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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1980년대 이후 美 금융경쟁력 확보…美 재무부 주도로 세계금융시장 장악
[외환위기 그후⑥] 최종 승자는 미국
2019. 08. 01 by 김현민 기자

 

1997~19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는 최종적으로 미국 자본시장이 아시아권에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면 미국 금융권이 동서냉전이 종식되고 공산권이 붕괴된 후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던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련과의 군사대결이 치열했던 1980년대에 미국 금융산업은 집단 도산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980년대초 연간 20개 미만이었던 은행 도산 수가 1980년대 후반에는 200개로 확대됐다. 엔화 강세에 힘입어 일본 은행들이 캘리포니아의 은행들을 대거 사들여도, 미국 금융계는 속수무책이었다. 1970년대 세계 30대 은행중 7개를 미국 은행이 차지했으나, 1990년에는 1개에 불과했다.

최대 적대국이었던 소련이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초, 미국 중앙정보국(CIA)글로벌 경제에서 강력한 금융의 힘이 유일한 무기라며 금융 패권을 일본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할 것을 백악관에 건의했다. CIA의 보고가 있은 지 1년후인 19912월 미국 재무부는 금융산업 경쟁력 약화가 미국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판단, 금융산업 체질 개선에 관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1992년 집권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 당시에 마련된 재무부의 보고서를 그대로 이행했다. 1930년대초 대공황 때 만들어진 규제 위주의 금융관련 법률을 대거 뜯어고치고, 금융산업 규제완화를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은행의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 비율을 강화하고, () 간 은행업무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리고 은행과 증권, 보험업무의 업종간 진입장벽을 해제함으로써 금융 부문을 완전 경쟁체제로 전환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대적인 금융산업 규제 완화는 금융업계의 재편을 예고했다. 뉴욕 월가로 대변되는 미국 금융산업은 살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국 금융기관들은 자구책으로 선택한 방법은 업종간 벽 허물기와 합병 및 인수(M&A)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M&A 바람은 미국 금융산업에 큰 흐름을 차지했고, 아직도 지칠 줄 모르고 진행되고 있다. 1960~70년대에 연평균 130~140건에 이르던 은행 합병이 1980년후반엔 400~500건으로 확대됐다. 1990년대엔 대형 은행간 합병이 활발하게 이뤄져 10대 은행 대부분이 합병을 통해 경쟁력을 확대했다. 1996년에는 랭킹 4위였던 케미컬 은행이 6위인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합병, 미국 금융가에 일대 바람을 일으켰다. 금융산업 M&A98년초 시티은행의 모기업인 시티코프와 트래블러스 그룹의 합병으로 시티 그룹이 탄생한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미국 은행에 확산되고 있는 M&A대형화를 통한 감량화라는 상반된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즉 덩치는 키우되 군살을 빼면서 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두 은행이 합쳐지면서 외형을 키우고, 동시에 관리 및 영업등 중복부문을 과감히 도려낸다. 비용절감을 통해 증대된 이윤으로 주주들에게 돌아갈 배당을 늘리고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를 확대한다. 그렇게 되면 고객이 늘게 되고 다시 이윤이 확대되는 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미국 금융산업은 경쟁력을 회복, 세계 금융시장을 다시 장악했다. 미국은행들은 미국 경제의 장기호황을 리드하며, 세계의 금고로서의 역할을 되찾았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인플레이션 억제정책, 재무부의 달러 강세정책은 장기호황으로 배출된 막대한 유동성을 월가로 집중시켰다. 미국 자본은 80년대 일본에 팔려간 캘리포니아의 아몬손, 골든스테이트뱅크등을 다시 사들였고, 국제금융시장을 주도하게됐다.

 

1980년대말의 공산권 붕괴가 서구 자본주의의 승리였다면, 1990년대말 아시아 경제 위기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뉴욕 월가에는 8년째 지속되는 미국의 장기호황으로 생긴 막대한 여유자금이 흘러 들어왔다. 이 유동성 자금은 지구촌 국경을 넘나들며 엄청난 파괴력을 행사했다. 미국 자본이 국제 유동성 자금의 전부는 아니지만, 월가로 대변되는 미국 자본이 국제 자금의 흐름을 제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의 경제평론가 윌리엄 그레이더(William Greider)씨는 자신의 저서 하나의 세계(One World, Ready or Not)에서 지구촌 단일 경제에서 나타난 국제금융 자본의 횡포를 이렇게 지적했다.

"금융 자본가들은 수익이 줄어든 기업과 산업을 처벌하고, 자본 활동에 장애를 주거나 기분 나쁜 조치를 취하는 나라와 경제 권역도 징벌한다. 국제자본가들은 독재자라고 비난받을 땐 인류평등주의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레이더씨의 분석을 토대로 할 때 아시아 시장은 투자 장벽이 많고, 자국 통화를 인위적으로 고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보지 않으면 투자 위험도가 높은 곳이었다. 그들에겐 투자이익 회수라는 자본의 논리만 있을 뿐 투자 대상국가의 이해에는 관심이 없다.

