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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600년’ 전시회의 포스터 모델인 스페인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
이 아리따운 공주는 행복했을까
2023. 03. 26 by 김현민 기자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합스부르크 600전시회가 끝나기 직전에 관람했다. 전시회에 가기 전에 궁금했던 건 포스터 모델로 사용한 어린 소녀였다. 저 소녀는 누구일까. 전시회 설명에 따르면 그림의 주인공은 스페인 공주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된 마르가리타 테레사다.

 

중앙박물관 전시포스터 /박물관 홈페이지
중앙박물관 전시포스터 /박물관 홈페이지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ita Teresa, 1651~1673)는 스페인 국왕 필리페(Felipe) 4세의 장녀다. 아버지도 합스부르크 가문, 어머니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아나(Mariana) 왕비다. 신라시대로 치면 성골 자식인 셈이다. 공주는 한 살 때에 정혼했다. 정혼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 레오폴트(Leopold) 1세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근친결혼을 통해 혈통을 보존했다. 자신들의 고귀한 혈통을 보존한다는 전근대적 관념이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은 씨족 내에서 배우자를 찾았다.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왕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일찍부터 짝을 지워주었다. 마르가리타도 그런 경우였다.

근친결혼은 유전법칙에서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곧바로 죽어버리거나, 살아남아도 오래 살지 못했다. 또 나이가 들면 위턱과 아래턱 사이가 맞지 않은 부정교합이 발생하고, 그 결과 대개가 주걱턱이 되었다.

필리페 4세도 두 번의 결혼으로 13명의 아이를 얻었으나, 이중 9명이 일찍 죽었다. 펠리페가 재혼을 해서 낳은 첫째딸이 마르가리타였고, 한 살이 지나 생존가능성이 보이자 바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황태자와 정혼한 것이다. 레오폴트는 마르가리타보다 11살 많았다.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Las Meninas, 1656) /위키피디아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Las Meninas, 1656) /위키피디아

 

국내 전시회에 선보인 그림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다섯 살 때(1656)의 그림이다. 흰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장래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공주의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스페인 왕실은 공주의 실물을 그려 보냈다. 당대 최고 화가가 동원되었으니,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였다. 밸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Las Meninas)은 같은해(1656)에 필리페 4세 일가의 모습을 그렸는데, 공주는 똑같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박물관에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인물화가 세 개 걸려 있다. 두 살(1653), 다섯 살(1656), 여덟 살(1659)의 그림인데, 스페인 왕실에서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려 오스트리아 황실로 보낸 것이다. 정혼자가 자라면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여덟 살 때 그림에는 공주가 오른 손에 모피를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예비신랑 레오폴트가 보낸 선물을 잘 받았음을 확인시켜 주려는 의미였다벨라스케스는 공주를 예쁘게 그렸다. 점점 빠져 나오는 턱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지운 것 같다. 지금 표현으로 뽀샵이다.

 

 

공주는 열다섯이 되던 1666년에 결혼을 하고 빈으로 갔다. 남편 레오폴드는 아버지에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어 있었고, 공주는 결혼과 동시에 황후가 되었다. 스페인에선 동생이 카를로스(Carlos) 2세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은 세계해양의 패권을 쥐고 있었고, 남미와 북미 절반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합스부르크는 유럽에서 저지대(베네룩스), 부르고뉴(프랑스), 나폴리(이탈리아)를 지배하고 로마제국의 계승국이라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대물림하고 있었다.

남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동생은 스페인 국왕인 이 여인은 행복했을까. 결혼 당시 제랄드 뒤 샤또가 그린 인물화에는 턱이 나와 있다. 더 이상 감출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공주의 표정은 우울하게 그려졌는데, 턱의 부정교합이 심각해 음식을 씹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이다. 남편 레오폴드도 인물화를 보면 주걱턱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에 합스부르크의 왕통은 아들이 물려받았다. 마리가르타 테레사는 네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세 아기는 사산하거나 태어난지 얼마후 사망했다.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남아 있다. 그녀는 21살에 요절했다. 레오폴트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공주와 재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를 계승했다.

 
 
공주가 두 살 때(1653)의 인물화 /위키피디아
공주가 두 살 때(1653)의 인물화 /위키피디아
공주가 다섯 살 때(1656)의 인물화 /위키피디아
공주가 다섯 살 때(1656)의 인물화 /위키피디아
공주가 여덟 살 때(1659)의 인물화 /위키피디아
공주가 여덟 살 때(1659)의 인물화 /위키피디아
결혼 당시 열다섯살 때(1666) 인물화 /위키피디아
결혼 당시 열다섯살 때(1666) 인물화 /위키피디아
스므살 때(1671) 딸의 손을 잡고 있는 인물화 /위키피디아
스므살 때(1671) 딸의 손을 잡고 있는 인물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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