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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 육성책, 조선산업, 자동차산업 기획…대한민국 표준시 설정
한국산업화 설계자 김재관②…중공업 육성
2023. 05. 12 by 김현민 기자

 

[에서 계속] 19681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123일에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피랍되었다. 그해 11월 울진과 삼척에 무장공비가 침투했다. 북한의 도발이 빈발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하루빨리 발전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중공업육성 시책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박 대통령은 김학렬 경제부총리에게 중공업 육성책을 맡겼다. 중공업은 원래 상공부 소관이었으나 당시 상공부는 경공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김학렬은 상공부의 관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경제기획원에서 직접 관장했다.

김학렬은 중공업 기반의 산업화를 주장해온 김재관 박사를 신뢰했다. 김학렬은 미국 터프츠 대학에 해리 최 박사를 영입해 김재관과 함께 KIST에 비밀작업반을 구성해 중공업 육성에 대한 용역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나온 보고서가 한국기계공업 육성방안이다.

KIST팀은 보고서에서 주물선공장, 특수강공장, 중기계공장, 대형조선소를 4대 핵심공업으로 지목했다. 4대 핵심공업은 군수산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주물선공장은 단조공장을 말하는데, 대포를 만드는 공정이었다. 특수강공장은 대포포신·탱크와 관련이 있었고. 중기계공장은 탱크·장갑차 제작을 전제로 한 것이다. 조선산업은 상선은 물론 전함도 만들기 위해서였다. 중공업 공장은 군수용만으로 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민수용을 겸해서 생산하도록 구상했다.

불모지나 다름 없는 한국에 중공업 공장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재관은 밤을 세워 기획했다. 그의 연구실에는 금속도면, 특수강 방정식, 메모조각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새벽 4시까지 일하다가 잠이 오면 책상에 앞드려 그 자리에서 쪽잠을 잤다. 출퇴근은 모두 생략하고 밥은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해결하거나 그럴 시간도 없을 때엔 다른 연구원이 식판에 밥을 담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중화학공업 4대 핵심공장의 구상이 그려졌다.

중공업 육성건설자금도 대일청구권 자금에서 마련했다. 그 다음은 이 공장을 누가 맡을 것인지였다. 종합기계공장으로 한국중공업이 국영업체로 출발했고, 주물선은 그 자체로 수지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포항종합제철에서 맡았다. 특수강공장도 국영기업으로 출발했으나, 정일권 국무총리가 개입해 삼미특수강으로 민영화되었다.

 

남은 것은 조선산업이었다. 조선산업에 어려운 점은 기술과 자금 조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수십만장의 후판을 잘라 용접을 해야 하는데, 용접을 잘못하면 선체에 물이 샌다. 국내에 조선소에 필요한 용접공이 절대 부족했다. 조선소 건설비용도 대안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훈철 박사가 나섰다. 그는 미시간 공대 시절의 동료교수였던 제임스 티스데일이 영국 조선소 애플도어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사실을 떠올렸다. 김훈철이 티스데일을 만났고 티스데일이 바클레이스 은행의 롱바텀 회장을 연결해 주었다. 영국조선업계는 당시 일본조선업계의 추격을 받았는데, 한국에 조선업을 육성시켜 일본을 견제한다는 구도를 갖고 있었다. 영국 조선소 애플도어가 한국 조선산업을 지원하겠다고 나왔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계획안, 설계도, 생산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 선박을 구매할 그리스 선주까지 마련되었는데 배를 지을 기업을 찾지 못했다. 정작 사업을 추진할 대기업 회장들이 모두 참여를 포기했다. 오직 한사람, 현대그룹의 정주용 회장만이 참여의사를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섰다. 박 대통령은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조선은 선박 설계, 구조공학, 금속재료, 엔진 등 다양한 요소들이 모인 거대한 산업인데, 우리 힘으로 과연 배를 만들 수 있겠소?“ 정주영 회장은 대통령을 만나기 앞서 김재관과 김훈철의 설명을 들었다. 정주영은 잘 들어보니 배를 건조하는 것은 물 위에 아파트를 짓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파안대소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정주영이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정주영 회장이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상공부 차관보 시절 /김재관박사기념회 홈페이지
상공부 차관보 시절 /김재관박사기념회 홈페이지

 

1972년 김재관은 국방과학연구소(ADD) 부소장을 발령받았다. 미국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 더 이상 국지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직후였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에게 미사일 개발을 극비에 지시했다. 김재관은 번개사업과 율곡사업을 추진했고, 번개사업에서 개발된 것이 대한민국의 미사일이다.

ADD에 근무한지 1년도 안된 1973년초 김재관은 상공부 중공업 차관보로 발령이 났다. 당시 북한의 중공업이 남한을 앞섰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없던 자리를 만들어 김재관을 꽂아 넣은 것이다.

