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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6·25 때 2만명 대병력 파병…고구려 때 당나라에 대항해 연합한 나라
튀르키예 형제국, 1,500년의 인연
2023. 02. 08 by 박차영 기자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지진 사망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피해 현장의 발굴작업이 진행되면서 그 숫자가 1만명을 넘어설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대재앙을 만난 튀르키예에 세계 각국의 지원이 쏟아지고 있다. 튀르키예와 앙숙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지원을 약속했고,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도움이 되겠다고 했다.

우리 정부도 튀르키예 구호지원을 약속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튀르키예는 지난 1950년 공산침략에 주저하지 않고 즉각 파병을 한 형제국이라면서 우리 군 수송기를 이용한 구조인력 파견과 긴급 의약품 지원을 신속히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우리 국민들이 튀르키예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12월 비날리 을드름 터키(당시 국명) 총리를 청와대에서 접견한 자리에서 "한국 국민들은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반갑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튀르키예는 6·25 2만명의 대군을 보내 도와준 혈맹국이었고, 고대사에 이웃 민족이었다는 친연성이 있다.

 

튀르키예의 지각구조 /위키피디아
튀르키예의 지각구조 /위키피디아

 

튀르키예와 대한민국은 아시아 대륙 동쪽과 서쯕 끝에 위치해 있다. 두 나라는 어떻게 형제국이라고 자부하고 있을까.

우리민족과 튀르키예의 뿌리인 돌궐(突厥)족 사이에는 1,500년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동양사에서 돌궐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고구려사와 겹친다. 돌궐(투르크)은 흉노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한국 성씨 가운데 20%를 차지하는 씨의 선조가 흉노족이었다는 사실이 검증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돌궐족과 한민족의 조상은 고대에 중국 북방지역에 거주할 때 때론 싸우고, 때론 협력하던 관계였을 것이다.

투르크족은 서기 552년 부민(Bumin) 카간이란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위구르, 오구즈, 오노크, 카를룩족등 여섯 부족을 통합해 오르혼 강가에서 건국했다. 고구려로 치면 광개토왕, 장수왕의 전성기를 거쳐 양원왕 때였다.

고구려와 돌궐은 초기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7(551)돌궐이 고구려에 쳐들어와 신성을 포위했지만, 임금이 장군 고흘에게 병사 1만을 주어 물리쳤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돌궐과 고구려는 동맹관계를 형성한다. 삼국사기 영양왕조 18(607)수양제가 돌궐 계민 카간의 막사를 찾아갔을 때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카간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고, 계민이 고구려 사신을 감출수 없어 고구려 사산과 함께 수양제에 참배했다. 이에 영양왕은 수양제가 침범할 것을 걱정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즉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자 고구려와 돌궐이 동맹관계를 맺고 대처한 음모가 수양제에 들켜 전운이 감돌았다는 내용이다.

 

부민카간 시기의 돌궐족 영역 /위키피디아
부민카간 시기의 돌궐족 영역 /위키피디아

 

전성기 돌궐은 유라시아 지역 동서와 남북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했고, 그 면적이 1,000에 이르렀다. 지금 중국 면적에 비근한 영토에 해당한다. 나중에 발굴된 돌궐 비문에는 사방에 군대를 보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가진 자는 무릎을 꿇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중국 중원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에 의해 통일된 이후 돌궐은 내부 분열이 생기면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눠졌다. 동돌궐은 630, 서돌궐은 651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 패망 직전에 당태종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나라가 멸망한 이후 돌궐의 부족들은 서쪽으로 진출했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960년 셀주크 장군이 부족을 통일하면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드로 이주했고, 1037년 셀주크의 손자 토크릴 베그가 이란 고원에서 셀주크 투르크를 건국했다.

토크릴은 1055년 바그다드를 점령한데 이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술탄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셀주크 투르크는 여러지역으로 갈라졌던 중동의 이슬람세계를 통일하고,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셀주크 투르크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동로마) 제국 6만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 루마누스 4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를 계기로 투르크족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반도를 차지하게 됐다.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이 투르크족에 의해 장악되자, 위협을 느낀 유럽국가들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십자군을 결성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니, 십자군 전쟁이다. 셀주크 투르크는 십자군 전쟁으로 쇠약해진데다 수세기전 자신들이 살던 중국 북방에서 발원한 몽골에 의해 멸망했다.

 

셀주크 투르크가 멸망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주해왔던 투르크 족들은 각 부족마다 영지를 개척해 유목생활을 했다. 그 수는 10여개가 넘었다. 그중 하나가 오스만 투르크다.

오스만 투르크의 건국자 오스만 가지(Osmān Ghāzi)는 공식적으로 1299년 나라를 세웠다. 초기 영토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쪽의 작은 지역이었다. 초기 그의 부족 규모는 4만 텐트였는데, 당시 1텐트는 2~5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인구수가 10~15만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이 작은 나라는 그로부터 150년 후인 1453525, 그의 후손 술탄 메메드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다. 이로써 천년 이상 존재해 왔던 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동유럽이 아시아 종족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후 유럽사는 아시아 민족인 오스만 투르크와 유럽인들이 세운 합스부르크, 프랑스, 폴란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점철하게 된다.

 

용인시 튀르키예 참전비 참배(2022. 10. 18.) /용인시청
용인시 튀르키예 참전비 참배(2022. 10. 18.) /용인시청

 

튀르키예 국민의 80%가 튀르키예인(투르크족)이다. 하지만 아시아과 생김새가 다른 것은 수세기동안 유럽을 지배하면서 타민족과 결혼해 피가 섞인(혼혈) 탓이다. 튀르키예는 6.25때 미국·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군대를 보낸 나라이며, 참전비는 현재 경기도 용인에 있다.

튀르키예 국민들도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사이에 한국 노래와 음반, 드라마등 한류가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튀르키예와 한국이 3, 4위 결정전에서 만났을 때 우리 국민들은 양쪽 나라를 함께 응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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