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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이변
추웠지만, 강우량은 많아…金의 남하와 관련 있다는 주장
중국 3차 소빙기는 북송-남송 때…흑점 영향?
2019. 07. 29 by 이인호 기자

 

대만 기상학자 유소민(劉昭民)이 규정한 중국의 제3차 소빙기는 985년부터 1192년까지 200여년 간이다. 시기로는 북송 태종 2년부터 남송 광종 3년까지다.

이 시기에 중국 한족들은 북방 이민족인 요()와 금()에 의해 밀려나 양쯔강 이남에서 절반의 왕국을 세운다. 유소민은 거란과 여진의 남침을 기후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송()나라의 문약(文弱)과 허술한 국방에서 기인한다고 할수 있다. 물론 날씨가 추워지면 북방민족이 따듯한 남쪽을 찾아 내려올 이유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송나라에겐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했건, 송은 북쪽의 요와 금, 탕구트족의 서하(西夏))에 의해 위축되고, 남쪽에선 베트남의 교지(交趾)에 의해 쪼그라 들었고, 결국엔 남쪽에서 저항하다가 또다른 북방민족 몽골()에 의해 멸망한다.

 

1111년의 북송 /위키피디아
1111년의 북송 /위키피디아

 

유소민이 저서 기후의 반역에서 서술하는 중국의 3차 소빙기의 기록을 보면, 북송 시기부터 한랭건조한 기후가 시작되었다. 남송 시대에도 수도인 항저우(杭州)가 여름에도 춥고 서리와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추위가 심했다.

당시 장강(양쯔강) 유역의 동정호(洞庭湖), 파양호(鄱陽湖), 회하(淮河) 유역의 강남이 얼어붙고 봉쇄되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중원인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일대에는 당대 이래 지배되던 감귤과 과일나무가 동사하고, 회하 유역과 장강이 결빙해 수레와 말이 얼어붙은 강 위를 지나 다녔다고 한다. 오늘날 회하와 양쯔강이 겨울에 얼어붙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한랭기후와 관련된 몇가지 기록을 보자.

1129, 여름이 마치 겨울처럼 추웠다.

1131, 한식일에도 눈이 내렸다.

1185, 회수가 얼어 흐르지 않았다. 태주(台州, 절강성)에 눈이 한 장 넘게 쌓였고, 얼어 죽는 자가 아주 많았다.

1190, 한파가 입하 때까지도 물러나지 않았다.

1192, 여름에 서리가 내렸다.

1120, 5월에 더운 기운은 없었고, 시원하기가 가을과 같았다.

 

1142년년 남송과 금나라 /위키피디아
1142년년 남송과 금나라 /위키피디아

 

축우방(竺藕舫)이라는 중국 기상학자는 1131~1264년 사이 133년 간 항저우에 늦봄에 눈이 온 기록이 45년이 넘는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하면 항저우와 난징, 상하이의 평균 기온이 오늘날 보다 1~1.5°C 낮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관측한다.

하지만 한파와 달리 강우량은 비교적 많아 다른 소빙기와 구별되었다.

축우방은 역사상 가뭄과 홍수의 비율을 조사한 결과, 남송시기에 가뭄이 가장 적었고, 강수량도 가장 많았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아무리 추워도 강우량이 많으면 농사는 그럭저럭 지을수 있다. 송나라가 망한 것은 농민반란 때문이 아니라, 외적의 침입 때문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소민은 이같은 기상이변이 태양의 흑점 변화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태양의 흑점이 강해져 지구로 내려 쪼는 햇볕의 양이 줄어들어 극심한 한파가 왔다는 것이다. 온대성 회오리바람과 폭풍의 남하등이 태양 흑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축우방의 조사에 따르면, 태양 속 흑점의 수가 남송초기에서 중기(12세기)에 가장 많았다고 한다.

남송 초기와 중기의 폭풍은 양쯔강 유역에 비를 뿌리고 바다로 들어갔는데, 이에 따라 양쯔강 유역에 풍부한 비가 내려 강우량과 강설량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남송 초기와 중기의 항저우의 강설 기록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특이할 점은 중국 서부 신장(新疆) 지역 사이람노르 지방의 산맥이 오랫동안 빙설로 뒤덥혀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초목의 목장지대가 형성된 그곳에 빙설로 쌓였다는 사실은 소빙기의 증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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