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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가 자제와 결혼한후에도 화랑들과 염문…3대 임금에 대해 색공 바쳐
화랑세기 속 인물들①…색공지신, 미실
2019. 07. 13 by 김현민 기자

 

<화랑세기> 필사본이 전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이 미실(美室)이라는 여인이다. 그녀는 유교 문화에 젖어 있는 현대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파격적이다. <화랑세기> 필사본 자체가 위작논쟁에 빠져 있는만큼 미실의 존재 여부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미실이 실존인물처럼 그려졌다. 소설가 김별아는 화랑세기를 토대로 소설 <미실>을 출간했고,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도 미실이 등장한다.

실존 여부를 떠나 <화랑세기> 필사본이 전하는 미실을 들여다보자.

 

미실은 화랑세기에 궁주(宮主)라는 호칭이 붙는다. 미실궁주는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40년에 걸쳐 빼어난 미모로 숱한 사내들을 녹여내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어려서부터 할머니로부터 교태를 부리는 방법, 방중술을 배웠다고 한다.

미실의 외할머니는 1대 풍월주(風月主) 위화랑(魏花郞)의 장녀 옥진궁주(玉珍宮主), 법흥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미실의 어머니 묘도(妙道)를 낳았다. 묘도는 2대 풍월주 미진부(未珍夫)와 사이에서 미실을 낳았다.

미실이 공식적으로 결혼한 남편은 당대 최고 장군인 이사부(異斯夫)의 아들인 세종이다. 세종은 부인 미실의 복잡한 남자관계를 갖는데도 인내하며 지켜주었다.

미실의 모계는 전통적으로 색을 임금에게 바치는 색공지신(色供之臣)의 혈통이었다. <화랑세기> 미생랑 조에서 미실의 어머니 묘도는 우리 집은 대대로 색()을 바치는 신하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라고 했고, 딸인 미실도 색공지신이 됐다.

미실은 진흥왕과 그의 세자인 동륜태자, 그의 동생으로 나중에 진지왕이 되는 금륜태자,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등 세 명의 임금과 1명의 태자에게 색()을 바쳤다. 세종, 설화랑, 사다함은 물론 심지어 친동생인 미생 등 4명의 풍월주들을 색정의 포로로 만든다. 결혼한 아녀자의 몸으로 임신한 상태에서 임금에게 색공(성접대)을 바치고, 천하의 풍월주들이 그녀의 치마에서 허우적거렸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 고현정이 분한 미실 /MBC 캡쳐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 고현정이 분한 미실 /MBC 캡쳐

 

미실은 권력가의 아들과 정식결혼한다. 결혼 상대는 당대 최고 장군인 이사부와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이다.

<화랑세기>는 시어머니 지소태후가 미실을 며느리로 삼기 앞서 지아비인 이사부에 그 의향을 묻는 장면을 이렇게 서술한다.

 

지소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택해 궁중에 모아두고 세종공(아들)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했다.

태후는 진흥제()에게 묻기를 미실의 아름다운데, 전군(세종)에게 맞을 것 같습니까라고 했다. () 또한 아름답게 여겨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 입니다만, 태종(苔宗, 이사부) 노신이 알지 못해서라고 했다.

이에 태후는 태종(이사부)을 불렀다. 미실에 관해 의논하며,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일을 어찌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영실은 지소태후의 전남편이며, 진흥왕에게는 계부(繼父)가 된다.

이사부가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세종)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못할 뻔 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했다.”

 

지소태후가 전남편의 손녀딸을 며느리로 데려오는 문제를 남편 이사부와 의논하는 장면이다. 이때는 진흥왕이 임금이었다. 이사부의 아들인 세종은 진흥왕과 어머니가 같은 동복(同腹) 동생이었으므로, 궁에 거주했고, 지소태후는 미실을 며느리로 들일지 여부를 먼저 아들인 진흥왕과 의논한 후 지아비와 의논했다.

전남편의 손주 딸을 며느리로 삼는데 지아비에게 미안함이 있기에 지소태후는 골품으로는 신하이지만 지아비인 이사부에게 공손하게 물어본다.

 

미실은 이사부의 며느리로 들어와 곧바로 쫒겨 난다. 미실이 남편 세종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고 색사만 일삼다가 시어머니의 미움을 산 것이다.

 

지소태후는 미실을 (며느리로) 불러들인 것을 후회했다. 이에 미실을 불러 꾸짓기를 너로 하여 전군(세종)을 받들게 한 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色事)로 전군(세종)을 어지렵혔으니, 죄를 용서할수 없다고 하고 출궁을 명했다.“

 

지소태후는 미실을 쫓아내고 진종전군의 딸 융명을 정비로 삼았다.

 

궁에서 쫓겨난 미실은 제5세 풍월주 사다함과 사랑에 빠진다. 미실은 남자를 쥐락펴락했다.

사다함이 이사부를 따라 대가야 전투에 참전하게 된 후에, 남편 세종은 미실이 그리워 상심했다. 어머니 지소태후는 세종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다.

 

전군(세종)은 기뻐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지소태후는 마지못해 (미실로 하여금 세종을) 섬기도록 명했다. 이에 전군은 태후에게 청해 미실을 전군부인으로 삼고 융명을 차비(次妃)로 삼았다. 융명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 뜻을 비쳤다. 미실은 전군과 더불어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융명을 내쫓았다.”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출궁한후 사다함과 사귀다가 궁으로 다시 돌아와선 세종의 본처를 내쫓고 들어앉았고, 사다함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사다함이 대가야 공격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다시 세종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했다.

사다함이 지었다는 청조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 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이후 미실은 진흥왕의 색공을 바쳐 권력을 장악했으며 왕실과 화랑제도의 원화들을 두루 휘하에 두고 권력의 중심에 섰다.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즉위했으나, 미실이 농간을 부려 폐위시켰다. 진평왕이 즉위하자 미실은 그와 관계를 맺어 조정의 업무를 장악하다가 606(진평왕 28) 병사했다고 화랑세기는 기술했다.

믿거나, 말거나다. 정사인 <삼국사기>, 민간 야사가 많이 실려 있는 <삼국유사>에도 미실은 한줄도 언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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