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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한국은 물론 아시아, 멕시코등에서 위기진단에 큰 오류…미국의 시녀 비난
{외환위기 그후①] 허점 투성이 IMF
2019. 07. 27 by 김현민 기자

 

한국경제가 환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기 6개월 전인 19974월 당시 IMF에서 자본시장 조사팀장을 맡고 있던 데이비드 폴커츠란다우(David Folkerts-Landau)씨가 한국을 방문했다. IMF는 당시 1,000명의 이코노미스트를 고용해, 182개 회원국이 금융위기에 빠질 위험이 있는지를 점검했다. 이들은 회원국을 직접 방문하거나 국제기관의 자료를 토대로 진단을 했다. 사람으로 치면 일종의 정기 검진인 셈이다. 폴커츠란다우씨가 이끄는 IMF 팀의 역할은 이런 목적이었다.

폴커츠란다우씨 일행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국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정리했다. 요지는 한국 은행문제는 자칫하다간 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폴커츠란다우씨는 금융시스템의 문제를 한국정부에 일러주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 관리들은 그런 문제가 있지만, 성장률이 빠르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1)

 

IMF의 진단을 묵살한 한국 정부에도 문제가 있지만, IMF에도 문제가 있었다. 폴커츠란다우씨의 진단이 IMF 고위층에서 무시됐던 것이다.

폴커츠란다우씨는 워싱턴에 돌아온 후 조사내용을 토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IMF 이사진들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사진들은 보고서를 유야무야해버렸다. 7개월이 지나 11월에 발간된 265쪽의 IMF 연례보고서에 폴커츠란다우씨의 조사가 몇 줄 정리됐을 뿐이다.

당시 IMF 연례보고서는 현재 (한국) 금융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은행 대출 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관행이라고 정리했다.

그러나 연례보고서가 나올 무렵 한국 외환위기는 벼랑으로 치닫고 있었고, 폴커츠란다우씨의 주장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인들에게 나타난 IMF는 결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진단에서 처방, 결과에 이르기까지 IMF는 오류투성이었고, 수혜국에서는 미국의 앞잡이라는 비난이, 미국 의회에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라는 비난이 서슴지 않고 나왔다.

IMF는 전문 이코노미스트들로 팀을 만들어 해마다 150개국에 파견, 경제상황을 조사한다. 이들 조사단의 보고서는 비밀로 돼있다. 그러나 IMF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 중에서 아시아 위기를 예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더욱 한국 위기는 예상조차 못했고, 앞서 언급한 폴커츠란다우씨의 진단도 이사회에서 묵살해버렸다. IMF 관리들은 한국 정부가 위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터트렸으나, 그들은 세계 경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했다.

IMF는 앞서 2년전에 발생한 멕시코 위기도 예상하지 못했다. 페소화가 폭락하기 8개월 전인 19944, 미셸 캉드시 총재는 미국 재무부에 보낸 서한에서 아주 충실하게 경제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오진도 오진이지만, IMF는 페소화 위기가 발생하자 멕시코에 대한 온건한 권고안을 냈다.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판단했던 것이다.

 

IMF는 해마다 9월에 연례보고서를 낸다. 그러나 이 연례보고서는 그해 4월을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신선함을 잃는다. IMF 연례보고서는 해당국의 로비에 의해 내용이 변색되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은 97년 보고서에서 원화 고평가에 대한 논의를 삭제해달라고 요구, IMF가 이를 들어주었다고 한다. 2)

그 결과 IMF는 한국 위기에 큰 오류를 범했다. 19979월에 나온 연례보고서에서 IMF는 한국이 외환위기로 치닫고 있음에도 지속적으로 거시 경제를 잘 운용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보고서는 겨우 한국이 더 탄력적 환율 운용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것이 고작이다. 강경식 부총리와 경제팀만 나무랄 것이 아니다. 정작 한국 경제의 지배자로 나타난 IMF는 오류 투성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IMF는 환란 직전인 10월에도 한국을 리뷰했다. 보고서는 외환위기 이후에 나왔지만, 초안에는 한국의 위기상황을 지적하지 못했다.

경제를 예측하는 것은 일기예보보다 힘들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기상예측의 정확도는 높아지고 있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위기 예측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IMF측도 이점을 인정하고 있다.

IMF의 자매기관인 세계은행(IBRD)도 오보의 명수다. 아시아 위기 발생 두달전인 19975월 세계은행 보고서는 태국경제를 칭찬했고, 인도네시아를 경기 순환의 예외적인 나라라며 금융 대출 우량국으로 지목했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지자 세계은행은 신문이나 통신 뉴스에 의존해 한국 사태를 추적하기 급급했다.

 

IMF는 한국이 굴복하자, 채권자로서 한국 정부에 상전노릇을 하려고 덤벼들었다. 그들은 선진국 채권은행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미국의 시장 경제논리를 한국에 주입시키는 게 중요한 임무였다.

워싱턴에서 IMF 건물은 백악관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미국 재무부와도 걸어서 10분 거리다. 이같은 지리적 인접성은 IMF가 역사적으로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와 얼마나 밀접하게 움직여왔는가를 웅변해 준다.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였고, IMF는 미국의 이익에 충실했다.

 

워싱턴의 IMF 본부 /위키피디아
워싱턴의 IMF 본부 /위키피디아

 

IMF2차 대전 종식 직전인 1944년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를 주창한 브레튼 우즈 체제의 산물이다. 2차대전후 미국 달러화를 세계 기축통화로 하되, 금을 기준으로 각국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이 IMF의 주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초 미국이 금본위제도를 파기하면서 IMF의 역할을 끝났다.

IMF를 다시 살려준 것이 1880년대 중남미의 경제 위기와 90년대 멕시코와 아시아 금융위기다. IMF는 금융위기로 부도직전에 있는 나라를 지원해준다는 명분으로 선진국 채권단을 대변함으로써 퇴장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IMF에 가장 많은 돈을 낸 나라는 역시 미국이다. 그러나 비율이 1990년대말에 18%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1997년말까지 IMF 충당금 납부 액수는 전체 2,000억 달러중 360억 달러에 이르렀다. 다음이 독일과 일본이 각각 112억 달러(5.7%), 프랑스와 영국이 101억 달러(5.1%)이고, 석유 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70억 달러로 3.5%를 차지했다.

IMF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지분은 18%에 지나지 않지만,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한국의 재벌 오너가 20%도 못되는 지분을 가지며 소액주주의 의견을 무시하고 회사를 좌지우지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IMF에 관한한 미국은 한국 재벌의 경영관행에 못지 않는다.

영국과 프랑스도 IMF 내에서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프랑스어 사용국가에 지원을 늘리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영국도 빈곤국가의 외채부담을 경감하는데 다른 회원국들보다 열심이다. 그러나 멕시코나 아시아 위기와 같은 결정적 문제에서는 미국의 목소리와 IMF의 목소리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이 IMF를 주도했다.

1990년대 들어 IMF 지원 자금 규모는 늘어나는 추세였다. 1993년 세계 각국에 지원된 IMF 자금은 452,900만 달러였으나, 1994년엔 918,900만 달러, 멕시코 위기가 발생한 1995년에는 3205,100만 달러로 급증했다. 1996년엔 1822,100억 달러로 다소 주춤했으나, 아시아 위기가 본격화한 1997년엔 1995년보다 많은 4006,000만 달러의 자금이 지원됐다.

 


1) WSJ 9834, IMF debtor and creditor disagree on its warning

2)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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