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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1609년 기유약조 체결…왜란 후 반일감정, 명의 견제 누르고, 일본과 수교재개
신숙주가 남긴 말…“일본과 잘 지내라”
2019. 07. 29 by 김현민 기자

 

조선 선조 때의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을 겪고, 낙향해 후세에 징계하고 경계하기 위해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유성룡은 징비록 서문에 이렇게 썼다. 1)

신숙주(申叔舟)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임금 성종께서 물으셨다. “그래, 경은 나에게 남길 말이 있소?”

그러자 신숙주가 대답했다. “앞으로도 일본과 친하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둔 성종께서는 부제학 이형원과 서장관 김흔을 보내 화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대마도에 도착해서 그만 풍토병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일본에 갈수 없게 된 일행은 조정에 사정을 전했고, 성종께서는 글과 선물만을 대마도 도주에게 전하고 들어오도록 명했다. 그 뒤로는 한번도 사신이 가질 못했는데, 반면에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예에 따라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유성룡이 <징비록> 첫머리에 선배 영의정이었던 신숙주를 거론한 까닭은 무엇일까. 신숙주가 임종할 때에 임금에게 우리나라는 일본과 화친을 잃으면 안 됩니다고 했는데, 일본과 관계를 끊은 게 왜란의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을 개탄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과 사절 왕래가 잦았다.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나 되었고, 일본 막부 사신의 조선 파견이 71회에 달했다.

신숙주는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후에 일본의 사정과 외교절차 등을 정리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다. 그는 일본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 일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습성은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의 조정에도 능숙하다. 우리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을 달래는데 그 도를 얻으면 조빙(朝聘, 내조해 알현함) 갖추지만, 그 도를 잃어버리면 함부로 노략질한다.”

하지만 신숙주는 현실론자였다. 그는 결론적으로 ()는 상대하기가 지극히 어렵지만, 후대하라고 임금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신숙주의 유언은 때로는 명나라 사신에게 악용되기도 하고, 때론 일본과의 화친에 활용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른 15882월 명나라는 정응태(丁應泰)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냈다. 정응태는 조선에 파견된 명군 총책임자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명 황제 신종(神宗)에게 조선의 임금과 양호가 결탁해 왜군을 끌어들여 명 황제를 속이고 대적하려 한다고 모함성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인즉, 요동(遼東)은 옛고구려 땅인데 조선이 요동을 회복하기 위해 왜병을 불러들였다, 명군의 양호가 사당(私黨)을 만들어 조선 임금과 신하들과 결당(結黨)해 명 황제에 대적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정응태는 그 증거로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들었다. 그는 신숙주가 일본과 국교를 맺고 교역하라고 권고한 내용을 거꾸로 해석해 조선이 쌀과 곡식, 비단을 일본에게 헌납했으며, 조선이 사신을 왕래해 일본을 불러 들였다고 주장하며, “조선을 토벌하라고 황제에게 진언했다.

조선이 발칵 뒤집혔다. 선조는 때 당대의 문장가 이항복(李恒福)과 이정구(李廷龜)를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겨우 무마했다.

 

7년을 끌던 임진왜란은 15988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으로 왜군이 철군함으로써 끝이 났다.

그해 91, 명 사신 정응태의 일로 선조의 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을 때, 유성룡은 임금에세 신숙주를 두둔했다. 2)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왜인의 풍속(風俗세계(世系지도(地圖)를 기록한 것을 얻어서 우리나라 관()에서 왜를 대접하는 사례를 덧붙여 기록해 한 책입니다. 대개 우리나라와 일본은 거리가 멀고 왕래가 없었는데 단지 오면 거절하지 않고 대략 기미(覊縻)의 계책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신숙주가 왕래한 후에 이르러서야 그 나라의 사적(事迹)을 조금 알게 되었고 …… 한 조각 종이의 내용을 가지고서 사람을 모함하는 기화(奇貨)로 삼고, 뜬소문을 주워 모아 없는 말을 만들어 냈으니 너무도 심하다 하겠습니다.”

