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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베히스툰 비문의 언어비교 통해 쐐기문자 판독에 성공
헨리 롤린슨, 쐐기문자 해독하다
2023. 06. 03 by 김현민 기자

 

영국인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 1810~1895)17살에 페르시아어를 능숙하게 소통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비문에도 관심이 있었고,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에도 호기심이 컸다. 당시 독일의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 프랑스의 안트완-쟌 생 마텡 등의 학자들이 쐐기문자 해독에 나서 극히 일부만이 해독되었을 뿐이다.

헨리 롤린슨 /위키피디아
헨리 롤린슨 /위키피디아

 

롤린슨은 동인도회사 장교로 배속되어 페르시아에 파견되었다. 페르시아의 샤()은 군대를 유럽식을 개편하기 위해 영국에 교관을 요청했는데, 롤린슨이 적격이었다. 1836년 그는 이란 서부 케르만샤에 배치되어, 그곳에서 2년 근무했다. 그의 주둔지 근처에는 그 유명한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이 있었다. 어느 날 현지 안내원이 그를 데리고 가 그 비문을 보여주었다. 롤린슨은 비문을 보고 감탄하고, 저 방대한 비문을 해독하고 싶었다.

그 비문은 영토를 그리스까지 넓힌 다리우스 대왕(Darius the Great, 재위 BC 522~486)이 자신의 업적을 새겨놓은 것이다. 높이 13m, 24m에 이르렀다. 바위에 새겨진 부조에는 아후라마즈다신()에게 항복한 9명의 왕이 다리우스 대왕 앞에 줄지어 서 있는 그림이 있고, 이 군상 아래에는 고대 페르시아어·엘람어·아카드어 3가지 언어로 쓰여 있었다.

롤린슨은 일단 암벽에 파인 이상한 글자의 탁본을 뜨기로 했다. 롤린슨은 몸소 산꼭대기에 로프를 걸고 벼랑에 매달리고, 현지인 여럿을 고용해 자신을 돕게 했다. 쿠르드족 소년이 절벽에 접근해 구석구석 비문의 탁본을 떴다. 이렇게 해서 거의 완벽하게 탁본을 뜨고, 그 사본을 유럽에 보냈다.

비문은 모두 쐐기문자(설형문자)로 쓰여 있으며, 414열이었다. 롤린슨은 자신도 틈만 나면 탁본을 보며 비문을 해독하려 애를 썼다. 그는 페르시아어를 배웠다. 고대 페르시아어도 현대 페르시아어와 상당부분 일치했다. 비문의 고대 페르시아어가 해독되면서 메소포타미어어인 엘람어와 아카드어가 풀리기 시작했다. 10년간의 연구 끝에 1846년 그는 아카드 비문 해독에 성공했다.

 

롤린슨의 해독은 세계 최초의 설형문자 해독으로 평가받았고, 그의 연구는 고대 설형문자 연구의 단초가 되었다. 이 비문의 발견과 해독으로 인해 세계 최초의 통일 제국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면모가 드러나고 이 제국의 교류상도 알려지게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는 광개토왕비문처럼 다리우스 통치시대의 판도와 반란 진압에 관한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롤린슨의 노력 덕분에 메소포타미아 고대문명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고대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수메르 시장의 모습과 장사치들의 얘기, 아시리아 왕의 포고, 바빌로니아의 논쟁 등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 /위키피디아
베히스툰 비문 /위키피디아

 

롤린슨은 1843년 바그다드 주재 영국영사가 되었으며, 1851년 총영사가 되어 고대 페르시아의 조각품을 수집했다. 이어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다가 1855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동인도회사의 명예이사가 되었다. 그 후 하원의원을 지냈으며(1858, 1865~1868), 1859년 이란 궁정주재 공사가 되었다. 준남작(Baronet)의 칭호도 받았다.

저서로는 바빌로니아 및 아시리아 설형문자 비문 주해’, ‘아시리아사 개설등이 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아시리아 전공자가 되었다. 종합적으로 그는 동양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Sir Henry Rawlinson, 1st Baronet

Wikipedia, Behistun In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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