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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양, 애비슨의 도움으로 의사 수업…10년 의사로 활동한 후 만주서 독립운동
백정 박성춘②…서양의사가 된 아들
2023. 04. 25 by 김현민 기자

 

백정 박성춘이 캐나다 의사 올리버 애비슨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박성춘은 애비슨의 치료 덕분에 장티푸스에서 낳았고, 애비슨이 힘써준 덕분에 백정의 신분 탈출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애비슨에게 한가지 청을 더 넣었다. 제중원 원장을 맡고 있던 캐나다 의사에게 박성춘은 아들을 의사로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제중원의 뿌리는 1884년 갑신정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변의 와중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중상을 입었는데 미국 장로회 소속 의사 호러스 알렌이 서양의술로 민영익을 살린 것이다. 이에 고종이 서양의술의 우수함을 받아들여 서양식 병원을 설립했는데, 광혜원이다. 광혜원은 2주만에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제중원(濟衆院)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우리나라에 서양병원이 들어오는데는 기여했다. 1993년부터 애비슨이 제중원을 책임지게 되었다.

 

갑오경장 이후 1896년 백정들이 면천된 후 박성춘은 아들을 서양의사로 만들고 싶었다. 얼마전 같으면 감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말이 면천이지 사회적으로 백정은 여전히 천대를 받았다. 아들은 백정 때 이름이 봉출이었는데, 면천과 동시에 기독교 세계를 받으면서 서양(瑞陽), 상서로운 태양이라는 멋드러진 이름을 바꾸고 결혼도 시켰다.

박성천은 아들의 결혼식에 온 애비슨에게 아들을 병원으로 데려가 사람 좀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애비슨은 박서양의 입학을 바로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병원 청소, 침대 정리 등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다. 인성테스트를 한 것이다. 온갖 천대를 받고 자라난 박서양은 아무리 궂은 일을 시켜도 한마디 불평 없이 일을 해 냈다. 마침내 애비슨은 박서양에게 의학서적을 주어 읽게 하고 1900년에 제중원 입학을 허용했다. 이렇게 해서 백정의 아들은 제중원의학교에서 의사공부를 하게 되었다.

제중원은 1904년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 공부를 할 때 박서양의 사진이 남아 있다. 스승 애비슨이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장면인데, 박서양은 망건을 쓴채 애비슨에게 가위를 건네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에는 대한제국 시가의 수술실, 수술도구, 수술인력, 수술복장 등을 보여준다.

1908년 박서양은 졸업시험을 통과해 다른 6명과 함께 의사면허를 받았다. 세브란스의학교 1회졸업생이 된 것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해방 후 연세대 의과대학으로 통합된다.

 

애비슨과 박서양의 수술장면 /문화재청
애비슨과 박서양의 수술장면 /문화재청

 

아들이 의사공부를 할 때 아버지 박성춘은 백정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나섰다. 박성춘은 신자가 된 동료 백정들과 함께 1만여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는 삼남(三南) 지방을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 그는 천민 해방의 법령이 나왔는지를 모르는 백정들에게 갓을 쓰라고 격려하고 복음을 전했다.

박성춘이 처음 나갔던 곤당골교회는 189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교회는 1905년 인사동에 새 예배처소를 마련해 옮기면서 승동교회가 되었다. 박성춘은 1911년 승동교회 장로로 선출되었고,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으로도 활약했다. 이후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박성춘은 금융 관련’(banker) 일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 10년 정도 모교 교수로 화학,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진료를 했다. 그가 의사활동을 하는 시기에 나라는 사라졌다. 박서양은 식민지 조선에서 의사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몸을 담게 된다.

박서양은 1918년 만주로 이주해 그곳에서 병원을 열었다. 이때 아버지 박성춘도 아들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서양은 간도에서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간도 지역 조선인 자치조직인 대한국민회에서 군의(軍醫)로서 의료를 담당했다. 아버지 박성춘은 1933년 세상을 떠났다.

1931냔 민주사변이 일어나고 간도도 조선인들이 살기에 힘들어졌다. 그가 설립한 숭신학교도 불온사상을 고위시킨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박서양은 1936년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지 엄마되지 않아 1940년 박서양은 55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광복절을 맞아 박서양(1887~1940)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독립유공자로 추서했다.

 


<참고한 자료>

백정 아버지와 서양의사 아들(KBS, 유튜브)

초기 개신교의 하층민선교에 대한 연구- 백정 선교를 중심으로(석사논문), 정승현, 2004

문화재청, 에비슨의 수술장면 유리건판 필름

Wikipedia, Oliver R. Av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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