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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유학시절, 박 대통령에게 제안…귀국후 제철소 기획, 일본과 협상 주도
한국산업화 설계자 김재관①…일관제철소 건설
2023. 05. 11 by 김현민 기자

 

1960년대와 70년대에 대한민국 중공업화에 김재관이란 인물이 있었다. 정주영과 박태준은 널리 알려지고 홍보되었지만 보이지 않은 곳에서 한국의 철강, 조선, 자동차산업을 기획하고 추진한 사람이 김재관이었다. 이런 숨은 공로자를 드러낸 책이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홍하상, 2022, 백년동안)이다.

김재관(金在官, 1932~2017)을 요약하면 1967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1호 유치과학자로 초청되어 공업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중화학공업 발전방안, 자동차산업 육성방안을 기획한 산업화 초기의 설계자였다. 오늘날 우리 경제의 기둥이 된 포스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책표지 /네이버책
책표지 /네이버책

 

김재관은 1933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재학 첫해에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해 학업을 계속했다. 대학시절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군 부대에 통역을 했다. 그가 통역일을 하던 부대에는 태평양을 건너온 중화기 집결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박격포, 장갑차, 탱크까지 모든 중화기를 꼼꼼히 관찰하면서 미군 중화기가 특수강으로 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이 때 특수강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이때의 인식이 서독에서 특수강을 전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후 한국산업은행 입사시험과 독일 정부 장학생 선발시험을 동시에 합격했다. 그런데 산업은행에서 유학 기간에도 월급을 주겠다고 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인재 양성 제도의 일환이었다. 이승만은 과학기술에 나라가 죽고 사는 게 달렸다는 사실을 절감해 기술자 우대를 위해 이런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19569월 김재관은 독일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뮌헨 공과대학에서 금속재료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독의 굴지의 철강회사 데마크(DEMAG) 철강 종합기획실에서 근무하며 혼자서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방안보고서를 작성했다.

그의 아이디어가 실행될 기회가 왔다. 196412월 박정희 대통령은 관료들을 이끌고 차관을 얻으러 독일을 방문했다. 1213일 박 대통령은 뮌헨의 한 호텔에 독일 유학생들을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김재관은 그동안 만든 철강공업 육성방안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건넸다.

대통령은 보고서의 제목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김재관이 말했다.

각하, 철강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이고,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 지금 당장은 할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제가 쓴 기획안입니다. 혹시라도 국가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대통령은 내심 놀랐다. 대통령은 철강산업이 공업회에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경제성과 기술성이 없다는 이유로 해외에서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종합제철소 계획안을 건넨 것이다. 대통령은 김재관에게 악수를 청하며 정말 고맙습니다. 내 돌아가서 꼭 제대로 된 철강회사를 만들겠습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1964년 12월 13일 뮌헨의 한 호텔에 유학생들과 조찬을 하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김재관박사기념관
1964년 12월 13일 뮌헨의 한 호텔에 유학생들과 조찬을 하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김재관박사기념관

 

19645월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했다. 워싱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미국측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댓가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최형섭 박사에게 KIST 인재 확보를 맡겼다. 해외에서 연구하는 기술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KIST 초대소장이 된 최형섭은 미국을 뒤지며 연구원 초빙에 나섰다. 그렇게 해서 18명의 책임연구원급이 임명되었다. 그들의 월급은 당시 서울대 교수 월급의 3배로 대통령 월급보다 많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받던 급여에 비하면 30%에 불과했다. 그들은 애국심 하나로 조국건설을 위해 귀국했던 것이다.

그때 유일하게 독일에서 공부한 공학자가 KIST에 돌아갔는데 김재관이었다. 다른 학자들은 모두 최형섭 박사가 선발하고 영입했지만 김재관 박사만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초빙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재관은 출국 11년만인 1967년 제1호 유치과학자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의 직책인 최형섭 소장 다음으로 중요한 제1연구부장이었다.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김재관이 귀국하기 전부터 추진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뜻으로 1966년에 KISA라는 국제차관단이 구성되었으나, 세계은행(IBRD)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이며 타당성이 없다고 평가를 내리면서 무산되었다.

자본도 기술도 없어 경제성이 없다는 제철소 건설을 김재관이 맡았다. 자료도 없었다. 그는 독일 데마크에서의 경험과 일본 산업화 과정을 근거로 103만톤의 조강능력을 갖춘 제철소 건설을 기획했다. 이 사업에는 외자 12,370만 달러와 내자 633억 원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당시 정부와 KIST에 김재관의 의견에 이의를 달 사삼이 없었다. 다만 자금이 문제였다. 그 돈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일본은 KISA 구성에 빠져 있었고, 한일회담에서 식민지 지배의 댓가로 청구권 자금을 주기로 약속한 터였다. 정부는 그 돈으로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일본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한국이 제철소를 만들면 자국 철강기업들과 경쟁하게 되므로, 일본측은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견제했다. 일본과의 기술협상에 김재관이 참여했다.

 

​김재관이 제안한 포항제철소 LD전로 /사진=김재관박사기념관​
​김재관이 제안한 포항제철소 LD전로 /사진=김재관박사기념관​

 

일본측은 한국이 최첨단방식의 고로를 만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이 연속주조가 되지 않은 소규모 독립 제강공장을 만들고, 이를 연결해 철강을 생산할 것을 권고했다. 이렇게 되면 철강생산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생산단가가 올라간다. 김재관은 철강강국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그는 일관제철소의 연속주조를 고집했다. 일본인들도 자신들보다 해박한 김재관의 반박을 해명하지 못하고, 그의 주장대로 연속주조가 가능한 일관제철소를 지어주겠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핫코일 제조장비를 연속주조 과정에서 빼버렸다. 김재관은 그들의 의도를 알아채고 따졌다. 일본인들은 연속주조는 아직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 한국과 같이 경험이 없는 나라에서 양산장비를 채택하기에는 매우 위험하고 경제성이 없어 뺐다고 둘러댔다. 이에 김재관은 연속주조는 이미 전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다며 독일의 티센·데마크, 미국 철강회사의 사례를 들었다. 일본 기술자들은 말문이 막혀 김재관의 말을 따라야 했다.

김재관은 나아가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LD전로 방식을 제안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발명된 방식인데 일본제철소에서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이었다. 이 방식을 채택하면 불순물 함유량을 줄여 양질의 강을 빠른 시간에 얻을수 있는데, 오히려 김재관이 일본 기술자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김재관이 나섰기 때문에 포항제철소에 최첨단 고로가 세워지게 되었다. 훗날 자동차, 조선의 원재료가 되는 강판과 후판을 생산할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포항제철소 기공식에 참석한 김재관 /사진=김재관박사기념관
포항제철소 기공식에 참석한 김재관 /사진=김재관박사기념관

 

김재관이 주도하는 바람이 한일기술협상이 우리측에게 유리하도록 마무리되고 한일양국은 대칠청구권자금을 포항제철소 건설에 투자하도록 합의했다. 196912월 김학렬 부총리와 가나야마 마사히데 주한 일본대사가 포항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한일간 합의서에 서명하고, 포항제철은 야마타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등 3사와 예비기술계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에 최초의 고로제철소가 건설되었다. [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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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길 2023-08-12 13:33:39
참 애국자 김재관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