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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의 찬탈, 황건적의 난, 삼국 분립, 5호의 난 등 연속적 동란 유발
6백년간의 2차 소빙기, 중국에 천하동란
2019. 07. 26 by 김현민 기자

 

중국에 닥쳐온 제2차 소빙기는 전한(前漢) 말기인 BC 24년에 시작되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600년간 길게 이어졌다. 600년 사이에 왕망(王莽)에 의한 신()나라 건국, 후한 왕실의 쇠퇴, 황건적의 난, 삼국 분립, 5()의 남침에 따른 남북조 혼란이 빚어졌다. 천하 대동란의 시기였다. 동시에 화북 지방에 밀집해 있던 한족들이 회수,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하면서 중국의 활동영역이 커지게 되었다.

중국에 닥친 2차 소빙기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눠진다.

 

BC 24~AD 219왕망의 찬탈, 후한조의 불안

250년간에 중국의 기후는 한랭건조했다. 사서에 몹시 추웠다”, “큰 가뭄이 들었다라는 기록이 많고,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름에 몹시 더웠다는 기록은 없다.

2차 소빙기는 전한 말기부터 시작되었다. 기상학자들은 당시 기후 기록과 화분(花粉) 분석에 의하면, 당시 연평균 기온이 오늘날보다 0.5~1°C 낮았을 것으로 추산했다.

전한(前漢) 말기에는 여러해 동안 계속 가뭄이 들었다. 9살에 왕위에 오른 평제(平帝) 때에는 천하가 분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백성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평제가 죽자 왕망이 왕망이 가황제’(假皇帝), ‘섭황제’(攝皇帝)의 자리에 올라 직접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후 왕망은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웠다.

왕망이 황제 자리를 찬탈한 후에도 기후는 그를 돕지 않았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한랭건조의 날씨는 극으로 치달았다.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고 곤궁해져 도적이 되었다. 떠돌아다니던 유민 수십만명이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굶어 죽는자가 십중팔구였다.

남쪽 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다. 형주 사람 대부분이 굶주렸다. 사람들은 들에 나가 야생오리를 잡아먹고, 남가새(1년생 잡초)를 캐 먹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서로 뺏아 먹었다.

왕망은 새 나라를 열어 개혁정치를 단행했지만,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했고, 건국한지 15년만에 한() 왕실의 후손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으니, 후한(後漢)이다.

 

후한 시기에도 소빙기는 이어졌다. 왕망 일당을 몰아내고 후한조가 들어섰지만, 가뭄은 더 심해졌다. 전국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 100년간 어어졌고, 최종적으로 황건적(黃巾賊)의 봉기로 이어져 후한이 멸망하게 되었다.

서기 194(후한 헌제)에 삼보(三輔, 섬서성)에 큰 가뭄이 들어 곡식 10말이 50만전이고, 콩과 보리는 10말에 20만전이었다. 사람들이 서로잡아 먹고, 백골이 길에 쌓여 있었다고 했다. 양자강과 회수(淮水) 사이에 사람이 서로잡아 먹어 인적이 끊어졌다고 한다.

 

후한말 황건적 발생지역 /위키피디아
후한말 황건적 발생지역 /위키피디아

 

220~264, ··오 삼국시대

우리가 재미 있게 보는 삼국지(三國志)에도 가뭄과 관련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가뭄에 흉년을 이기지 못한 농민들이 황건적이 되었고, 황건적을 소탕하는 가운데, 유비, 조조, 손권이라는 영웅호걸이 등장한다. 하지만 영웅호걸도 소빙기의 재난을 비껴가지 못했다.

 

<삼국지> 위서에 문제(文帝)가 양주(揚州)에서 병사 10만명을 열병하고 순행하려 했지만, 몹시 춥고 수로가 얼어 돌아갔다고 했다. 삼국지 오서에 양양(襄陽)에 많은 눈이 내려 3척이나 샇였고, 새와 짐승의 3분의2가 죽었다고 했다. 두 지명은 양쯔강, 회하 일대인데, 그 일대가 얼어붙은 것은 전형적인 소빙기의 징후다.

가뭄도 심했다. “여러해 초목이 마를 정도로 가뭄이 들었다거나, “가뭄이 시작한 지 30년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 기간 40년 가운데 30년 동안 지루하도록 가뭄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키피디아(중국판)
중국 삼국시대 /위키피디아(중국판)

 

265~420()대에 이어 516국 시대

사마염이 위나라를 전복하고 진()을 건국한 다음, 촉과 오를 멸망시키면서 265년에 천하를 다시 통일했다. 하지만 진은 59년을 넘기지 못하고 흉노의 유연(劉淵)에 의해 멸망하고, 사마씨의 후손이 강남으로 도망가 난징(南京)에서 나라를 세웠다. 이를 기준으로 앞의 진을 서진, 뒤의 진을 동진이라 한다. 동진 시대에 화북지망은 5개 북쪽 민족(五胡)16국을 세워 516국의 시대가 열린다.

사마씨의 진()조가 오래가지 못한 것은 8왕자의 난 등, 왕족 내부의 분열이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그 이면에 소빙기의 악천후로 흉년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할수 없다.

역사기록을 분석하면, 서진과 동진 시기 150년 동안에 여름에 눈이 오고 서리가 내린 해가 6차례, 봄과 가을에 서리가 내린 해가 10여차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거나 이상한파가 닥친 해가 26차례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동진 성제(成帝) 시기인 336년부터 동진이 멸망하는 420년까지 80년 동안에 홍수 기록이 없었고, 가뭄 기록이 30여차례나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전형적인 소빙기의 현상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도 336년에 발해만에 3년동안 얼음이 얼어 그 위로 수레와 말, 3~4천명의 사람이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뭄도 극심했다. 297년에 관중 지방이 기아에 허덕여 쌀 10말이 1만전이었고, 백성들이 떠돌아 다니며 나날이 흩어져 열명중 둘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서진의 혜제(惠帝)백성들이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라고 어리석은 말을 해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백성들 중에 처자식을 파는 사람도 있었고,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와 동란이 발생하자, 한족들은 대규모로 남쪽으로 이동해 양쯔강 이남의 강남 지방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서기 364년 중국의 분열 /위키피디아(중국판)
서기 364년 중국의 분열 /위키피디아(중국판)

 

420~600남북조 시대

천하는 힘있는 자의 세상이었다. 남과 북의 두 조로 나누어 권력쟁탈전이 벌어진 이 시기에 백성들은 이상기후가 몰고 온 재앙에 시달려야 했다.

180년간에도 소빙기가 지속되었다. 여름에도 눈과 소리가 내렸고, 봄 가을에도 서리로 농사를 망쳤다. 여름에 서리와 눈이 내린 횟수가 진()조 때보다 많았다. 자주 서리와 가뭄으로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며 살아갈수 없는 백성들이 많았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415~537년 사이 120년간에 서리로 농작물이 피해를 본 기록이 34차례나 나오는데, 이는 중국 역대 왕조사에 보기 드믄 기록이라고 한다.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600년 이후부터 한랭건조 기후가 끝나고 다시 온난다습한 기후로 바뀌게 된다. 수나라의 짧은 기간에 당나라 시대에 문물이 번성한 것도 따듯한 기후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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