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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시오, 고니시에 의해 일본에 보내져 세례…세스페데스 신부도 조선 방문
임진왜란 때 최초 카톨릭 신자 된 조선인
2023. 05. 24 by 김현민 기자

 

임진왜란의 왜장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받았고 조선정벌에 참여한 아리마주, 오무라주, 야마쿠사주, 대마도의 도주들도 천주교 신자였다. 특히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고니시의 딸 마리아(세례명)와 결혼했다.

 

고니시의 진영에 조선인 포로들이 많았다. 고니시는 그중 소년 2명을 딸 마리아에게 맡겼다. (W.E. 그리피스는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마리아를 고니시의 아내라고 서술했다. 국내에선 마리아를 고니시의 딸로 소 요시토시의 아내로 본다.) 마리아는 고니시가 보내온 조선 아이 둘을 자기의 신앙에 따라 가르쳤다.

두 아이 중 큰 아이는 나이 13세로 아버지는 조선의 관리였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면서 어린 자식을 은신처에 숨겨두었으나 어린 아들은 은신처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를 구경하다 고니시 군에 포로로 잡히게 된 것이다.

마리아는 큰 아이를 교토이 있는 제주이트학교에 보냈다. 이 아이는 학교를 다니면서 성장했고, 1603년에 빈첸시오(Vincentio)라는 세례명으로 신자가 되었다. 제주이트 교단의 기록에 그의 이름이 ‘Caun’으로 나타나는데, 그의 성씨가 권씨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권 빈첸시오는 조선인 최초의 카톨릭 신자였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빈첸시오는 나가사키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문답을 하면서 종교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33세가 되던 해에 제주이트 교단은 그를 조선에 파견하려고 했다. 그 무렵엔 일본에선 권력이 도쿠가와 막부로 넘어가 종교박해를 강화하던 때였다. 제주이트교단은 빈첸시오를 조선으로 직접 파견하지 못하고 베이징으로 가서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베이징에 온 빈첸시오는 4년을 머물면서 조선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전쟁후 명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를 차지한 후금(후에 청)이 그의 조선 입국을 방해하는 바람에 빈첸시오는 조선에 들어가지 못했다. 1620년 빈첸시오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몰래 선교활동을 하다가 도쿠가와 막부에 체포되어 16254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빈첸시오는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로서, 일본의 순교 복자 205위 가운데 한국 사람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진해 세스페데스 공원 /창원시 블로그
진해 세스페데스 공원 /창원시 블로그

 

한편 왜장 고니시는 평양성까지 진격했다가 명군의 참전과 조선의병들의 궐기에 후퇴한 후에 경남 창원의 곰내(웅천)에 진지를 틀고 부대를 주둔시켰다. 초기 침공 때 의기양양하던 기세도 꺾였고, 병사들은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일본에 있는 제주이트 교단에 편지를 보내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교단은 스페인 출신의 그리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와 푸탄 에이온(Eion)이라는 신부를 붙여 조선에 파견했다. 15931227일 세스페데스는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부산에 도착, 조선을 밟았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두 스페인 신부는 1594년 이른 봄에 고니시의 사령부가 있는 곰내에 이르렀다. 두 성직자는 천주교 신자인 왜병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들은 이 성에서 저 성으로, 이 막사에서 저 막사로 다니며 찬송가를 부르고 병사들에게 설교를 하고 신앙고백을 받고 십자가의 성호를 그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두 신부는 왜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세스페데스 일행은 1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고니시는 스페인 신부의 조선 방문 사실을 비밀리에 부쳤다. 하지만 독실한 불교 신도이자 고니시의 경쟁자였던 가토 기요마사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토는 고니시가 역모를 꾸몄으며, 제주이트 교단이 그 배후에 있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모함했다. 히데요시가 카톨릭을 제거하려고 하던 차에 가토의 고자질이 알려지자, 고니시는 히데요시를 찾아 반역을 한 적이 없다고 극구 변명해야 했다. 히데요시는 모른척 하고 고니시의 변명을 들어주었고, 세스페데스도 위기를 넘길수 있었다.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왔을 때 조선인들을 만나 포교를 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다만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조선인 포로를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창원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조선에 파견되었던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를 기려 세스페데스 공원을 조성했다.

 
진해 세스페데스 공원 스페인 광장 /창원시 블로그
진해 세스페데스 공원 스페인 광장 /창원시 블로그

 

한편 빈첸치오와 별도로 도미니크 교단은 조선으로 신부를 파견해 선교활동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1618년 스페인인 후앙 드 세인트 도미니크(Juan de saint Domimique)이 조선에 파견될 선교사로 뽑혔다. 그는 조선어를 습득하며 교단의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조선에 들어갈 배를 띄웠다. 하지만 알수 없는 이유로 그들은 조선에 상륙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그들은 이듬해인 1619년 도쿠가와 막부의 박해를 받아 옥사했다. 이로써 임진왜란 직후에 추진된 카톨릭의 조선 선교는 중단되었다.

 


<참고자료>

권 빈첸시오 - 조국의 복음 전파에 힘썼던 최초의 예수회 수사

W.E.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 집문당, 신복룡 역주

Wikipedia, Gregorio Céspe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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