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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아문에 진정서, 백정도 갓과 망건 착용 허가 얻어내…만민공동회 연설도
백정 박성춘①…스스로 신분을 해방시키다
2023. 04. 21 by 김현민 기자

 

조선시대 백정은 인간대우는커녕 개·돼지보다 더 더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도살업을 주로 하던 이들은 일반백성(常民)들처럼 상투를 틀지 못했고, 두루마기도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름을 지을 때 인(((((()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쓸수 없었고, 이름이 아예 없거나 만석(萬石억석(億石무검(武劍소개(小介) 등과 같은 좋지 못한 글자로 지어야 했다. 천인은 일곱 종류로 분류해 승려, 광대, 무당, 점복, 기생, 피장, 백정을 칠반천인(七班賤人)이라고 했는데, 그중 백정이 가장 낮은 대우를 받았다. 노비보다 못한 존재였다.

백정은 갓과 망건은커녕 털모자도 쓸수 없었다. 양민과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공공집회와 장소에는 허가 없이 출입할수 없었다. 일반인의 집을 방문할 때 문전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취해야 했고, 길을 걸을 때 일반인과 같이 걷지도 못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었다. 상민과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천인과 결혼할 때도 남자가 말을 타고 여자가 가마를 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백정의 신부는 비녀를 꽂지도 못했다. 초상이 나도 상복을 착용할수 없었다. 양반은 물론 상민도 백정에 대해 린치(私刑)을 가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곤당골교회의 후신인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 /문화재청
곤당골교회의 후신인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 /문화재청

 

19세기말, 서울 종로 바닥에 박가라고 불리는 백정이 있었다. 이름도 없었고, 아버지가 백정이니 그 아들은 당연히 백정이었다. 종로의 상가에 고기를 운반해주고, 동네 허드렛일을 하던, 천하디 천한 박가가 19981026일 종로에서 열린 독립협회 주최 만민공동회에 관민대표로 등단해 연설을 했다.

나는 대한(大韓)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無知沒覺)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갱민(利國更民) 길이라면,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차일(遮日,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힘이 부족하나, 많은 장대를 합치면 대단히 강해집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감히 사람들 앞에 얼굴도 들지 못하던 백정이 수많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했다. 한양 인구 20만명이던 시절에 만민공동회엔 1만명이 모였다. 조선 역사 초유의 대집회에 백정이 종삼품 고관대작들과 나란히 연단에 올라 그들을 타이르는 듯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친 것이다.

백정 박씨가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설 때 이름을 갖고 있었으니, 박성춘(朴成春)이다. 그는 일자무식임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편견에 포물을 열었다. 그는 자신도 고종황제에 충성을 할 자격이 있음을 선언했다. 백정이지만 상민, 양반들과 힘을 합쳐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는데 기여하겠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박성춘이 만민공동회 연사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신분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실로 당당한 백성이 된 것이다. 대한제국으로 나라이름을 바꾼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에서 이미 신분제 차별을 철폐했다. 박성춘은 지신이 속한 백정 신분을 면천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매개 역할을 했다. 미국에선 노예해방 과정에서 남북전쟁(1861~65)이 일어나 나라가 갈라지고 군인과 민간인 수십만명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30년후 조선에서는 유혈사태 없이 신분해방, 즉 면천(免賤)이 이뤄졌다. 박성춘이 그 중심에 있었다.

올리브 애비슨 /위키피디아
새무얼 무어 /양화진선교사묘원

 

박성춘은 출생일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1862년경에 서울 관자골(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결혼을 해 봉출이란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만큼은 자신처럼 무식함을 면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에 서양사람들이 주간학교를 만들어 글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사람이 하는 학교였으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서양사람이 한다니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보냈다.

미국 장로교 소속 새무얼 무어(Samuel Forman Moore, 1860-1906)) 선교사가 1893년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하층민, 특히 최하층 백정들을 선교하기 위해 학교를 연 것이다. 곤당골은 고운담골의 준말인데, 지금의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근처다. 선교사 무어는 백정 출신 남자아이 6명을 받아 주간학교를 시작했고, 박성춘의 아들 봉출도 미국 선교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어느날, 박성춘이 장티푸스에 걸려 심한 열로 사경을 헤맸다. 봉출은 스승 무어에게 달려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무어는 고종의 주치의(侍醫)였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을 데리고 박성춘의 집을 찾아갔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몸을 만지던 시의가 백정을 돌보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스럽게 박씨를 치료해 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다. 박씨는 임금의 주치의가 거지보다 더한 대우를 받던 백정을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1년후 세례를 받아 봄을 이루다는 의미로 성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들도 봉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상서로운 태양이라는 의미로 서양(瑞陽)으로 개명했다.

