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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정략결혼 통해 몽골과 동맹 체결…통합력으로 힘의 열세 극복
후금, 적을 포용하며 세력 확대하다
2019. 07. 07 by 김현민 기자

 

후금 또는 청()이 여진족(만주족)의 힘만으로 인구 100배나 되는 중국을 제압할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후금은 끊임없이 몽골족과의 유대관계를 맺었다. 현대식 개념으로 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이웃의 적을 상대하려면 동맹을 잘 선택해야 한다. 그러 점에서 누르하치나 그의 후계자인 홍타이지는 만주족과 몽골족을 통합하려고 애썼고, 그 덕분에 동양 천하를 제패할수 있었다.

 

몽골은 한때 중국 대륙은 물론 동유럽, 아랍, 중앙아시아를 차지하며 대제국을 형성했다. 한족이 명나라를 세우자, 몽골족은 겨울수도인 상도(上都)로 대피했지만, 명 조정을 내내 괴롭혔다. 몽골은 중원을 빼앗긴 후에도 징기스칸 후손인 황금씨족이 칸의 자리를 이어갔다.

북쪽으로 쫓겨간 이후 몽골족은 동몽골(타타르)과 서몽골(오이라트)로 나뉘고, 동몽골은 막남, 막북으로 세력이 분화되었다. 1449년 서몽골의 오이라트가 강성해져 북방을 위협하자 명 6대황제 정통제(正統帝)가 진압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히는 이른바 토목(土木)의 변을 당하기도 한다. 1550년에는 황금씨족의 후예 알탄칸이 베이징 성문까지 진격해 수도 외곽을 불태우고 돌아가기도 했다. 명나라는 몽골에 막대한 은()을 하사해 달래야 했다.

 

그러던 중 만주에 여진족이 세력을 통합하면서 북방에 변화가 생겼다. 여진족과 몽골족은 이웃해 살면서도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었다. 송대에 금()나라가 강성했을 때 몽골족은 여진족에 복속했지만, 징기스칸이 일어나면서 금나라는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해서여진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1593년 해서여진의 예허(葉赫) 부족을 중심으로 2만명과 몽골족 1만명이 9개부족 연합군을 편성해 누르하치의 건주부를 공격하다 패배했다. 이 전투는 몽골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북방에 새로운 강자가 부상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몽골족 가운데 누르하치에 복속하는 부족이 생겨났다. 9부 연합군에 가담한 코르친 부족과 칼가 부족이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다짐했다. 두 부족의 복속은 몽골족의 분열을 초래했다.

 

누르하치는 몽골족과의 혼인을 적극 장려했다. 아니, 강요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유목민족에게 결혼은 그 자체가 정치적 행위였다. 혼인은 동맹의 표시였고, 파혼은 전쟁의 신호였다.

만몽(滿蒙) 두민족 간 정략결혼은 누르하치가 앞장섰다. 1608년에 몽골 코르친 부족은 통혼 의사를 누르하치에게 타진했고, 누르하치는 이를 허락했다. 1612, 누르하치는 코르친부 추장 밍안(明安)의 딸을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 것이 만몽 왕족간 첫 결혼이었다. 3년 후 1615년에 누르하치는 밍인의 동생 콩궈얼의 딸을 맞아들였다. 누르하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아들들에게도 몽골 왕족과 귀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이게 했다.

후금 2대왕 홍타이지도 몽골 부족과의 결혼에 적극적이었다. 그에게는 황후와 후궁 15명이 있었는데, 그중 7명이 몽골족이었다. 그 중 두 번째 부인이 그의 사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가 된다.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인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도 이미 결혼했지만 몽골족 부인을 얻는다. 후에 순치제의 섭정왕이 되는 도르곤(多爾袞)도 부인 열명 중 다섯명이 몽골인이었다.

이처럼 몽골인들은 후금의 건국기부터 귀족이자 왕비족으로 청 황가(皇家)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1627년 부친 누르하치가 금주(錦州)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했다가 명나라 맹장 원숭환(袁崇煥)에게 패해 물러나면서 홍타이지는 만리장성을 직공하는 것보다 몽골족의 영토로 우회하는 공격로를 개척하게 된다.

