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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200여년간 12회 파견, 대일 교린외교…조선 문화 전달하고, 일본 문물 도입
조선통신사, 원한보다 일본과 소통하다
2019. 07. 30 by 김현민 기자

 

조선은 일본과 참혹한 전쟁을 치렀지만, 전후에 통신사를 12차례나 파견하며 일본과 교린(交隣)의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의 외교정책은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事大)하고, 왜국과 여진 등 이웃나라에 대해서는 대등한 관계로 사귀는 교린정책을 취했다. 왜와의 교린이 끊겼을 때 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깊이 통찰했기 때문에 조선은 전쟁이 끝난지 9년째가 되는 1607(선조 40)에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被擄人)을 돌려보내기 위해 쇄환사(刷還使)라는 이름으로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어 1609년 대마도를 통해 일본과 기유조약(己酉約條)을 체결해 국교를 재개한다.

 

조선통신사 그림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홈페이지
조선통신사 그림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홈페이지

 

전쟁을 치렀던 두 나라가 이렇게 빨리 선린관계로 돌아선 것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으로선 왜란이 끝나고 명군이 철군했기 때문에 힘의 공백이 생겼고, 북방의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자 왜국과의 평화유지가 필요했다. 도요토미 막부를 무너뜨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지방의 다이묘(大名)들이 완전하게 복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명 동맹의 강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왜국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도쿠가와의 에도 막부는 대마도 도주를 통해 조선의 사절단의 내방을 강력하게 요청했고, 조선은 이에 응함으로써 사절단 파견이 이뤄졌다. 사절단이 일본을 경유하는 과정에서의 접대 비용은 일본측에서 댔다. 일본으로선 조선통신사를 후대했기 때문에 접대 경비가 큰 부담이 되었는데, 사절단이 한번 왕래하는데 일본에서 쓴 비용이 1개 번()에서 1년간 쓸 예산이 들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행로 /조선통신사문화사업 홈페이지
조선통신사 행로 /조선통신사문화사업 홈페이지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다. 1607, 1617, 1624년 등 초기 3회의 사절단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화친을 요청한 도쿠가와 막부의 서신에 대한 회답과 피로인들의 송한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4회째인 1636(인조 14)부터 조선 전기에 사용하던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회복해 1811(순조 11)까지 200여년간 이어진다.

조선 통신사는 도쿠가와 막부에 새 쇼군(將軍)이 계승할 때마다 조선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조선의 사절단은 한번 갈 때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와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등 모두 400~500명이 참여했다.

그 일행이 가는 길은 장관이었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해 충주, 안동, 경주, 부산을 지나 대마도, 이키(壹岐), 시모노세키(下關), 가미노세키(上關), 우시마도(牛窓), 무로쓰(室津), 효고(兵庫),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히코네(彦根), 나고야(名古屋), 오카자키(岡崎), 시즈오카(靜岡), 하코네(箱根)를 거쳐 막부의 수도인 에도(江戶)에 이르는 기나긴 행로였다. 소요되는 기간은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개월에 걸렸는데, 중도에 풍랑을 만나거나, 일행 중 질병에 걸릴 경우 여행시간이 길었다. 중도에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었고, 배가 침몰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조선에서는 조선통신사 정사를 정3품인 참의(參議)급에서 지명했지만, 일본에서는 총리급 대우를 받았다.

에도에 도착해서는 일본측이 마련한 성대한 잔치가 발어진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보다 문화가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갖은 호화로운 음식을 내놓고 무용수와 악단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에도에서 가장 큰 행사가 상마연(上馬宴)이었는데, 사절단이 귀국하러 말을 타기 전에 하는 의례라는 뜻이다. 이 행사에는 일본 궁중음악인 가가쿠(雅樂)가 연주되었다. 조선의 아악과 비슷한 것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도가쿠(唐樂)와 한반도에서 전래된 고마가쿠(高麗樂)의 두가지 종류가 각각 다른 악기와 음악으로 편성되어 사절단의 흥을 돋구었다.

1711년 사절단에 부사로 참여한 임수간(任守幹)은 자신의 사행록 동사일기’(東槎日記)에 상마연에서 감상한 음악과 무용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임수간은 상마연에 연주한 음악인을 언급하면서 그들 중에 고려인 자손이 있다고 기록했다.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고려악(고마가쿠)이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일본에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절단의 공식적인 외교 의례는 쇼군 앞에서 전명의(傳命儀)를 행하는 것이었다.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를 쇼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마치면, 사절단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노정에 들어서게 된다.

