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무역의 시대
슈인센 제도 폐기…포르투갈 밀어내고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만 허용
도쿠가와 막부, 카톨릭 막기 위해 쇄국정책
2019. 07. 18 by 김현민 기자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에 일본에 슈인센(朱印船)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막부(幕府)가 붉은 도장(朱印)을 찍은 허가장을 받은 선박 한해 동남아시아 각지에 통상하도록 허가하는 일종의 관인(官認) 무역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한 이후 1588년 해안에 호족 성격을 띠었던 해적(왜구) 활동을 금지시키고(해적금지령), 1592년부터 슈인죠(朱印状)을 발부해 무역선을 띄웠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으로 유야무야되다가 도요토미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일본을 재통일 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1600년 도쿠가와 막부는 규슈 해안에 표착한 네덜란드 선의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와 네덜란드인 얀 요스덴(Jan Joosten)을 고문으로 채용해 갤리온선을 건조시켰다. 막부는 1601년 이후 베트남(安南), 스페인령 마닐라, 베트남 남부의 참파, 캄보디아, 태국(아유타야 왕조), 말레이 반도의 파타니(Pattani) 등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604년에 슈인(朱印) 제도를 본격화했다. 이 제도는 1635년까지 실시되었는데, 이때까지 350척의 선박이 허가장을 받아 외국과 무역을 했다.

슈인센은 나가사키에서 출항하고 나가사키로 돌아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당시 명()나라는 해금정책으로 일본 배의 내항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령 마카오와 네덜란드령 젤란디아(대만) 항을 통해 중국과 무역을 했고, 조선과의 무역은 쓰시마 번에 무역을 일임했기 때문에 슈인장이 발행되지 않았다.

 

슈인센 /위키피디아
슈인센 /위키피디아

 

선장은 일본인이었지만, 항해사 가운데에는 중국인 포르투갈인, 네덜린드인, 영국인 등이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고, 일반 선원 가운데 외국인도 많이 채용되었다.

슈인센 무역으로 동남아시아로 이주해 정착하는 일본인도 증가해, 한때 10만명에 이르렀으며 일본인 마을을 형성하고 자치를 시행하기도 했다. 동남아의 일본인 마을은 아비라(대만), 산미겔, 루손(필리핀), 아유타야(태국), 프놈펜(캄보디아) 등에 형성되었는데, 아유타야와 프놈펜이 유명했다. 작은 마을에는 200~300명이, 큰 곳에는 수천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와 같이 태국 국왕으로부터 중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주수입품은 중국산 생사와 비단이었다. 일본에서도 비단이 생산되었지만 중국산에 비해 질이 떨어졌고, 일본 열도애 평화가 찾아오자 해외 고급제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 중국산 비단의 수입량도 크게 늘었다. 명나라는 조일전쟁(임진왜란)에 대한 적대감으로 중국 배의 일본 입항도 금지했지만, 중국 배는 몰래 일본을 찾기도 하고, 3국에서 일본 슈인센과 만나 거래를 했다. 비단 이외에도 무기에 사용되는 상어가죽과 사슴가죽, 설탕 등이 동남아에서 수입되었다.

일본의 수출품은 은, 구리, 동전, 유황, 칼 등 공예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중국은 은본위제를 채택해 은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슈인센이 가져오는 일본산 은이 중국 상인을 통해 명나라로 유입되었다. 배트남에는 일본 동전도 수출되었다.

슈인센은 대체로 500~700톤급으로 당시로선 대형선이었는데, 배 한척에 200명의 선원이 승선했다. 지금까지 기록이 남아 있는 슈인센 15척의 평균 승선인원은 236명이다. 슈인선이 반성하던 시기에 일본은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에서 대량의 선박을 주문, 수입했는데, 아유타야 배는 목재 재질이 좋고 조선기술도 우수했다고 한다.