 

정선이 그린 동래부사접왜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이 그린 동래부사접왜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선 도요토미 막부가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江戶) 막부를 세웠다. 도쿠가와의 새 정권은 정권을 장악한 후 국내안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추진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사정에 정통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중개자로 삼아 교섭을 해왔다. 이에야스는 자신은 처음부터 임진왜란에 아무런 이유 없이 병력을 동원하는(無故動兵)일에 찬성치 않았으며 자기는 관동(關東)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간곡하게 알려왔다.

대마도 도주의 입장에서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필수품을 조선에서 구입해 생활해 왔는데, 전쟁과 국교단절로 물자공급에 크게 곤궁하던 차에 도쿠가와 막부의 명령을 받고 교섭사절로 임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앞세워 선조 32년부터 33년까지 3차례나 사신을 보내왔다. 1600년 겨울에 조선은 겨우 동래변장(東萊邊將)을 통해 일본에 회신을 주었다. 그 내용도 통교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죄악을 꾸짖으며, 명나라와 상의해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이 전쟁에 끝난지 일본과 수교를 재개하는데, 가장 큰 큰 걸림돌이 명나라였다. 앞서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요동을 공격하려 했다는 명 사신의 모함도 의식해야 했다.

게다가 국내에서도 왜와의 통교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우선 조선을 침공한 세력이라는 점이고, 다음은 왜인들의 진심을 파악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기회에 일본가 외교를 단절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현실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왜를 감시하기 위해 대마도와 일본을 정찰하기 위해 사신을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본에 붙잡혀간 피로인(被擄人)들이 순풍을 타고 일본에서 도망쳐 오기 시작했다. 조선은 그들을 탈출한 피로인들로부터 이키(一岐), 나고야(名古屋), 대마도 등의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에 붙잡혀 갔다가 돌아온 대신 강항(姜沆)으로부터 비교적 정확한 사정을 보고 받았다.

대마도 사절로 온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 일행은 조통 10, 산달피 16, 단목(丹木) 15, 오적어(烏賊漁) 70속을 가지고 와서 팔고자 했는데, 조선은 이를 허용했다. 공무역 형태로 일본과의 무역행위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1604년부터 조선은 대마도 사절단이 가져온 물건을 교역하고, 왜인들의 내왕통교를 허용하면서 일본이 성의를 다하면 대이지도(待夷之道)로서 관대하게 처리해 주겠노라고 통보했다. 대마도 관리들은 이 소식을 대단히 기뻐하며 일본 전체와도 통교를 허용하여 달라고 간청했다.

조선 조정은 도일하는 일행에게 일본 내정의 정탐은 물론 조총무역(鳥銃貿易)은 가능하다고 했다. 왜란 때 조총 때문에 혼났기 때문에 선진 무기를 사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양국간 수교 회복 이전에 일부 품목에 대해 거래를 허용한 것에서 이미 교역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던 것을 알수 있다.

조선은 일본의 진의를 파악한 연후에 세가지 선행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국서를 정식으로 보내올 것, 둘째 왜란중 왕릉을 발굴한 범릉적(犯陵賊)을 압송해올 것, 셋째, 피로인(被擄人)을 송환할 것 등이다. 일본은 이 세 조건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로써 일본측에게 전쟁을 일으킨 범죄행위를 스스로 시인케 되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 원년(1609)에 조선과 대마도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한다. 전쟁이 끝난지 11년만이다. 기유약조는 일본 막부와 체결한 게 아니고, 대마도와 체결한 조약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그 한계를 드러낸다.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은 북방(여진)의 새로운 위협이 국내의 격렬한 반일감정을 누르고 도쿠가와 막부와 국교회복을 촉진한 큰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했다. 3)

기유약조는 세종 때 체결된 계해약조와 비교해 일본측의 권한이 축소되었다. 이 조약 이후 조선통신사가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에도로 파견되기 시작한다.

결국 왜란을 겪은 후에야 조선은 신숙주가 임종할 때 남긴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신숙주 초상화 (보물 613호) /문화재청
신숙주 초상화 (보물 613호) /문화재청

 


1) 유성룡, 징비록, (2003, 서해문집 번역), 19~20

2) 선조수정실록 159891일자

3 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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