박성춘은 세례를 받을 때까지 자신이 백정이란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신분이 드러나자 교회에 나오던 양반 교인들이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예배당 앞쪽에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요구했다. 무어가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다. 신분차별에 설움 당하던 많은 백정들은 복음 안에 차별이 없다는 무어와 박성춘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양반들이 떠나가자 박성춘은 동료 백정 임씨, 원씨, 이씨 등 4명을 곤당골교회로 데리고 나왔고, 백정 조합사무실에 나가 복음을 전파했다. 1895년 가을이 되자 백정들의 전도로 곤당골교회의 교인 수가 세례교인 43, 원입교인 14명 등 57명으로 증가했다. 곤당골교회는 백정교회라는 별명을 얻었다. 1898년에 경기지방에만 백정 신자가 132명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 차별 폐지가 발표됐지만 오랜 관습으로 인해 백정에 대한 관습적 차별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박성춘은 백정 계급을 대표해 유길준이 대신으로 있던 내무아문에 탄원서를 보냈다. 그 내용이 무어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당신의 비천한 종들인 우리는 500년 남짓 백정 일을 생활수단으로 살아왔습니다. 매년제(年祭) 때마다 조정의 요구에 순응해 왔지만 우리는 항상 무보수였고, 가장 천대받는 칠천민(七賤民) 중 하나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다른 천민 계층은 도포와 갓과 망건을 쓸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심지어 지방 관과의 아전들은 돈까지 뜯어가곤 합니다. 만일 그의 요구에 불응하면 갖은 행패를 다 부리고 때로는 관가에 잡혀가서 놀림을 당하고 욕을 먹으며 억지로 일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어린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받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그런 고통이 있으며 그 외에도 우리가 당하는 수없는 천대를 어찌 말로 다할수 있겠습니까.

우리보다 낮은 계층인 광대조차 갓과 망건을 쓰는데 우리들만 유난히 허용되지 않고 있어 그 한이 뼈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 비천한 충복들이 갓과 망건을 쓰고 다닐수 있으며 또한 관가에 붙어사는 관리들이 이후 다시는 우리를 부려먹지 못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올리브 애비슨 /위키피디아
올리브 애비슨 /위키피디아

 

박성춘이 요구한 것은 백정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상투를 틀고 갓과 망건을 쓰도록 허용해달라는 것이었다. 무어 선교사는 애비슨을 불렀다. 1895년 청일전쟁 기간에 콜레라가 만주에서 한반도로 남하했고, 애비슨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콜레라 방역에 힘쓴 결과 콜레라를 퇴치했다는 공로를 인정받고 있었다. 조선 조정도 애비슨은 무시하지 못했다.

무어 선교사는 애비슨에게 당신이 치료한 박씨가 백정들의 위해 건의문을 냈으니, 백정들을 위해 유길준에게 진정서를 하나 써달라고 했다.

박성춘의 탄원서와 애비슨의 진정서에 대한 내무아문의 회신이 무어 선교사에게 전달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들의 소원을 허락한다. 갓과 망건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도포를 입어라. 그리고 평민의 신분을 누리라. 그리고 주의해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외모만 갖추도록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너희들의 내적인 행복을 생각하라. 만일 관가에서 아전들이 너희들을 억압하려고 하면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 교서를 보여주도록 하라.”

이로써 백정들은 일반인과 동등하게 갓과 망건을 쓸수 있게 되었다. 이 조치는 바로 백정들도 일반인과 동일한 인격체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 상민이 양반이 되는 것과 백정이 망건과 갓을 쓰는 것이 신분차별에 대한 가장 큰 한이었다. 박성춘은 백정의 한을 푼 것이다.

 


<참고한 자료>

백정 아버지와 서양의사 아들(KBS, 유튜브)

초기 개신교의 하층민선교에 대한 연구- 백정 선교를 중심으로(석사논문), 정승현, 2004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Moore, Samuel Forman(무어)

Wikipedia, Oliver R. Av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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