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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모라토리엄 위기, 한국 채권 정크본드로 전락…결국 세 후보 모두 IMF 조건에 동의
[1997 국가부도⑤] DJ, IMF 재협상 주장
2019. 07. 21 by 김현민 기자

 

한국 대선이 19971218일로 다가왔다.

IMF500억 달러 이상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그 지원 프로그램만으로 한국을 모라토리엄(moratorium, 채권 지불유예)의 위기에서 구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미국 재무부는 고민에 빠졌다. 미국 행정부는 멕시코 금융위기 이후 스스로 세운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해야 했다.

재무부는 한국에 대해 두 가지 선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모라토리엄의 상황까지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에 있었던 중남미식 외채 상환방식이었다. 그래서 재무부 관리들은 1980년대의 사례를 들춰보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재무부를 들락거리던 한국측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 재무부는 한국을 시범케이스로 삼아 국제사회에 본때를 보여주려고 생각했습니다. 모라토리엄으로 가서 다시 외채 만기를 연장하는 방안을 생각했었습니다. 한국이 도와달라고 하소연했지만, 워싱턴의 재무부는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IMF는 착각하고 있었다. 스탠리 피셔(Stanley Fischer) 부총재는 다소의 딸꾹질(hiccup)이 몇 번 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위기는 지나갔다.”고 말했다. IMF는 한국금융시장이 다소 흔들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것으로 보았다.

 

이런 와중에 한국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IMF와의 재협상론을 들고 나왔다. 당연한 주장이지만, 국제 자본시장은 차기대통령으로 유력시되고 있던 후보의 주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210,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신인도를 A3에서 Baa2로 두 단계 하향 조정했고, 산업은행이 추진해온 20억 달러의 글로벌 본드 발행이 무산됐다. 한국 채권은 국제시장에서 사실상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선진국 은행들은 한국에 대한 신규 크레딧 라인을 거의 끊고 모라토리엄에 대비했다.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의 모라토리엄을 기정사실로 상정했다.

 

미국 정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를 보자. 1)

한국이 붕괴되면 아시아와 개도국에 새로운 금융위기를 촉발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투자자, 정부관리들은 한국 혼자만 무너지는 것으로 그칠 것이며, (그 파장이 한국) 국경을 넘어 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 한국이 완전히 무너져도 미국 경제와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는 조금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피터 케넨(Peter Kenen) 교수(국제금융)는 듣기 거북한 말까지 하며 한국을 공격했다.

한국을 도와주고 있는 IMF 구제금융의 플러그를 뽑아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구제금융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다른 이머징 마켓에 보여주어야 한다.”

얼마나 무식한 발언인가. 미국 명문대 교수가 한나라의 운명을 이렇게 함부로 말해도 된단 말인가. 워싱턴포스트란 신문도 이런 사람의 코멘트를 여과 없이 보도했다. 미국의 대학교수, 언론이 한통속이 돼서 한국을 죽이는데 나섰던 것이다.

 

당시 미국 언론들이 한국을 표현하는 방식은 지나칠 정도였다. 한국 관리들을 그 녀석들(these guys)이라고 표현하면 그래도 점잖은 편이고, 사기꾼들(crooks)이란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월가의 전문가들은 한국을 이미 포기했고, “한국은 사실상 부도상태라고 말했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미국의 학자들도 모리토리엄을 권고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국제경제 연구소(IIE) 프레드 버그스텐(Fred Bergsten) 소장은 한국의 파산은 필연적이며, 외채를 리스케줄링(구조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외채에 대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것을 주장했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투표현장 /국가기록원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투표현장 /국가기록원

 

한국 정치인들은 벼랑에 가서야 타협을 한다. 모라토리엄에 임박하자 한나라당 이회창, 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등 3당 대통령 후보는 선거를 닷새 앞둔 13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서 IMF와의 합의사항을 준수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원화 환율은 계속 떨어져 1달러당 1,800원대까지 떨어졌고, 한국 정부는 마침내 121610%로 묶었던 환율변동폭(밴드)을 완전 해제했다. 더 이상 환율 방어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니 선거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정부는 김만제 포철 회장과 정인용 전 부총리를 미국에 급파했다. 모두 10년전에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뉴욕 월가의 유수 은행들과 워싱턴을 방문, 미국 재무부와 IMF를 방문했다. 그러나 루빈 장관은 이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휴가를 떠났다는 이유였다.

경제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들은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구가 진짜 친구”(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며 호소했다. 경제 특사들은 감정적 호소만 했을 뿐 한국 경제에 대한 장단기 전략을 밝히지 못했다. 정권이 며칠 후에 바뀌는데 어떻게 전략을 이야기하겠는가.

사절단은 오히려 월가 은행들로부터 좋은 공부를 하고 갔다. 월가 은행들은 단기외채 극복방안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책을 만들 것 기업과 은행이 부도났을 경우 정부가 개입하지 말 것 정부 주도의 성장 전략에서 시장 원리가 지배하는 경제로 전환할 것 외국 금융기관의 진출을 허용하고 선진 금융기법을 배울 것 등을 한국 특사들에게 가르쳤다.

 

김기환 순회대사도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미 재무부를 방문했을 뿐 재무부 청사에서 네 블록 떨어진 IMF는 지나쳤다. 김대사는 IMF 자금을 조기 지원해달라고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부장관에게 호소했다. 그는 IMF가 추가지원을 하면 이왕의 합의에서 한걸음 더나간 개혁을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이른바 IMF 플러스였다. 2)

 

미국 심장부의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제 외교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고위정치권 내부에서 한국을 방치할 수 없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 이틀전인 16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은 필요한 경우 일본 및 다른 나라와 함께 지원 능력을 갖추고 한국을 지원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대한 추가지원여부와 관련, “미국은 이미 수립된 기본틀(IMF 이행협정) 내에서 보다 많은 것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선거가 끝나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 발언이었다. 클린턴의 발언은 한국 시장을 일시적으로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1) Washington Post, 971211What if Seoul Defaults?

2) WSJ, 9832S. Korea played the reluctant patient to IMF rescue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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