 

에도 시내를 지나가는 조선통신사 행렬 (羽川藤永 그림, 고베시립박물관) /위키피디아
에도 시내를 지나가는 조선통신사 행렬 (羽川藤永 그림, 고베시립박물관) /위키피디아

 

조선통신사의 오고가는 행렬에는 악대가 연주했다. 태평소와 나발, 나각 등의 관악기와 장고, , 자바라, 대고와 소고 등의 타악기가 연주되었고, 해금과 대금, 피리 등도 덧붙여졌다. 악대는 국서(國書)의 앞, 정사와 부사의 뒤쪽에 30~40여 명이 동원된다. 거문고와 가야금 등도 따라 갔는데, 이 현악기는 고정된 장소에서 잔치를 할 때 연주되었다.

조선의 악대는 일본인들에겐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수백명의 사신단이 행렬을 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그 즉석에서 판화로 제작되어 판매되었고, 그 행렬을 모방한 축제(마쓰리)가 에도로 가는 연도의 도시에서 만들어졌다. 일본에 전하고 있는 당인(唐人) 행렬과 당자(唐子) 춤은 조선통신사 행렬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문화유산이다. 여기서 당()은 중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즉 조선의 문물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한류(韓流) 열풍이 조선시대에 일본에서 불었던 것이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해 마상재(馬上才)로 불리는 2명의 광대를 데리고 가 쇼군 앞에서 곡예를 연출했는데, 그 인기가 대단해 곡마 묘기나 통신사의 행진을 자개로 새긴 도장주머니가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기도 했다.

조선의 선비들이 글을 잘 쓴다는 소문이 퍼져 행로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들어 종이를 내밀며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우리 사절단은 흔쾌히 글을 써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랑삼아 가보로 보관했다고 한다. 또 연도에 우리 사절단이 선물을 주었는데, 일본인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귀중하게 보관해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일본은 조선 사절단을 영접하기 위해 영접사를 임명하고, 통신사가 지나는 번에 소요 경비를 할당했다. 막부의 지시가 내려오면 각 번은 길을 정비하고, 그들이 묵을 숙소를 새로 지었다. 사절단이 돌아간 후에 새로 지은 집은 쓸 곳이 없어 다시 허물었다고 한다. 일본측으로서도 엄청난 비용이 들여 조선통신사를 접대했던 것이다.

 

에도성에서 쇼군에서 선물할 도자기와 호피를 준비하고 있는 조선통신사 (에도도병풍)/위키피디아
에도성에서 쇼군에서 선물할 도자기와 호피를 준비하고 있는 조선통신사 (에도도병풍)/위키피디아

 

조선의 사절단은 한양에서 에도까지 육로와 해로, 다시 육로를 거쳐 다녀왔지만, 일본에서는 대마도 사절단이 부산 왜관에 들르는 것으로 그쳤다. 조선에서는 일본 사절단의 한양 입성을 거부했는데, 이는 왜란 때 일본군이 그들 사절단의 경로를 통해 침공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일본인들 중에는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단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당시 전란의 앙금과 후유증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조선통신사선 재현선 /문화재청
조선통신사선 재현선 /문화재청

 

조선통신사는 일본과 조선에 서로 영향을 주었다.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의 경제적 발전상에 크게 놀라 찬사를 쏟아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는 일본에 상업이 발달하고, 데지마(出島)를 통해 서양과 무역을 했는데, 이러한 일본의 발전상은 조선의 학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朴齊家)는 청나라와 일본을 예로 들어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일본의 유학 사조인 고학(古學)의 연구 성과가 조선에 들어와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2회의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서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접부채, 양산, 벼루, 미농지(美濃紙) 등을 조선에 도입했다.

일본에서도 조선통신사들의 영향으로 높은 유교적 교양을 접하게 되었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 일본의 유학자들은 조선통신사와 교류를 갖고, 서로의 서적을 교환했다. 조선의 동의보감이 일본에 전해져 한의학 발전에 기여했고, 조선의 인삼 재배를 배워 일본에서 인삼의 국산화가 계획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조·일 양국이 모두 재정적, 정치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선은 1811300여명의 소규모 사절단을 대마도에 보내 그곳에서 국서를 교환하데 그쳤다. 이 약식 절차를 역지통신(易地通信)이라 했는데, 이것이 조선통신사의 마지막이었다. 일본은 이후 미국 페리호의 내항(1853), 매이지유신(1868)등 연속적으로 일어난 정치 소용돌이로 막부가 무너지면서 조선통신사를 더 이상 요청하지 않았다.

 

통신(通信)신의를 나눈다는 의미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인들과 소통하고 신의를 나누는 외교사절단이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에도(도쿄)에서 일본 고관들과 술잔을 나누며 대화를 했고, 일본인들은 그들을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사절단이 파견된 200여년간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없었고, 평화와 선린우호의 관계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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