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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삼전도 항복보다 더 굴욕적인 조약…북한산성도 짓지 못하고 지연
병자호란 그후②…정축약조로 국방 무장해제
2019. 07. 11 by 김현민 기자

 

1637130일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송파들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취했다. 38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민족은 이 굴욕적인 사실을 기억하고 분해한다.

그러면서도 이 일에 앞서 무슨 조약이 맺어졌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임금이야 새로 모실 황제에게 절을 하고 다시 왕권을 되찾았고, 어차피 명나라에 하던 조공을 청나라로 돌리면 되었지만, 나라는 무장해제의 상태로 놓이게 되었다. 그 조약이 정축약조(丁丑約條)이다.

정축약조는 삼전도 항복의식 이틀전에 청이 제시한 항복조건을 말한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조선왕과 신하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청이 일방적으로 제시한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정축약조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명과 절교하고 청의 연호를 받아들일 것

세자와 또다른 왕자(再一子)와 대신의 아들이나 아우를 인질로 보낼 것

명나라 정벌에 필요한 군사를 징발하도, 특히 가도 정벌에 군량을 보낼 것

각종 기념일에 사신을 보내고 모든 외교의례는 명의 구례와 같이 할 것

돌아온 포로는 청으로 보낼 것

내외의 대신은 혼인을 맺을 것

신구(新舊) 성의 축성을 불허한다

일본과 관계는 그대로 하고, 올량합(兀良哈)인과의 관계는 끊을 것

 

~항은 삼전도 항복 이후 곧바로 시행되었고, 항은 사문화되었으며, 항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항복후에도 오랜 세월 조선에 족쇄를 지운 것은 항의 돌아온 피로인의 귀환조치와 성을 쌓지 못하게 하는 항이었다.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도망쳐 조선으로 돌아올 경우 되돌려줘야 한다는 조항은 인권의 문제이자 자존심의 문제였지만, 국가 흥망을 좌우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을 짓거나 고치지도 말라는 요구는 공성전을 주로 하던 시대에 나라를 무방비로 방치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굴욕적인 조항이 추후 조선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보자.

 

북한지에 수록된 북한산성 행궁 위치도 /문화재청
북한지에 수록된 북한산성 행궁 위치도 /문화재청

 

피로인 문제도 20~30년이 지나면서 그 빈도수가 크게 줄어들면서 문제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벽 축성 금지를 규정한 조항은 여전히 유효했다.

논란은 숙종이 즉위한 1674년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벌어졌다. 이 문제는 30년 이상의 눈치와 조심을 거쳐 숙종 37(1711)이 되어서야 마무리됐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기 한해전 청나라에서 삼번(三藩)의 난이 발생했다. 청은 조선에 조총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오삼계(吳三桂)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뜻을 내걸은 만큼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조총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조총을 지원하는 댓가로 축성 허가를 얻어내자고 했다. 그러면서 한양 외곽에 북한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삼번의 난은 조선에도 파장을 미쳤다. 오삼계는 복건성과 대만을 장악하고 있던 정성공(鄭成功)의 해상세력과 연계되어 있었고, 정성공은 일본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정성공-일본의 연합 세력이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다른 일각에선 조총을 청에 제공하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북한산성을 쌓자고 주장했다.

북한산성 수축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만일 남쪽에서 정성공의 무리가 왜와 연합해 침공하거나 북쪽에서 청이 재침할 경우 왕실과 조정이 도피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서북지역에 군비를 방치한지 오래였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병자호란 때 입증되었다. 두 성은 그후 제대로 수리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왕이 도피할 곳으로 북한산성이 대두되었다. 도성과 가까워 신속하게 피신할 수 있으며, 산세가 험해 방어하기 유리하다는 두 가지 장점이 매력적이었다. 숙종은 북한산성 터를 조사한 뒤 성을 쌓으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신료들이 반대했다. 조총 제공을 거부해 청의 의심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 정축약조를 위반하며 북한산성을 쌓는 것은 청의 의심을 키워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과 서인이 모두 이 주장에 동참하는 바람에 숙종도 방침을 철회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1675년 조선은 청에 조총 50자루를 상납함으로써 청의 재침 우려를 일단 덜었고, 삼번의 난도 빠른 속도로 진압되자 남쪽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1904년 북한산성 행궁 사진 /문화재청
1904년 북한산성 행궁 사진 /문화재청

 

숙종 28(1702)에 북한산성 수축 논의가 다시 부상했다.

당시 논의의 배경은 삼번의 난이 아니라 황당선(荒唐船) 문제였다. 황당선은 중국배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조선 해역에 들어와 불법 어로와 약탈을 자행했다. 요즘의 중국어선의 불법어로와 마찬가지였다. 이 황당선은 중국과 일본의 해역의 해적 무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황당선이 자주 출몰하자 강화도가 해적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하고 북한산성 수출이 다시 거론되었다. 이 무렵 대기근으로 대규모 유민이 발생하고 도적이 들끓었는데 도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극도의 불안한 치안상황에서 대신들은 다시금 북한산성의 축성을 제기했다.

이때도 정축약조에 막혀 논의가 중단되었다. 조선 국왕과 신료들은 자발적으로 기었다. 청을 거스르는 일을 하다가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판단해 북한산성 축성 문제는 없던 일로 되돌렸다.

 

북한산성 /문화재청
북한산성 /문화재청

 

하지만 1710년에 북한산성 축성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었다. 요동지방에서 해적이 출몰하자, 청나라가 황제 명의(皇旨)로 해적 출몰 사실을 조선에 알려주고 대비하라고 했다. 해적들은 주로 요동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선 서북지역은 물론 도성의 안전을 위협했다.

조선 조정은 청 황제의 지시를 축성 허가로 받아들였다. 이에 그토록 반대하던 대신들은 이구동성, 북한산성을 쌓자고 주장했다. 특히 북한산성 쌓기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신료들이 앞장서서 축성을 건의했다. 심지어 반대에 앞장섰던 민진후는 북한산성 수축의 총책임을 맡기도 했다. 곧바로 1711(숙종 37)에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해 북한산성이 완성되었다.

조선의 성벽 축성은 이때부터 재개되었으니, 정축약조는 정묘호란이 끝난후 80년 동안 조선을 옭아 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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