상공부 차관보 김재관은 자동차공업 육성시책을 추진했다. 자동차 산업은 김재관이 KIST 시절부터 육성을 주장하던 산업이다. 김재관은 자동차 산업을 철강 다음으로 중요한 산업으로 생각했다. 자동차는 연관산업과 고용효과가 큰 산업이다. 차관보가 되기 3년전인 1970년 그는 혼자서 표준형 차체 개발사업 기획서를 준비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보고서는 기계공업육성방안에서 제외되었다. 이유는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김재관과 막역했던 김훈철도 반대할 정도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자동차 회사가 있었다. 피아트와 기술제휴한 아세아 자동차, 포드와 손잡은 현대자동차, GM코리아, 가솔린엔진 제작사로서 자동차회사를 꿈꾸던 기아산업 등이 있었다. 하지만 국내업체들은 엔진, 트랜스미션, 악셀레이터 등 주요 부품을 해외에서 고가로 수입했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이 떨어졌다. 다국적 자동차 기업은 국내생산 모델의 해외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국내 자동차회사들은 내수에만 의존했다.

상공부 차관보로서 정책을 추진할 입장에 있었던 김재관은 자동차산업을 다시 밀어붙였다. 그는 3년전에 만들었던 기획안을 다시 꺼냈다. 국산모델을 개발해 국산화율을 높이고, 해외에 수출하야 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김재관 차관보가 장기자동차진흥계획을 꺼내들자 이번엔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이 반대했다. 오원철은 자동차산업이 시기상조라고 했다. 김재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신청했다. 이는 상급자인 오원철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독대는 성사되었다. 김재관은 고유모델 자동차 정책의 추진, 산업 파급효과 등을 설명하며 대통령의 이해를 구했다. 박 대통령은 수개월 고민한 끝에 김재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김재관과 오원철은 멀어졌다고 한다.

 

김재관의 고유모델 자동차 정책으로 시작된 포니1 /김재관박사기념회 홈페이지
김재관의 고유모델 자동차 정책으로 시작된 포니1 /김재관박사기념회 홈페이지

 

19736월 김재관이 마련한 자동차공업 육성 5개년 계획이 청와대 회의에서 채택했다. 이제 고유모델 자동차를 생산할 업체를 찾았다. 아세아자동차, GM코리아, 기아산업이 상공부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 회사들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수요가 3만대도 안되는 시점에 고유모델은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GM코리아는 독일 오펠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판매할 것을 선언했고, 기아는 일본 부품을 수입해 브리사를 조립하는데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현대자동차였다. 1973년 어느날, 김재관은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불렀다. 김재관은 정세영에게 8층 창가로 데려가 이렇게 말했다. ”정 사장, 저 창밖의 차를 보시오. 거의 대부분이 일본산 차입니다. 거리를 메우고 있는 일본산 자동차를 국산차로 몽땅 바꿀수 있도록 정 사장이 나서야 합니다.“

정세영은 하루의 말미를 달라며 돌아가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현대차 간부들 모두가 고유모델에 반대했다. ”고유모델은 불가합니다. 현재 코티나를 조립하고 있는데 조립도면조차 카피를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고유모델을 설계한다는 것입니까.“

정세영은 형 정주영과 상의했다. 정주영도 당시 조선소를 만드는 것도 박찬데 자동차까지 할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다음날 정주영·세영 형제가 김재관을 찾아왔다. 김재관이 말문을 열었다. ”정주영 회장께서 우리의 숙원사업이었던 조선을 시작했으니, 정사장이 우리 고유 자동차를 만들어 내야 하질 않겠소.“

이날 만남에서 정주영은 차관보님,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해보겠습니다고 대답했다고, 김재관의 전기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p179)에 쓰여 있다. 이렇게 해서 현대자동차는 최초 고유모델 국민차 포니’(PONY)를 개발하고 생산하게 된다.

 

한국표준연구소장 시절(1975. 12. 17) /김재관박사기념회 홈페이지
한국표준연구소장 시절(1975. 12. 17) /김재관박사기념회 홈페이지

 

상공부 차관보를 거쳐 김재관은 19747월 신설된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표준연구소 소장으로 대한민국 시간 독립을 이뤄 냈다. 지금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홈페이지를 열면 첫 화면에 대한민국 표준시가 나오는데, 이는 김재관의 업적이다.

김재관은 선진국다운 표준제도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는 헌법에 표준제도를 명문화하려 했다. 5공화국 헌법부터 현행 헌법까지 이어지는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127 2)라는 조항은 그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1980년 김재관은 신군부에 의해 공직에서 물러났다. 48세였다. 그는 곧바로 인천대학에서 기계공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교수 시절에 그는 구한말 재정고문으로 일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재조명하는 책을 내기도 했다. 김재관은 20171225일 서울대 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8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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