 

후금의 몽골 차하르 공격 /위키피디아
후금의 몽골 차하르 공격 /위키피디아

 

후금은 자발적으로 복속하는 몽골부족은 융화시키되, 저항하는 몽골족은 끝까지 정벌했다. 후금이 몽골 부족을 하나씩 복속시켜 나가자 몽골족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하고 징기스칸의 직계 부족인 차하르가 강하게 반발했다. 황금씨족을 이어나가던 차하르의 릭단칸(林丹汗)은 누르하치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수만냥의 은을 릭단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릭단은 그 돈을 독식하며, 그에게 복속했던 부족들을 강압적으로 이끌었다.

드디어 후금과 차하르의 한판 대결이 벌여졌다. 후금과 몽골의 주력부족 사이의 전투는 누르하치 말기부터 시작되어 홍타이지에 이어졌다.

홍타이지는 차하르와 다섯 차례나 전투를 벌이며 몰아부쳤다. 16324월 마지막 원정에서 홍타이지는 만몽연합군 10만명을 이끌고 차하르의 근거지인 귀화성(歸化城)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릭단은 서부 칭하이(靑海)로 도망쳐 티베트 원정을 시도하다가 1634년 사망했다.

이제 몽골족 전체가 홍타이지의 후금에게 접수되었다.

릭단의 정비 나무종과 후비 더우투먼은 락단이 죽은후 홍타이지에게 후비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홍타이지는 적의 왕비를 선선히 부인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강요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승자의 아량이며, 패배한 부족을 받아들이는 신호였다.

1635년 차하르 5차원정 도중에 홍타이지의 이복 동생 도르곤과 맏아들 호고 등이 정예기병 1만명을 이끌고 출전하던 중에 하늘이 내린 큰 선물을 받았다. 원정군은 황하를 건너 락단의 잔당을 소탕하던 중에 대원 전국옥새’(大元 傳國玉璽)를 얻게 된다. 드디어 홍타이지는 황제가 될 기회를 맞게 된다.

 

대원 전국옥새의 도장면 /위키피디아
대원 전국옥새의 도장면 /위키피디아

 

13세기 금()나라가 몽골과 송나라의 동맹에 의해 멸망할 당시만 해도 만주의 여진족이 다시 중원을 차지해 제국을 건설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르하치 스스로도 살아있을 때까지 중국을 지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하며 명에 선전포고할 때만해도 여진족의 통일을 희망했을 뿐이다.

하지만 인구 1백만명도 되지 않았던 만주족은 인구 1억이 넘는 한족을 지배했다. 그 원동력은 통합의 힘에 있었다. 후금은 복속시킨 부족과 종족을 지배해지 않았다. 그들을 동맹으로 만들어 냈다.

누르하치의 통합정신은 홍타이지와 도르곤을 이어가며 세력을 확대시켜 갔다. 후금은 대를 이어가며 정벌과 복속, 통합의 과정을 거쳤다.

만주족과 몽골족은 13세기 이래 오랫동안 대립해 왔다. 하지만 17세기초 후금과 청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몽골족과 생산적 동맹을 넘어 제국을 형성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 통합의 상징이 팔기(八旗)제도다.

후금은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상호 이질적인 부족들을 팔기라는 부대에 합류시켰다. 각 부족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하나의 깃발로 뭉치게 하고, 여덟 개의 깃발로 군대를 조직해 대통합을 이루는 방식이다. 한족 8기도 정복당한 민족을 상대로 지역성, 독자성을 살리며 만들어진 조직이고, 몽골 8기도 각자의 부족 독자성을 인정하며 통합한 군사조직이다.

다양한 인종과 부족을 통합할 줄 안 것이 후금의 지도자들이었다. 동맹의 필요성도 그들은 알았다. 한때 으르렁거리며 전쟁을 벌였던 인종과 부족도 일단 통합하면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치게 했다.

홍타이지가 몽골을 병합하는 사이에 조선에선 치열한 당파싸움이 전개된다. 후금에겐 조선이 명과 손잡고 후방을 교란하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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