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기
8세기 중국과 티베트, 아랍이 펼치는 서역 영토 전쟁에서 주도권 장악
고구려 후손 고선지, 파미르를 넘다
2019. 07. 25 by 김현민 기자

 

헝가리 태생 영국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은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원정로를 답사한 적이 있다. 그는 고선지의 원정은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업적을 뛰어넘는다고 감탄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나폴레옹은 해발 2,000m의 알프스를 넘었지만, 고선지는 해발 4,000m의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오렐 스타인은 중앙아시아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한 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8세기에 중앙아시아를 놓고 대회전을 벌인 당나라 장수 고선지를 연구했다.

고선지(?~755) 장군은 고구려가 망하고 당()나라에 끌려간 유민의 후손으로, 서역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부친은 고사계(高舎鶏), 하서군(河西軍)에 종군했으며 이후 서역(西域)4(四鎭)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고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선지는 어린 시절을 장안에서 서역으로 가는 길목인 양주(凉州, 지금의 감숙성 무위)에서 살았다. 고구려 유민들이 수만리 사막지대까지 쫓겨났던 것이다.

734년 고선지는 당 조정의 명령을 받은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쿠차(龜玆 또는 庫車)로 향했다. 그곳은 안서도호부가 위치해 있었다. 쿠차성은 옛 구자국(龜玆國)으로,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이 만든 오아시스 도시였다. 북쪽으로는 투르크족의 국가들, 서쪽으로는 서역국가들, 남쪽으로는 티베트가 경계하는 당나라의 서부 최전선 군사기지였다.

안서도호부에 배치된 고선지는 하급장교 시절인 739, 당군을 따라 서돌궐의 한 갈래인 튀르기시를 정벌하기 위해 쇄엽성(碎葉城)과 탈라스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탈라스성을 점령했다. 당시 안서절도사는 강족(羌族) 계열의 부몽영찰(夫蒙靈詧)이었다.

이후 고선지는 안서도호부의 2인자인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로 고속 승진한다.

 

고선지 원정로 /그래픽=김현민
고선지 원정로 /그래픽=김현민

 

그 무렵 지금의 파키스탄 북쪽 산악지대에 소발률(小勃律, Gilgit)이라는 작은 왕국이 있었다. 740년 이 왕국의 국왕은 티베트 국왕의 초청을 받아 티베트(吐藩)를 방문했다. 티베트 국왕은 자신의 딸을 소발률 국왕에게 주어 부인으로 맞게 했다. 이른바 결혼동맹이다.

티베트는 당시 국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소발률국 동남쪽에 있는 대발률(Baltisan)을 공격해 굴복시키고, 소발률국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파미르고원과 히말라야, 힌두쿠시 산맥 기슭에 자리잡은 이런 소국들이 티베트에 넘어간다고 당나라의 위세가 크게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작은 나라들이 당을 배반하면서 서역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당나라에 등을 돌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미 서쪽에선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가 동진해오고, 남쪽 고원지대엔 티베트가 당나라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 현종은 안서절도사에게 소발률국의 제압을 명했다. 안서절도사가 정벌에 나섰지만 티베트군에 패배했다. 전인완, 개가운, 부몽영찰등 안서절도사들이 연이어 모두 패했다. 티베트군이 강하기도 했지만 당군이 산악 전투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때 당 현종(玄宗)은 고선지를 선택했다. 현종은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라는 임시절도사직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을 합쳐 1만명을 주었다. 임시절도사라도 고선지는 군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절도사가 된 것이다.

쿠차에서 소발률국으로 가려면 파미르고원을 넘어야 했다.

파미르고원. 해발고도 4,000m가 넘는 고지대다. 알프스가 유럽 중앙을 가로막고 있다면, 파미르는 중앙아시아를 가로막고 있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린다. 힌두쿠시 산맥과 천산산맥, 히말라야 산맥이 여기서 뻗어 나간다. 이 고원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동과 서, 남과 북이 갈라진다.

서기 747, 고선지는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에서 일단 서쪽으로 향했다. 오아시스 도시 발환성(拔換城), 악슬덕(握瑟德)을 거쳐 소륵(疏勒)에 도착했다. 지금 신강성 지역인 소륵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방향을 남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파미르의 북쪽 중국측 고을인 총령수착(蔥嶺守捉)에 도착했다.

 

파미르 고원 /위키피디아
파미르 고원 /위키피디아

 

이제부터는 여름에도 얼음이 뒤덥혀 있는 만년설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야 했다. 고산병이 병사들을 괴롭혔다.

고선지군은 고생 끝에 파미르를 넘었다. 고원을 넘어 연운보(連雲堡)라는 소발률국의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가파른 산성으로, 높은 암벽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아래는 질퍽거리는 습지였고, 곳곳에 목책이 쳐져 있었다. 가뜩이나 우기였다.

티베트군은 고선지의 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고선지는 장수들에게 정예 병마를 선발토록 하고, 1인당 3일치의 식량만 지니도록 했다. 그리고 712일 진시(辰時, 오전 7~9)까지 연운보에 도착하라고 명령했다. 밤을 새워 기습작전을 펼치려는 작전이었다.

고선지 군대는 밤중에 강을 건넜는데, 구당서에는 그 강을 신도하(信圖河)라고 했다. 인더스강 지류의 상류쯤으로 파악된다.

