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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6·25 때 다국적군으로 한국 방위하던 빙식이 다국적 자본으로 한국경제 방어한 것으로 변경
[외환위기 그후⑤] 미국의 아시아 재편 전략
2019. 07. 31 by 김현민 기자

 

한국의 경제 침몰은 좁게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 넓게는 환태평양 경제권의 역학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4대 강국 모두가 아시아 경제 위기에 직간접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에 과거 동서 냉전 시대와는 다른 차원에서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됐다.

미국이 IMF라는 다국적 자본을 앞세워 한국 경제 구제에 나선 것은 50년전 미국이 유엔이라는 다국적군의 깃발 아래 한국전에 참전한 것과 비슷하다. 달라진 것은 군대와 무기 대신에 월가의 투자자와 달러일 뿐이었다.

반세기전에 유엔군이 한국군의 지휘권을 이양받은 것처럼 IMF는 한국의 거시경제 조정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미국 경제학자들은 세계 2의 경제 대국인 일본 경제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25때 일본 방위를 주장했던 펜타곤(미국 국방부) 참모들과 같은 맥락의 논리다.

태국에서 불어온 통화 위기의 도미노는 시베리아와 중국 중원에서 밀려드는 공산주의 도미노와 양상이 비슷했다. 밀려오는 도미노와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의 접점이 한국이었다는 사실도 50년의 세월을 두고 똑같이 나타났다.

과거 유엔군이나 1990년대말 IMF에 가장 많은 지원을 제공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움직인 것은 5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군대와 자본이라는 상황만 달라졌을 뿐 미국은 한국을 또다시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재무부는 때론 IMF의 배후에서, 때론 IMF를 제껴놓고 전면에서 아시아 위기 해결에 간여했고, 뉴욕 월가 은행들의 팔을 비틀어 협조를 강요했다. 아시아에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펜타곤이 움직였던 자리를 재무부가 대신했다. 아시아 공산주의의 도미노 현상이 펜타곤의 힘을 강화했듯, 아시아 금융위기 도미노는 미 재무부의 힘을 강화했다.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은 1980년대말 소련을 비롯, 공산국가들이 붕괴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동서 냉전 시절에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아시아의 독재 정권을 용인했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등의 독재정권이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며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면에 미국의 든든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의 독재국가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을 단행했고, 권력과 유착한 대기업들을 양산했다. 한국의 재벌,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가문의 족벌 기업 등이 그런 부류였다. 아시아 국가들은 은행을 장악, 대기업에 저리의 대규모 특혜금융을 주었고, 그 덕택에 정경 유착의 기업들이 고속성장을 구가했다.

미국이 패전국인 일본의 경제 부흥을 지원한 것은 중국이 공산화되면서부터였다. 일본 경제를 부흥시켜 아시아 지역에 침몰하지 않은 항공모함을 만들겠다는 불침항모론(不沈航母論)이 그런 연유에서 나왔던 것이다. 미국의 지원으로 일본이 전후 복구를 마치고 자동차,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을 능가하겠다고 덤벼도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 때문에 막대한 군사비를 사용하는 바람에 일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대일본 정책의 근간은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고, 통상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미국은 군비를 삭감, 재정지출을 줄였고, 금융산업을 선두로 산업경쟁력을 강화했다. 동시에 국제자본시장의 경계를 허물었다. 국제 정치, 경제의 중심이 워싱턴의 펜타곤에서 뉴욕의 월가로 옮겨갔고, 세계의 지도력은 과거 소수 군사엘리트의 판단에서 다수 투자자가 만드는 시장원리로 넘어갔다.

미국은 더 이상 반공주의 독재정권과 그에 유착한 은행, 족벌기업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시아 위기가 터지면서 미국은 아시아를 지원하는 대신에 자본시장 개방과 미국식 금융시스템의 도입을 요구했던 것이다.

한국 전쟁의 기원이라는 저서로 한국에도 유명한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조광동 한국일보 시카고지사 논설위원과의 대담에서 말한 내용을 인용해 보자. 그의 말은 환란이후 미국의 입장을 정곡으로 찌르고 있다.

지금까지 한미 양국은 혈맹관계였다.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더 이상 남한을 이런 관계로 생각하지 않게 됐다.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IMF를 통해 적극적으로 한국을 죄고 있다. 이런 일은 냉전시대에는 있을 수 없었다. 한국 경제의 건강은 바로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 경제가 세계에 어떤 도움을 주느냐 하는 입장에서 보게 됐다. 미국은 IMF를 통해 한국 경제를 통제하고 있다.

나는 오늘 남한의 위기는 냉전 종식의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남한은 특별대우를 받는 나라에서 하나의 경계 대상으로 취급받게 됐다. 미국은 한국의 발전모델을 바꾸려 하고 있다. 이번 위기는 한국 경제의 발전모델의 종언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경제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투명성이 보장되고 미국의 자유 시장 개념에 맞도록 한국경제가 개편되기를 바라고 있다.“

 

1997년 한국경제 방어비용 분담 /BBC 캡쳐
1997년 한국경제 방어비용 분담 /BBC 캡쳐

 

아시아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 재무부는 일본이 주도권을 쥐는 것을 경계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데, 일본이 나서는 것이 방해가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일본이 금융위기에 처한 아시아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아시아 펀드를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아시아 국가의 대외채무중 일본에서 빌린 엔화 차관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아시아 위기 해결의 최대 당사자는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의 제안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미국 재무부의 티모시 가이스너(Timothy Geithner) 차관보(국제담당)였다. 재무관료 출신인 그는 인도, 태국, 중국에서 근무를 했고, 워싱턴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일본에 주재한 이력을 소유한 아시아 통이다. 그는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제안을 싫어할 것이라며, IMF를 통해 자금 지원할 것을 주장, 재무부의 공식 입장으로 만들었고, 일본이 스스로 제안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한국 사태 해결에서도 미국 재무부의 영향을 결정적이었다.

1997123일 한국 정부가 IMF와 협상을 벌일 때 로런스 서머스 부장관이 다녀갔다. 12월말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데이비드 립튼 재무부 차관이 IMF와 사전협의도 없이 한국을 찾았다. 그는 김대중 당선자를 만나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후 IMF 협정을 준수할 것인지, 경제 운용 철학이 무엇인지 등을 꼼꼼히 체크하고 떠났다. 미국 재무부는 한국의 차기대통령을 믿게 됐고, 며칠후인 24일 루빈 장관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한국에 대한 지원을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 재무부는 뉴욕 연방준비은행(FRB)을 통해 월가 은행들에게 압력을 넣어 한국에 빌려준 단기 자금의 만기를 연장해주도록 권고했다. 말이 권고지, 사실상 강요나 다름없었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났던 월가의 쟁쟁한 은행 회장들이 모처(뉴욕 FRB)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휴가지에서 돌아왔다. 해를 넘겨 1월에 뉴욕에서 열린 외채 협상이 그 결과다. 관치 금융이니 하는 불만이 나왔을 법도 한데, 미국 금융가에서 그런 불만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의 정경유착과 관제 금융을 그토록 비판하던 미국 언론도 침묵을 지켰다. 미국 재무부가 자국 은행에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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