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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년 황산전투를 소재로 다룬 소설…등장인물들이 사실에서 너무 엇나가
‘시골무사 이성계’는 남자소설인가
2023. 04. 19 by 박차영 기자

 

시골무사 이성계라는 역사소설에 관심을 둔 이유는 쌍방울 그룹 회장을 지낸 김성태씨가 1월에 검찰 소환에 응해 귀국할 때 왜 그 책을 들고 있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플래시를 받으며 태국 공항에 들어설 때 그는 의도적으로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있소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출판사가 낸 책의 서평에 남자소설이란 표현이 눈에 띠었다. 조폭 출신이라는 그가 사내다움을 강조한 것일까.

책표지 /네이버 책
책표지 /네이버 책

 

작가 서권은 의도적으로 이성계를 한낱 촌뜨기로 그렸다. 지방에서 알려지지 않는 무명작가로 오랜 시간을 보낸 자신의 모습을 이성계에 비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친구이자 영화평론가인 신귀백은 서평에서 시골작가가 쓴소설이라고 했다. 작가의 인생이 더 소설적이다. 서권은 시골무사 이성계를 탈고한 후 2009511일 작업실에서 친구. 선후배, 지인 모두 불러 그윽하게 한잔 한 후 홀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소설은 20123월에 출간되었다. 서권의 유고작이다.

 

소설은 13809(우왕 6) 어느 하루에 일어난 황산전투를 소재로 했다. 황산대첩에 대해 고려사우리 태조(太祖)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는데, 남은 적들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갔다고 짧게 서술한다. 정사의 이 짧은 내용을 소재로 장편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온갖 야사를 다 끌어들인 것은 이해되지만, 역사의 소재를 지나칠 정도로 허구화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가장 큰 허구는 이성계가 황산전투 시기에 시골무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황산대첩 20년전인 1361년에 박의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공훈을 세웠고, 그해 개경을 함락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를 탈환했다. 이어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수만명 군사를 물리쳤고, 원나라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 무리 1만명을 격퇴했다. 여진족 준동을 제압하고, 황산대첩 3년전에도 경상도 일대에 창궐한 왜구를 소탕했다.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고려군의 핵심 장수였다. 그런 인물을 황산전투에서 시골무사로 설정함으로써 사실(史實)을 너무 비틀었다.

 

역사소설은 팩트를 근간으로 해야 한다. 팩트와 팩트 사이의 빈 공간에 작가의 상상력을 이입해야 한다. 팩트가 틀렸을 때엔 독자의 호응력이 떨어진다. 아예 팩트에 무지한 사람이라면 속을수는 있지만

사실과 다른 내용이 시골무사 이성계에 많이 나온다. 정도전과 정몽주가 전투 현장에 참여한 것으로 등장한 것은 너무 나갔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처음 만난 것은 황산전투 4년후인 1384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인물을 소설에서 이성계의 군사(軍師)로 등장시켰다. 정몽주가 왜 이 대목에 등장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쟁터에 명나라, 원나라 사신들이 간섭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우스울 정도다.

가장 큰 왜곡은 아지발도다. 아지발도의 부인이 조선여자로 상정했는데, 이 대목은 거의 국뽕 수준이다. 아지발도는 일본 남조의 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소설에서처럼 바보멍청이는 아니었다.

 

남원 황산대첩비 /문화재청
남원 황산대첩비 /문화재청

 

아지발도(阿只抜都)는 고려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15~16세의 소년으로 추정되는 경신년(1380) 왜구의 왜장이다. 이기발도(阿其拔都)라고도 표기하는데, ‘아기는 어린아이란 뜻이고, 발도는 몽골어로 바투르’(용감한 자)란 뜻으로, 아기장수라는 호칭으로 해석된다. 우리 사료에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어로는 아키바츠(あきばつ)로 읽는다.

아지발도 일행이 고려 땅에 도착한 날은 1380 77일이다. 이들은 500척의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지금 충남 서천군 장항 일대인 진포구(鎭浦口)에 도착했다. 인원수는 6,000~7,000명에 이르는 대병력이다. 왜구는 진포구에 선단을 밧줄로 묶어 두고 금강을 따라 북상, 부여를 거쳐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고려군이 추격하자 왜구는 청양·신풍·홍산 등지를 약탈하며 이동했다.

8월에 우왕이 최무선에게 전함 100척을 주어 왜구 전함을 나포하도록 명령했다. 최무선은 진포에 정박해 있던 왜구 함선을 불태우고 사로잡혔던 고려인 334명을 되찾고 왜구 추격에 나섰다.(진포해전) 아지발도는 옥주(沃州, 옥천)에서 전함이 불타버린 것을 알고는 경상도로 들어가 상주를 쑥대밭을 만들고 경상남도 함양에서 고려군 500명을 무찔렀다. 이때만 해도 아지발도의 왜군은 위풍당당했다. 거의 카르타고의 한니발 수준이다.

 

드디어 고려조정은 시골무사가 아닌, 정규군 대장 이성계에게 지휘를 맡겼다. 아지발도도 이성계가 온다는 소식에 남원성 포위를 풀고 이성계군을 유인했다. 아지발도 군의 전력은 막강했다. 오히려 이성계가 왜구가 쏜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았고, 적에게 두어겹 포위를 당했다. 조선의 역사기술자들은 이 대목에서 포장술을 발휘했다. 이성계는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비겁한 자들은 물러나라, 나는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다고 외쳤다. 이에 고려군은 왜구의 포위망을 뚫고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것이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13809월의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하고 날쌘 모습을 가상히 여겨 생포할 것을 명했지만, 그의 여진족 동료인 이지란(퉁두란)이 반대했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고 하고 활을 당겨 투구 꼭지를 맞혔다. 이에 이지란이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고 한다.

이 야사는 서권의 소설에서 뒤바뀌어 서술된다. 이지란이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벗기고, 이성계가 쏜 화살이 아지발도를 죽이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작가는 이성계의 사내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야사도 개작한 것이다.

 

아지발도의 피가 적셨다는 피바위(남원) /문화재청(문화재지킴이)
아지발도의 피가 적셨다는 피바위(남원) /문화재청(문화재지킴이)

 

아지발도를 잃은 왜구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고, 강물이 피로 물들어 6~7일 동안 붉은 빛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지발도가 이성계 화살에 맞고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 있는데, 남원시 인월면의 남천 강변에 남아있는 피바위에 얽힌 전설이다.

황산전투에서 달아난 왜구 70여명은 지리산으로 달아나 그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4, 무등산 규봉사(圭峯寺)에 나타났다. 고려군이 왜구 잔당들과 전투를 벌였고, 살아남은 일부는 바다로 탈출하려다 죽거나 사로잡혔다. (우왕 74)

 

소설 시골무사 이성계는 그야말로 시골스럽다. 의도하는 바도 뚜렷하지 않다. 반일이 주제도 아니고, 이성계를 추켜세우자는 것도 아니다. 작가의 친구가 규정한 것처럼 그야말로 남자소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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