고선지의 기습은 성공했다. 당군은 당황한 티베트군을 포뢰로 제압했다. 예상치 못한 새벽 시간에 당나라 군대가 기습해왔기 때문에 티베트군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전투는 오전 중에 끝났다. 불과 두어 시간만에 1만여명의 티베트군 가운데 5,000여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도망쳤다.

고선지군은 곧이어 소발률국 수도로 진군했다. 연운보에서 소발률국 사이에는 탄구령(坦駒嶺 , Darkot)이라는 해발 3,800m의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개를 넘은 당나라 장수는 이전에는 없었다. 만년설이 뒤덮힌 힌두쿠시 산맥의 지맥을 넘어야 했다. 나폴레옹이 넘었던 알프스의 높이가 2,000m였는데, 그보다 두배나 높았다. 소발률국과 티베트는 설마 당군이 저 높은 고개를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내려가는 길의 계곡은 발을 잘못 디디면 수천길의 낭떠러지에 추락하는 험한 길이었다.

하지만 고선지는 그 험한 고개를 넘었다. 소발률국 수도에 당군이 나타나자 수령과 군대, 백성들이 산으로 달아났다. 국왕과 티베트 공주는 높은 곳에 뚫어 놓은 석굴로 도망갔다.

고선지는 그곳과 티베트를 연결하는 다리를 끊어버렸다. 계곡이 워낙 험준해 티베트군이 다리를 놓으려면 1년 이상 걸린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소발률국 국왕 소실리(蘇失利)와 왕비는 석굴에서 나와 항복했다.

고선지는 앞서 세 절도사가 근접하지 못한 소발률국을 평정했다. 그해 8월 고선지는 소발률 국왕과 그의 부인인 티베트 공주를 대동하고 쿠차로 돌아갔다. 신당서는 고선지가 소발률국을 평정하자 불룸국(拂菻國)과 대식국(大食國, 아랍의 압바스 왕조) 등 서역 72개국이 모두 놀라 당에 귀순해왔다고 기록했다.

 

고선지의 소발률국 원정로 /이덕일저 ‘장군과 제왕1’
고선지의 소발률국 원정로 /이덕일저 ‘장군과 제왕1’

 

고선지는 소발률국 평정 소식을 현종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안서절도사 부몽영찰은 시기를 했다. 자신이 황제에게 보고해 자신의 공으로 만들고 싶었다. 부몽영찰은 현종에게 고선지의 죄를 고하고 벌을 줄 것을 청했다. 이때 군 감독을 맡고 있던 변영성(邊令誠)이라는 환관이 황제에게 고선지가 기이한 공(奇功)을 세우고도 지금 장차 죽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소상한 내용을 보고하면서 고선지는 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고선지는 안서절도사로 승진했다.

파미르 서쪽 아프가니가스탄에 있는 토화라(吐火羅)라는 나라에서 문제가 생겼다. 토화라는 신라 고승 혜초(慧超)가 앞서 720년 그 곳을 지나 파사(波斯, 페르시아)를 다녀왔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는 곳이다. 그 주위에 있는 걸수국(朅帥國)이 티베트와 연합해 토화라를 공격하려 하자, 토화라가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750년초 고선지는 파미르 서쪽으로 진격해 걸수국 정벌에 나서 복속시켰다.

고선지의 두차례에 걸친 정벌은 티베트와의 영향력 분쟁이었다. 고선지는 1, 2차 원정을 통해 파미르 고원 남쪽 일대, 즉 지금의 피키스탄 북부지역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대한 당나라 지배권을 확보했다.

 

당나라 최강성기의 서역 영토 /위키피디아
당나라 최강성기의 서역 영토 /위키피디아

 

티베트를 복속시켰으나, 이번에는 서쪽에서 이슬람 세력이 도전해왔다. 750년 아랍과 페르시아 지역에서 압바스(大食)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했다. 중앙아시아를 놓고 당나라와 이슬람세력이 대회전이 예고되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는 석국(石國), 사마르칸트에는 강국(康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석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압바스가 서쪽에서 밀려오자 석국 내에 국왕과 부왕(副王)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석국에선 부왕도 독자적인 외교권이 있었다. 국왕은 신흥 세력인 압바스와 외교관계를 맺자고 주장하고, 부왕은 예전처럼 당과의 관계를 유지하자고 주장했다. 석국 내에 의견이 갈리자 북쪽 투르크계 나라인 튀르기시도 당나라를 떨어져 나가려고 했다.

고선지는 현종에게 번신의 예를 다하지 않는 석국과 튀르기시를 정벌해 서역 전체의 종주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겠다고 청원을 넣었다. 황제의 원정 허락이 내려졌다. 당시 서역 72국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고선지는 비단길(Silk Road)을 따라 타슈켄트로 정벌에 나섰다. 이번 정벌은 천산산맥을 넘어야 하지만 파미르를 넘는 것보다는 쉬웠다. 석국과 튀르기시는 물론 9개국이 고선지에게 항복했다. 그해가 751년 정월이었다. 신당서에는 고선지가 튀르기시 카간과 석국왕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했다. 고선지는 석국왕과 튀르기시 국왕을 잡아 당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압송했다.

아랍과의 대회전을 앞두고 일차전은 고선지가 승리했다. 하지만 곧이어 벌어지는 2차전, 즉 스 전투에서 고선지는 압바스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에 패하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