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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용준 저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가해국으로 초등학교 40개 건설 체험기
“미래 건설 위해 과거사 잊은 베트남”
2023. 04. 05 by 김현민 기자

 

외교관 이용준씨의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은 혈기방장하던 30대 중반에 주베트남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30여년전 한국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던 현장을 찾아다니며 베트남인들이 상흔을 달래려고 노력하는 2년반의 과정을 정리한 글이다. 이용준씨는 19998월에 베트남에 입국해 20022월에 귀국했다. 그의 하노이 시절은 과거와의 만남이었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한 시간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은 우리에게 가해국이었던 일본과의 과거사를 풀고, 거꾸로 우리가 가해국이었던 베트남의 상처를 아물게 하려 애쓰던 때였다.

책은 저자가 귀국한 다음해인 2003년에 발간되었다가 2014년에 재출간되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이기도 한 저자는 한때 역사의 흐름에서 적으로 싸웠떤 베트남인들과 친구가 되는 과정을 솔직하고 생생하게 서술했다. 이 책에서 피해자인 베트남인들이 가해국 외교관에게 먼저 과거를 잊고 미래를 협력하자며 손을 내미는 대목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80년이 되도록 과거사의 진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외골수 한국인들과 비교하면 베트남 사람들은 해탈자처럼 보인다. 베트남이 오늘날 중국을 앞질러 높은 성장을 달성하고 공산권 국가 가운데 시장개방도가 가장 높은 것은 이런 초연한 화해 노력 덕분일 것이다. 박항서 감독에 열광하고 우리나라와 사돈국가가 되기까지 과거에 매달리지 않는 베트남인들에 존경심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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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1964년 의무부대와 태권도교관을 파견하면서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듬해 전투부대로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를 투입했고, 1966년 육군 백마부대와 십자성부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1973년 완전 철군할 때까지 8년간 한국군은 연인원 312,853명이 참전하고 대부대작전 1,174, 소부대작전 576,302회를 치렀다. 전사자는 4,960명이고, 포로는 놀랍게도 9명에 불과했다. 저자는 포로 숫자가 적은 것에 의문을 품고 탐문했는데, 베트콩이 유격전술을 채택했기 때문에 포로를 잡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한국군의 참전으로 많은 베트남인들이 희생되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그 숫자는 베트남 자료에 의존해야 했다.

이용준씨는 외교부에서 잘 나가는 북미라인이었는데도 남들이 가길 꺼리는 베트남 근무를 지원했다. 저자가 베트남에 근무할 때 국내 언론이 전쟁 당시 한국군의 양민학살 의혹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베트남 언론들도 한국 언론을 인용해 보도했고, 뉴스는 외신을 타고 외국으로 전파되었다. 베트남 주재 외교관들은 안절부절했다. 이때 베트남 정부는 과거사에 관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시키고, 보도를 통제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당시 베트남 외교당국은 공식논평에서 과거의 불행한 일을 현시점에서 거론하는 것은 베트남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와 달리 베트남과의 과거사에서 우리는 가해자였다. 당시 우리 정부나 국민은 베트남과의 과거사 문제를 양국간 현안으로 인식했고, 정부 고위인사들이 베트남 인사들을 만날 때 의례적으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유감 표시를 화두로 꺼내곤 했다. 그때마다 베트남인들은 한결같이 과거사를 언급하길 꺼려했다. 그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베트남은 한국으로부터 어떠한 사과나 보상도 바라지 않지만, 만일 한국인들이 베트남인들에게 무언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투자와 경험을 통해 베트남의 경제발전을 도와달라고 했다.

저자가 근무하던 시기는 1986년 도이모이(쇄신) 정책을 채택, 시장을 개방한 직후였다. 베트남은 국제사회로 진입을 목표로 삼고 있었고, 그들은 세계 최빈국의 오명을 씻고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과거사를 접어둔 것이다.