 

슈인센 교역항로 /위키피디아
슈인센 교역항로 /위키피디아

 

하지만 1620년대에 접어들면서 슈인센이 동남아의 지역 분쟁에 휘말리는 사건이 빈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서 향료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암본 사건이다. 이 사건에 일본인이 간여해 사형되기도 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슈인센을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카톨릭 선교사들이 슈인센을 타고 일본에 건너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밀항해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카톨릭 선교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막부는 더 이상 허용할수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2대 쇼군 히데타다(徳川秀忠)가 죽고 3대 이에미쓰(徳川家光)가 친정하면서 막부는 동남아 무역 거점인 나가사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633년 도쿠가와 막부는 1차 쇄국령을 내려 허가장 발급을 까탈스럽게 하고, 동남아에 5년이상 거주한 일본인의 귀국을 금지했다. 1635년에 막부는 모든 일본인에게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도항과 귀국을 전면금지했다. 그 결과 슈인센 제도는 막을 내렸다.

이 조치는 17세기초에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어부지리가 돌아갔다. 네덜란드는 잠재적 경쟁자의 포기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고,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 상관의 독점권도 얻게 되었다.

 

데지마 /위키피디아
데지마 /위키피디아

 

그러면 도쿠가와 막부는 슈인센 제도를 폐지하고 쇄국 정책을 폈을까.

도쿠가와 막부에 끝까지 저항한 사쓰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조슈(長州)의 모리(毛利), 히고(肥後)의 호소카와(細川), 가가(加賀)의 마에다(前田)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현재 구마모토(熊本)의 히고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근거지로, 도쿠가와 이야야스에 맞섰던 곳이다. 당시 규슈의 많은 다이묘들은 카톨릭이었다. 고니시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카톨릭 병사를 투입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가문은 슈인센 제도가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많은 이득을 가져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카톨릭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게 규슈의 다이묘들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따라서 카톨릭을 금지한다는 명분으로 교역도 막았던 것이다.

 

일본의 천주교 역사는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르(Saint Francis Xavier: 1506~1552)1549년 가고시마에 상륙해 전파한 것이 시초다. 1570~1580년이 일본 천주교의 전성기로, 1570년에 약 3만명, 1579년에 10만명, 1582년에 15만명, 1587년에 20만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탄압이 시작됐다. 일본 천주교가 중앙 정부의 박해를 받은 시기는 대개 1587년부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 초기에는 천주교도 보호 정책을 썼지만 15876월 천주교를 사교로 판정하고 금교령을 내렸다. 천주교 세력에 의한 정치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도요토미에 이어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는 초기에 불안한 상태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초기에 선교사들을 환영했지만, 이내 탄압으로 돌아섰고, 결국 천주교를 탄압하는 명분으로 쇄국 정책을 단항하게 되었다. 음지에 숨어 믿음을 이어가다 발각된 신자들은 배교를 강요당했고, 거절할 시 고문을 당하며 고통 속에 죽어갔다.

 

나가사키 항과 데지마를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나가사키 항과 데지마를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단행하면서도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 한곳만 열어놓았다.

데지마는 120m×75m에 면적 9,000의 부채꼴 모양 인공섬이다.

쇄국 조치가 전개되던 1634년 포르투갈 상인을 가두기 위해 건설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처음에 규슈 북서쪽 히라도(平戸)에 상관을 설치했지만, 무역의 중심지인 나가사키로 옮기고 싶어 했다. 그 무렵 나가시키의 다이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며 포르투갈의 상관을 나가사키로 옮기도록 했다.

1634년 도쿠가와 막부 3대 쇼군 이에미쓰는 카톨릭교도인 포르투갈인을 관리하기 위해 나가사키 해변에 인공섬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인공섬 건설은 2년이 걸렸는데, 건설비는 나가사키의 유력자들이 출자해서 모금토록 했으며, 포르투갈은 토지사용료로 매년 일정액을 지불하도록 했다.

1638년에 시마바라(島原) 반도와 아마쿠사(天草) 제도에서 카톨릭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시마바라의 난), 막부는 카톨릭 교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고, 막부와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악화했다. 데지마는 완공되었지만, 무인 상태가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카톨릭을 전파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막부는 1641년에 히라도에 상관을 개설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 데지마로 상관을 옮기게 했다. 이후 1854년까지 데지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1633년에 취한 쇄국정책은 1853년에 미국의 페리호가 내항할 때까지 220년간 이어진다. 하지만 데지마라는 조그마한 지역만은 개방구로 남겨두어 그곳을 통해 일본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이 좁은 인공섬에서 들어온 네덜란드 문화가 난학(蘭學, 란가쿠)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여인 (1800년 그림) /위키피디아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여인 (1800년 그림) /위키피디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