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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일본에 저항기사 보도…1909년에 37세로 별세
대한영국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2023. 05. 02 by 박차영 기자

 

지금으로부터 114년전인 190952일 수천명의 한국사람들이 서양의 한 젊은이 장례식에 모였다. 고인은 영국인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 11. 3.~1909. 5. 1.)이었다. 그는 지구 반대편 대한제국에서 심장질환으로 37세 한창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베델은 나라가 스러지기 직전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본에 저항한 영국인이다. 고종황제는 그에게 배설(裵說)이란 성명을 하사하고 여러 편의를 제공했다.

 

어니스트 베델 /국가보훈처
어니스트 베델 /국가보훈처

 

베델은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머스 핸콕 베델은 극동아시아를 상대로 조그마한 무역회사를 차려 경영했고, 베델은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7살이던 1888년에 동생들과 함께 일본 고베로 건너갔다. 고베에서 아버지 일을 돕다가 결혼을 했다.

베델은 32살이 되던 1904년 언론으로 직업을 바꿔 영국 일간지 데일리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도쿄특파원이 되었다. 바야흐로 러일전쟁이 터지고, 그해 310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대한제국 황궁 화재사건을 취재해 특종기사도 썼다. 그는 짧은 조선체류 기간 중에 일본이 조선인을 험하게 대하고 수탈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데일리크로니클의 특파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신문을 만들었다. 1904718일 대한매일신보는 이렇게 해서 창간되었다. 베델은 처음에 국한문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The Korea Daily’의 두 개 신문을 발행했고, 1907년에는 한글전용신문을 창간, 세 종류의 신문을 인쇄, 발행했다.

 

대한매일신보 /위키피디아
대한매일신보 /위키피디아

 

대한매일신보는 영향력이 컸다. 당시 황성신문이 있었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논조를 꺾은데 비해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이 주인이었기 때문에 일본 통감부가 어찌 하질 못했다. 당시 영국은 최고의 언론자유를 구가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당시에 고종의 자금이 흘러들어갔을 것이란 의심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베델은 순수하게 자기 돈으로 신문사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용을 절감했다. 자체 인쇄시설을 갖추지 않고 미국인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감리교 출판부 인쇄기를 이용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논조가 매우 강했다. 황현(黃玹)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들의 악행을 폭로했으며, 사람들이 너도나도 이 신문을 구독하는 바람에 한때 품귀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전국적인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과 동시에 황무지 개간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영일 동맹조약에 따라 일본의 한국 지배를 지지한데 비해 베델은 자국 정부의 외교정책 기조에 연연하지 않았다. 주한영국공사는 베델의 신문이 영일 우호관계에 장애가 된다는 보고서를 본국 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1905년 읋사조약 체결 이후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국제하의 사설을 쓴 것도 대한매일신보는 인용하며 장지연의 논조를 지지했다. 장지연의 논설 이후 황성신문이 일시 정간당했다가 복간한 후 반일 논조를 순화했으나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오히려 강해졌다.

19071월 고종이 영국의 런던 트리뷴’(London Tribune)에 자신이 을사조약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칙서의 형식으로 알렸는데, 그 중개역할을 한 사람이 베델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런 추정은 당시 같은 내용이 대한매일신보에도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는 독립운동에도 간여했다. 총무였던 양기탁은 신민회(新民會)의 산파 역할을 맡았으며, 대한매일신보사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서도 국채보상지원금의 모금기관으로 역할을 했다. 베델은 사장 자격으로 의연금을 관리했고, 이것이 후일 대한매일신보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서울중구 프레스센터에 세워진 베델과 양기탁 동상 /해외문화홍보원
서울중구 프레스센터에 세워진 베델과 양기탁 동상 /해외문화홍보원

 

대한매일신보에는 구한말의 명필진 신채호, 박은식 등이 모여 일본제국을 통렬히 비판했다. 1907년 발행 부수는 1만부를 넘어 최대 신문사가 되었다.

대한제국을 집어 삼키려는 일본에게 영국인 베델은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조선통감부와 일본제국은 베델을 추방할 것을 영국정부에 요구했다. 영국도 동맹국의 압력에 굴복해 베델을 190710월과 이듬해 6월 두 차례나 재판정에 세웠다.

첫 번째 재판은 19071014일에 열렸다. 주한 영국총영사관에 임시로 설치한 법정에 베델이 출석했다. 베델은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쳤다는 혐의를 받고 6개월의 근신 처벌을 받았다. 6개월동안 대한매일신보는 비교적 부드러운 논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근신이 끝나고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다시 날카로워졌다. 일본은 다시 베델의 추방을 영국정부에 요구했다. 이번에도 영국정부는 굴복해 베델을 법정에 세웠다. 1908615일 서울 정동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린 두 번째 재판에선 상하이에서 정식 판사가 오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영국인 판사 본(Bourne)은 베델에게 3주간 금고에 6개월의 근신을 요구했다.

판결 결과가 알려지자 재판정 밖의 많은 한국인들은 격분했다. 어떤 이는 돈 4,000환을 가지고 와서 베델의 금고형을 돈으로 대신 면제받을 수 있다면 내놓겠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한국에는 영국인을 가둘 시설이 없어 베델은 상하이로 건나가 3주간의 옥고를 치르고, 그해 711일 출소했다. 출소후 경성으로 돌아온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사 사장직을 자신의 비서였던 만함(Alfred W. Marnham)에게 맡기고 신문제작에서 한발 물러났다.

일제는 이번에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과 베델이 국채 보상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하지만 양기탁과 베델이 아무런 죄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베델의 활동을 멈추게 한 것은 급격한 건강 악화였다. 베델은 190951일 심장병으로 별세했다. 일본의 탄압, 여러차례의 재판, 모함과 싸우는 과정에서 심리적 압박감이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베델은 죽으면서 양기탁에게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했고, 여성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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