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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이후 내각에 진출…친러파와 제휴했다가 견제 관계로 전환
이완용②…친러파와 손잡다
2023. 03. 10 by 김현민 기자

 

서울 중구 정동은 덕수궁 돌담길로 젊은이들의 각광을 받는 곳이다. 구한말에 이곳에는 미국, 러시아, 영국 공사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양 외교관과 조선 개화파들이 근처에서 자주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정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1894년 그들은 정동구락부라는 친목모임을 결성했다. 외국인으론 미국공사 H. B. , 프랑스영사 C. V. 플랑시, 르장드르,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가 멤버였고, 조선인으로 민영환·윤치호·이상재·이완용 등이 회원이었다. 초창기에는 친미파 조선인들이 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의 처제 앙투아네트 손탁이 특유의 사교력으로 모임을 이끌면서 이범진 등 친러파들이 가담하게 되었다. 이 사교클럽이 우리 근대사에 등장하는 것은 갑오경장, 을미사변, 아관파천의 격동기에 멤버들이 정치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앙투아네트 손탁의 사저에 세워진 손탁호텔 /문화재청 자료
앙투아네트 손탁의 사저에 세워진 손탁호텔 /문화재청 자료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김홍집은 친청파 보수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개화파 인물들을 끌어모았다. 37세의 이완용은 외부협판 자리를 맡았다. 지금의 외교부 차관이다. 내각에는 박정양, 이채연 등 친미파들이 대거 입각했다. 친일파가 친미파를 등용시켜 친청파를 제거한 것이다.

내각의 핵심인물은 김홍집이란 신인과 10년전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였다.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골자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절대왕정을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왕실의 권력은 축소되었다.

해를 넘겨 1895,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완승했다. 그런데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빼앗은 랴오둥반도를 돌려주면서 국내 상황도 급변했다. 고종과 중전 민씨는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미국 의사 알렌을 자주 불러 밀담을 나누었고, 친일파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정동파에 손을 내밀었다. 18955월 친미파 박정양이 총리대신이 되었고, 이완용은 장관급인 학부대신으로 승진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박영효는 중전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게 되었다.

학부대신으로서 이완용은 어떤 일을 했던가. 그는 189572일 소학교령을 제정해 근대적인 초등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이는 서구적인 국민교육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 조치의 연장으로 장동, 정동, 계동, 묘동에 소학교가 세워졌다.

아울러 이완용은 과거제도를 폐지했다. 성균관도 쓸모 없어짐에 따라 각국의 지리, 수학 등 근대 교과목을 도입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서 근대적 교육제도를 도입한 것은 분명하다.

 

권력의 주류에 진입하면서 이완용은 친미파 리더로 활약했다. 주미공사관 시절에 상관이었던 박정양은 소심한 인물인데 비해 그를 모시던 이완용은 정세를 예리하게 판단하고 실행력도 있었다. 이완용은 어느 사이에 친미파의 수장으로서 위상을 굳혀 나갔다.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가 동아시아에 주도권을 잡았다. 고종과 중전 민씨는 친일파들을 누르기 위해 베베르 공사에 의지하고 친러파를 중용했다. 국내에는 이범진 이외에 친러파가 취약했다. 이범진은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이경하의 서자로, 병과에 급제한 무관이었다. 나이는 이완용보다 6살 많았으나 신분에서는 이완용보다 낮았다. 이런 약점 때문에 이범진은 이완용을 필요로 했고, 이완용도 친일파 척결을 위해 일단 친러파의 손을 잡았다.