1992년 수교협상 때에도 베트남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과거사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수교협정 서명식에서 보반끼엣 총리는 과거 양국 사이에 불행한 일이 많았으나, 이는 국민의 뜻과 무관한 일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인들은 한국을 미국, 일본, 중국, 프랑스 등 과거 지배자들과 다르게 취급했다고 한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한국은 주범이 아니라 종범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저자는 생각했다. 전쟁기간 중에 북베트남 또는 베트콩의 문서에 남조선 군대라는 표현의 거의 없고 한국군을 박정희 용병군이라고 표기했다. 한국정부가 군대를 파견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압력을 받아 파견한 용병이란 것이다. 약소국인 한국이 미국의 압력으로 마지 못해 참전한 것이므로,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인에 대해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사람들이 과거사에 대해 유감을 표현하면 그들은 베트남은 과거를 잊고 한국과 진정한 친구가 되고자 하는데, 한국사람들은 왜 그토록 과거사에 연연하는지 이해할수 없다고 불평한다. 정상회담에서 우리 대통려잉 자발적으로 과거사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데 대해서도 베트남측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p56)

 

저자가 하노이에 부임하고 이듬해인 20003월초, 베트남 공안부 응우옌꽝빈 국제국장을 만나면서 우리정부는 베트남에 기여할 기회를 찾게 되었다. 그는 저녁 자리에서 한국군이 주둔했덙 5개 성이 극심한 전쟁 피해로 아직도 극빈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그들을 위해 소규모라도 인도적 지원을 제공해달라고 했다. 그는 한국군의 참전에 따른 보상이나 배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인도적 차원에서 자발적 지원을 원한다고 했다.

이용준은 베트남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군 주둔으로 반한감정이 큰 지역을 찾아 학교를 지어주기로 했다. 가능한한 우리군의 양민학살 의혹이 제기된 지역에 학교를 세워 자라나는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한국에 우호적인 마음을 가꾸자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정부에 건의되어 예산을 배정받았다. 200만 달러 예산으로 5만 달러짜리 초등학교 40개를 2년 내에 짓고, 사업은 외교부 산하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맡기기로 했다.

이용준 참사관은 학교부지를 선정하기 위해 청룡부대와 맹호, 백마부대의 전투지역을 찾아다니며, 한국군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던 곳의 상황을 청취했다. 이용준은 역사의 현장을 찾아 몸으로 부딪치고 전쟁의 기억과 상처를 대면했다. 베트남 중부 지방 5개 성에는 한국군의 흔적, 위령비와 베트남 사람들의 고된 삶이 남아 있었다.

숱한 일화를 남기고 학교건설공사는 완료되었다. 이용준은 그 40개 학교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과거사의 암영이 깊이 드리워진 베트남 중부 지방에 대한 한국인의 애정을 가득 담은 불멸의 기념비였다. 또한 그것은 전쟁의 와중에 한국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베트남인을 위한 살아 있는 위령비이기도 했다.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구 하미 위령비 /한베평화재단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구 하미 위령비 /한베평화재단

 

이용준은 학교부지를 선정기 위해 한국군 주둔지를 돌아디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남겨놓았다. 베트남 사람들의 증언 몇 개를 인용한다.

전쟁 기간중 일부 한국군에 의한 잔혹행위가 있었으나, 과거의 일을 거론하기를 원치 않는다. 군인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 한굮군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용서할수 있다. 베트남에 대한 한국기업의 투자와 한국정부의 경제 지원을 높이 평가하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p72~73)

당시 한국군은 방어가 어렵고 노출된 지역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고, 전투경험도 부족하여 희생자가 많았다. 초기에는 병사들이 무서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총만 내밀고 사격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기가 어렵고 베트남전쟁은 특히 그러했다. 때문에 많은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간혹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 수백명을 모아 놓고 집단 학살한 일도 있었다. 당시 수많은 시간이 있었우나, 과거의 일에 대해 언급하길 원치 않는다.”(p97~98)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심각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있었으며, 빈호아면에서는 한국군에 의해 마을 전체가 하루 사이에 소멸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극소수 예외적인 한국병사들의 행위에 불과하고 그들도 아미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주민들은 침략자에 대한 반감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으나, 베트남의 대외개방 이후 인식이 변화되어 이제는 더 이상 반감을 갖고 있지 않다.”(p119)

현지 인민위원회 안내원은 1966226일 하루 동안 맹호부대에 의해 떠이빈면 전역에서 민간인 1,028명이 학살되었으며, 그 위령비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숨진 380명의 희생자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도 있는지 문의하자, 그는 주민들이 위령비 건립을 염원하고 있으나 너무 가난하여 건립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떠이선현 내의 다른 면에서도 위령비는 발견할수 없었다.”(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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