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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슈미드, 저서 ‘제국 그 사이의 한국’에서 한국 민족주의 형성과정 추적
“민족주의는 구한말에 발명된 인식의 소산”
2023. 04. 28 by 박차영 기자

 

민족(民族)이란 단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서양어가 없다. 영어로 nation, race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뉘앙스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 이유는 민족이란 단어가 한··일의 동양에서 19세기말에 만들어진 어휘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세 나라의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민족이란 용어를 찾아내고 공유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조공관계를 끊은 후 일제 식민지를 거치고, 분단 상황이 80년 가까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민족은 누구도 범할수 없는 신성한 단어가 되었고, 주의(ism)가 되었다.

한글판 표지 /네이버 책
한글판 표지 /네이버 책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동양사학자 앙드레 슈미드(Andre Schumid)는 저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에서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했다. 이 책은 현지에서 2002년에 발간되었고, 원제는 “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 국내에선 2007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번역 정여울, 휴머니스트)

책 제목에서 언급된 제국’(Empires)은 중국과 일본을 말한다. 중국의 조공국가였던 조선이 1995년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에 의해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을 체험한 이후 다시 일본에 속박되는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 자각의 결과가 민족이라는 발명품이다.

슈미드에 따르면, 민족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흔적은 일본에서 발견되며, 중국에서도 민족이란 단어가 급속히 대중화되었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1905년 을사조약 이전 한국에선 민족이란 어휘의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1900년에 황성신문에 민족이란 어휘가 있는데, ‘동아시아의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인종(race)의 개념이었다. 이 신조어가 한반도 안에 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1907년이었다. 그해 6월 황성신문은 민족주의라는 어휘를 사용한 사설에서 민족을 나라의 기초로 제시하며, “모든 백성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미드는 민족주의 형성과정에서 신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근대 초기의 신문은 성리학적 사상과 왕조 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 문명개화의 근대로 진입할 것을 요구했다.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주요신문들은 민족에 대한 지식의 생산자이자 전파자였고, 중국과 일본의 야심의 한가운데서 위기에 처해 있던 한국의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중재적 역할을 했다.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신채호는 민족 담론을 펼치는 주인공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신문은 두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막 꽃피기 시작한 민족주의 운동을 형성하고, 지도하며 반영했다. 신문은 민족주의 지식을 생산하는 독보적 매체였다. 방송이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이제 처음 신문이 조선인에게 소개되던 시절이었다. 신문의 필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민족담론을 만들어 냈다.

 

제국 그 사이의 한국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10월에 광개토대왕비 발견 사실을 화두로 꺼냈다. 당시 한국 신문들은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에 흥분했다. 6.8m의 거석은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비였다. 이 비석은 이미 20년전에 발견되었지만 조선인들은 발견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도쿄에 탁본이 전시된 것을 어느 조선인이 발견해 신문사에 제공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언론들은 흥분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압박이 강화되던 시절에 과거 우리 민족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언론들은 중국 북부 연나라를 토벌한 광개토왕의 승리를 묘사하면서 한국과 중국 역사관계의 재정립을 시도했다. 우리민족은 애초에 강하고 용감했으며, 나약하고 열등하지 않았다. 광개토왕비가 이를 입증했다. 광개토왕은 중화로부터의 독자성을 강조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우리가 중국에 부속된 소중화가 아니라, 독자적인 자아가 있었음을 발견하는데 광개토대왕비가 활용되었다. 신채호는 한민족은 지속적인 민족 말살의 위험 속에서 끝내 살아남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영문판 표지 /토론토대
영문판 표지 /토론토대

 

1895년 이후 민족주의자들은 사대(事大)의 대상이자 조선조에 상국(上國)이었던 중국의 위상을 강등시켜 나갔다. 중국은 일본에 패배했고, 서양 각국에 갈기갈기 쥐어 뜯기고 있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하면서 한때 조공을 바치며 숭배하던 중국을 반면교사의 대상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을 재별견했고,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본 제국주의였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혐오 대상에서 우상의 대상으로 변한다. 오랫동안 왜적으로 불렸던 일본은 조선의 문명개화론자에게 모범생으로 격상되었다. 개화를 주창하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주동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친일을 지향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라기보다 서양국가처럼 보였다.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외치는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사실을 문명개화론자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슈미드는 일본의 식민주의와 한국 지식인들의 민족주의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지적했다. 식민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문명 개화를 공통분모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주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를 갈라놓게 했다. 일본의 식민화가 노골화되면서 조선의 근대화론자들은 자신의 문명개화론이 일본의 침략에 봉사하고 있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결국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식민주의에 대항하게 된다. 국권이 침탈당했을 때 국혼(國魂), 민족정신이 강조된 것이 그런 맥락이다. 1910년 합방 이전에 한국 지식인들은 일본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토 히로부미조차 한국 언론을 두려워하고 불퐤해 했다. 그는 1907년 도쿄의 연설에서 한국 신문기자들이 펜대 한번 훔직이는 것이 내 입에서 나온 수백마디의 말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한국인을 움직인다고 말했다.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단군이 강조되고, 만주의 영토성이 부상하고, 한글 사용이 중시되는 것도 민족주의 일환이었다. 사대부들의 사상이 무시되고, 풍수지리설이 비과학적으로 매도되며, 백두산이 강조된 것도 19세기말~20세기초 민족 자각의 결과였다.

 

앙드레 슈미드 /토론토대 홈페이지
앙드레 슈미드 /토론토대 홈페이지

 

슈미드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한국 민족주의를 추적하고 분석했다. 책의 제목에서 “1895-1919”이라고 연구기간을 설정했지만 내용에서 1910년 합방이후 내용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일제가 식민지의 출판을 전면 금지해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에필로그에서 구한말에 형성된 민족주의가 1945년 해방 이후 남북 두 개의 정권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주목했다. 남한은 구한말의 민족주의를 계승했다는 입장이고, 북한은 단절한후 김일성주의를 강조하지만 두 정권이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민족을 지기식으로 이해하고 강조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중화주의에서 결별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생성되어, 해방후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에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슈미드는 세계화시대에 한국 민족주의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스스로 답을 내야 할 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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