 

당시 서울은 동북아정세의 축소판이었다. 청일전쟁 직후 친청파는 몰락하고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했다가 삼국간섭 이후 친러-친미세력이 연합해 친일세력과 대치했다. 1895년 여름엔 어느 한 세력도 균형을 깨지 못했다. 그해 8월 친일 김홍집이 다시 총리가 되어 내각을 조직했는데, 친미-친러세력과 연합정권을 수립했다. 박정양이 내부대신, 이범진이 궁내부협판, 이완용이 학부대신을 유임했다. 내각 내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이완용과 이범진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종식시키고 조선왕실을 부활한다는 의미에서 94일을 조선개국 기원절로 받들어 그해 503회 기념식을 가졌다. 아울러 친일내각이 단행한 갑오개혁조치를 무산시켜 복식과 관료제도를 구제도로 환원했다. 친미-친러 연합은 내각에서 친일세력을 내쫓기 위한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일본은 판세를 뒤집기 위해 젊은 군인출신 미우라 고로를 신임공사로 부임시켰고, 그는 그해 108일 괴한들을 궁궐에[ 난입시켜 민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저질렀다.

 

을미사변이 터지고 일본이 무력으로 궁궐을 점령하자 이완용은 형 이윤용과 함께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고, 이범진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 두 세력은 양국 공사관에 칩거하면서도 사람을 보내 친일세력 타도를 도모했다.

친미-친러 세력의 공모사건이 18951128일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 한 춘생문(春生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완용, 이범진 등이 모의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궁궐 안에서 내응하기로 한 친위대가 나타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행동을 이끌었던 이범진은 이범진은 상하이로 도주했다.

그러던 중에 또 기회가 왔다. 을미사변 이후 의병이 궐기하는 바람에 친위대가 지방으로 파견되었고, 이에 따라 궁궐 수비가 허술해 졌다. 이 때 이범진이 몰래 귀국해 미국공사관에 먹고자던 이완용과 접촉해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시키자고 모의하게 된다. 그 모의가 실행된 것이 18962월의 아관파천이다. 사전계획에 따라 러시아 수병 120명이 러시아 군함에 실려 인천항에 도착했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고종은 친일파 김홍집을 처형하라고 지시했고, 그는 군중에 의해 타살되었다. 이완용은 베베르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고종을 알현했다. 이후 친러-친미 연합의 정동파 정권이 들어선다.

 

친미파는 미국의 도움을 얻지 못했지만 친러파는 러시아 군대의 물리적 지원을 받았다. 자연히 권력은 이범진에게 집중되었다. 이범진은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면서 몇 안 되는 친러파를 요직에 앉히려 했다. 논란이 되었던 인물이 김흥륙이다. 김흥륙은 함경도 천민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톡을 오가며 왕래하다가 러시아어를 배워 역관이 되어 이범진과 베베르 사이에 통역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이범진은 김흥륙을 외부협판에 기용하려 했다. 그러자 친미파 서재필과 윤치호 등이 이범진의 독주에 제동을 걸기 위해 베베르를 만나 이범진을 비난했다. 베베르도 이범진을 마냥 두둔하다가 친미파가 등을 돌릴까 두려워 한쪽에 치우칠수 없었다.

삼국간섭으로 일단 물러나는 것 같았던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를 놓고 다시 러시아와 팽팽하게 붙기 시작했다. 이완용은 불안한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므로, 친일파였던 이하영을 주일공사로 파견했다. 친러파와 손을 잡으면서도 친일파에도 한다리 걸쳐 놓은 것이다.

 

한때 손을 잡았던 친러파와 친미파가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 되었다. 유림들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산한 고종의 환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편승해 일본도 이범진의 축출과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다. 이범진이 법부대신으로 을미사변의 배후를 조사했고, 그 배후에 일본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에겐 이범진이 껄끄러웠다. 곂국 베베르 공사는 고무라 공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범진을 배제하기로 합의한다. 이범진은 결국 이완용에게 패배한 셈이다.

이범진은 주미공사관, 주프랑스공사관, 주러시아공사관을 돌다가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들 이위종을 이준, 이상설의 통역으로 동행시켜 헤이그로 파견하기도 했다. 고종 양위 이후엔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했으며, 한일합방 이후 1911년 자결했다. 정동파의 한 축으로 친러파 수장이었던 그는 항일운동을 펼치다 끝내 목숨을 던졌다. 그에 비해 변신의 귀재 친미파의 수장 이완용은 친일파로 전환해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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