태국을 공격한 핫머니 성격의 투기성 자금은 1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전체 국제 유동성 자금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결국 미국 자본이 중심이 된 국제 핫머니가 조금만 움직여도 이머징 마켓에는 대혼란이 오는 여건이다.

매사추세츠 공대(MIT) 돈 부시 교수는 “1980년대엔 국제 시장에 유동성 자금이 모자라 이머징 마켓이 외환 위기를 겪었지만, 1990년대엔 유동성 자금이 넘쳐 문제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아시아 금융시장의 혼돈은 냉전시대가 만들어낸 아시아식 경제발전 방식, 일본식 모델의 부정으로 나타났다. 정부와 기업의 협조는 정경유착, 관치금융의 부정적 모습으로 나타났고, 고도성장은 거품 경제로 변하고 말았다. 아시아식 경제의 붕괴는 더 이상 국가주의적 발전 모델로는 국제시장에서 자금을 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미국 워싱턴 DC의 재무부 빌딩 /위키피디아
미국 워싱턴 DC의 재무부 빌딩 /위키피디아

 

아시아 위기 진화의 중심인 미국 재무부를 들여다보자. 미국은 IMF에 대한 지분이 18%에 불과하지만, 세계 최대 경제력을 보유하고 뉴욕 월가라는 최대 금융시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요구가 곧 IMF의 요구였고, 국제금융시장의 논리였다.

워싱턴을 방문하는 일본 관리들은 국제 금융시장이 미국 재무부의 손에 의해 움직인다고 불평했다. 1998년엔 로버트 루빈 재무 장관이 엄지손가락을 들면 엔화가 상승했고, 그가 엄지를 아래로 내리면 엔화는 바닥을 모른 채 떨어졌다.

1998617일 미국이 일본과 엔화 공동방어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후 미국이 국제 시장에 20억 달러를 풀었다. 그러자 하루 사이에 엔화가 1달러당 143엔에서 136엔으로 7엔이나 폭등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150엔을 넘어 160엔을 칠 것이라는 분석이 국제 시장을 지배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엔화는 140엔에서 진정됐다. 두달전에 일본은 200억 달러를 풀었지만 엔화 방어에 실패했던 것에 비교하면 미국은 결코 많은 돈을 풀지 않았다.

일본 관리들이 의아해 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미국이 적은 돈으로 개입해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빈 장관의 엄지손가락이 위로 치켜져 있었기 때문이고, 일본이 많은 돈을 풀어도 실패했던 것은 그의 엄지 방향이 아래로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 외환 시장에서는 하루에도 2조 달러 가량이 거래된다. 세계 주요도시 은행과 투자기관의 딜링룸에서는 미국 재무부의 눈치를 보며 투자를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IMF가 사태를 악화시키고, 미국 재무부가 수습하는 과정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미셸 캉드시 IMF 총재가 수하르토 대통령을 앉혀 놓고 협약에 서명하는 사진에 분노했다. 나중에 수하르토 대통령이 IMF와의 약속을 몇 차례 어긴 것도 이런 감정의 앙금에서 나왔다는 것이 미국의 분석이다. 18981월 수하르토 대통령이 IMF와의 약속과 달리 팽창예산을 수립하겠다고 선언하자, 미국은 IMF를 제껴놓고 재무부 관리를 자카르타에 보내 수습했다. IMF를 앞세우기보다 직접 나서야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 재무부가 아시아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루빈 장관이 총지휘를 했고, 그 휘하에 로런스 서머스 부장관, 데이비드 립튼 차관, 티모시 가이스너 차관보등 트리오가 특수 기동대 역할을 했다.

루빈 장관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졌다시피 뉴욕 월가의 골드만 삭스에서 26년간 일하며 회장까지 역임한 실물 경제의 대가다. 골드만 삭스 회장 시절 월가를 대표해 민주당 정치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정계와 관계를 맞기 시작했다. 1992년 클린턴은 당선후 곧바로 그를 재무장관에 임명하려 했지만, 당시 71세였던 민주당 원로 로이드 벤스텐에 대한 고려 때문에 대신에 백악관 내에 설치한 국가경제 위원회(NEC)에 경제보좌관을 시켰다. 한국의 청와대 경제 수석에 하당하는 역할이다. 1995년 재무장관에 임명된 루빈은 강한 달러(strong dollar)정책을 펴 아시아 위기의 원인인 달러 강세-엔화 약세를 유발했다.

서머스 부장관과 립튼 차관은 하버드 대학 출신의 학자이다. 서머스 부장관은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가 MIT 교수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제자였으며, MIT를 거쳐 31세의 최연소 나이에 하버드대 종신 교수직을 받아낸 스타 학자였다. 립튼 차관 역시 하버드에서 경제학 박사를 했다.

장관의 실물 경제와 부장관과 차관의 학문적 이론을 조화함으로써 이들은 국제 금융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들은 나이도 젊다. 장관이 (1998년 현재) 59세이지만, 부장관 43, 차관 44, 차관보는 36세의 젊은이다. 이들은 문제 국가를 수차례 방문, 그들에게 자유시장 경제 원리와 국제 시장 논리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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