다. 1인당 외채부담율은 세계 최대 채무국인 미국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영국의 신용평가기관인 피치 IBCA에 따르면 1996년말 기준으로 한국의 대외부채는 1,230억 달러로 연간 외환 거래량의 77%에 이른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800억 달러로 연간 외환 거래량에 대한 비율이 221%로 한국보다 훨씬 높다. 캐나다는 4,210억 달러로 177%에 이른다.

1996년 기준으로 한국이 원금과 이자를 합쳐 1년간 외국 은행에 지불해야 할 돈은 전체 외환 거래액의 6%, 캐나다 16.7%, 오스트레일리아 12%에 비해 낮다. 이들 통계는 한국의 대외 채무 비율이 선진국들에 비해 높지 않음을 입증한다.

다른 통계를 보더라도 한국의 대외채무비율은 건전한 편이다. 1997년초 수출대비 대외채무 비율은 72%로 한국과 같은 신용등급에 있었던 브라질의 293%에 비하면 대단히 건실했다. 이런 점은 무디스의 국가신인도 담당임원인 빈센트 트루그리아, 피치 IBCA의 아시아 담당 폴 로킨스씨도 당시에 확인한 사실이다. 3)

한국은 인플레이션을 잘 관리해왔고, 정부 예산도 균형을 이루어온 나라였다. 엔화 하락으로 경상수지 적자가 커지고 있었지만, 외채를 갚지 못할 나라는 아니었다. 강경식 부총리가 입버릇처럼 말했듯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은 건강했고, 여름 이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이견을 다는 외국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문제는 대외채무 비율이 아니라 단기 외채였다. 그것도 정부가 진 단기외채가 아니라 대기업과 은행이 안고 있는 외채였다. 한국의 은행과 대기업들은 국내보다 금리가 싼 해외에서 단기자금을 마구 들여와 돈 놀이를 했다. 종금사들은 저리의 엔화 자금을 들여와 이자율이 높은 러시아와 동남아, 라틴아메리카의 채권에 투자했다. 누가 무어라고 할 것인가. 낮은 금리의 돈을 빌려 높은 이윤을 내는 것이 돈의 생리요, 은행과 기업은 성인군자가 아닌 한 속성상 낮은 금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선진국 은행들, 특히 일본과 유럽은행들은 한국에 마음놓고 돈을 빌려줬다.

한국 정부가 금융기관과 기업이 해외에서 장기 상업 차관을 들여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도 실책이다. 은행과 기업들이 단기 외채를 끌어 들어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1992~94년 반도체 특수가 가져온 일시적인 호황 때였고, 재벌기업들은 자동차, 반도체, 유화, 조선, 철강은 주력산업분야에 과잉투자를 벌였다. 정부가 규제완화라는 흑백논리에 밀려 이들 산업의 진입규제를 완전히 풀어버린 것도 잘못이었다. 대기업들은 국내에서의 과잉경쟁도 모자라 해외로 진출했고, 모두 국내 모기업과 계열사를 상호 담보로 해서 외국에서 돈을 빌려댔다.

어쨋든 한국의 정부와 재벌, 금융기관의 실책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실책을 한번도 경고하지 않고 돈을 대주다가 하루아침에 몰려나가는 국제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특히 이웃이라던 일본계 자금이 가장 먼저 도망쳤다.

자금 시장에서 채권자가 늘 왕이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순식간에 채무자를 지급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채권자의 잘못이다. 선진국 채권은행들은 뒤늦게 한국의 잘못을 집중 공격하며 좁은 탈출구를 향해 벌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한국 경제는 파산 직전으로 몰렸다.

 


1) Barrons, 1998126Costly Lessons

2) 중앙일보, [이하경 칼럼] 문재인 정부발 한·일 관계 파탄의 공포, 2019. 4. 22

주3) Barrons, 1998126Costly Les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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