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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미쓰이 스미토모 코노이케, 300년 재벌의 뿌리…오사카 호상 영향력 막대
에도시대, 거상이 활약하다…재벌의 태동
2019. 08. 02 by 김현민 기자

 

1603년 일본에 에도(江戶) 시대가 개막한지 100여년이 지나면서 막번(幕藩) 체제가 안정되고, 문치정치로 전환되면서 신흥 대상인들이 나타났다. 특히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 겐로쿠(元禄) 연간(1688!~1704)에는 경제가 호황을 이루었다. 농촌이 번영하고, 산업이 발달했다. 농촌의 상품생산과 결부해 도시의 상업자본이 도매상·중개상 등을 영위하며 성장하게 했다. 에도시대의 거대상인들이 이때 나타났으니, 이들을 겐로쿠 호상(元禄 豪商)이라고 불린다.

겐로쿠 상인들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되는데, 그 첫째는 막부와 각 번이 추진하는 각종 토목공사에 참여하고 자재를 공급하는 사업에서 떼돈을 번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번에 큰 돈을 벌었지만, 사업이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이런 유형을 투기형 상인이라 부른다.

이에 비해 착실하게 영업활동을 벌여 오늘날까지 기업을 이어온 호상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가문이 포목과 대금업으로 성장한 미쓰이(三井) 가문, 환전사업과 양조장과 해운업을 운영한 코노이케(鴻池) 가문, 구리제련과 광산개발에 종사한 스미토모(住友) 가문은 현대에도 재벌로 번영하고 있다.

 

사잔작가 펠리체 베아토가 1865~1866년 사이에 촬영한 에도성. /위키피디아
사잔작가 펠리체 베아토가 1865~1866년 사이에 촬영한 에도성. /위키피디아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자이바츠(財閥)라는 용어가 그대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자이바츠와 한국의 재벌은 그 개념이 다르다. 일본의 재벌은 2차 대전에서 패전한 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국 군정의 명령에 의해 해체되었고, 그후 일본인이 다시 정권을 맡은후 슬슴슬금 다시 집결했다. 따라서 전후 다시 집결한 일본의 대기업결합을 우리나라에서는 자이바츠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그 시초는 우리나라의 재벌과 다름이 없었다. 일본의 재벌은 에도 시대에 시작되었고, 초기 일본 재벌은 가문에 의해 운영되고, 가문으로 경영권이 내려갔다.

현재 일본 3대 자이바츠(財閥)는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스미토모(住友)를 일컫는다. 이중 미쓰비시는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에 출발했지만, 미쓰이와 스미토모는 에도 시대에 사업을 시작해 그 역사가 300년을 넘는다. 게다가 에도시대 최대 자이바츠였던 고노이케(鴻池)도 오늘날 여러 차례의 합병을 거쳐 일본 최대은행의 구성멤버로 이어지고 있다.

 

에도시대 미쓰이가문의 저택 그림 (富嶽三十六景) /위키피디아
에도시대 미쓰이가문의 저택 그림 (富嶽三十六景) /위키피디아

 

미쓰이 재벌은 시조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1673년 교토와 에도(도쿄)에서 에치고야(越後屋)라는 포목점을 연 것이 시초다. 그후 교토와 오사카에서 환전 점포를 열었다. 미쓰이 포목점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정찰제와 현금 거래를 내세웠다. 또 비가 오면 고객에게 회사 이름이 새겨진 우산을 빌려주는 등 현대식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미쓰이 가문은 메이지 유신때 유신세력의 자금 요청에 부응해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메이지정부의의 대외개방정책에 적극 호응해 은행, 무역, 광업 등에 진출하며 세력을 넓혔다. 1909년 지주회사격인 미쓰이합명회사(三井合名會社)를 세우고 재벌의 면모를 갖췄다. 이후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시점에는 약 270개의 회사를 보유한 거대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태평양 전쟁 전에 1위의 재벌로 부상했으며, 산하에 일본 주식시장 시가총액 1위인 토요타를 포함하여, 도시바, 도레이, 후지필름 등의 유명 기업이 포진하고 있다.

특히 미쓰이 재벌의 첫 포목점인 에치고야는 1904년에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으로 개칭했으며, 이 백화점은 1930년에 경성점을 개설한다. 미쓰코시 경성점은 해방후 적산기업으로 분류되어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 지금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되었다.

 

1914년 미쓰코시 백화점 /위키피디아
1914년 미쓰코시 백화점 /위키피디아

 

스미토모 재벌의 시조는 스미토모 마사토모(住友政友). 그는 원래 승려였으나 승려직에 별 뜻이 없어 이내 환속하고, 1630년대 교토의 한 절에서 책과 약을 파는 상점 후지야(富士屋)를 세우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스미토모 가문은 오사카로 본거지를 옮기고 구리 제련 사업에 뛰어들었다. 제련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에도시대(1603~1867) 일본의 제련 사업을 사실상 독점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업의 출발은 미쓰이 재벌보다 빨랐으며, 세계의 가문 기업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시대(1868~1912) 초반까지 직접 구리광산 개발을 하여 관련 사업들을 키우며 성장하기 시작하며 기업의 틀을 갖춰가기 시작한다.

2차 대전후 다른 재벌과 함께 해체되었으나, 이후 스미토모은행, 스미토모금속 등을 중심으로 비공개 중역 모임을 구성해 다시 결합했다.

 

오사카에 있던 옛 스미토모 재벌 본사 /위키피디아
오사카에 있던 옛 스미토모 재벌 본사 /위키피디아

 

고노이케가의 시조 고노이케 나유후미(鴻池新六) 초상 /위키피디아
고노이케가의 시조 고노이케 나유후미(鴻池新六) 초상 /위키피디아

 

고노이케 재벌의 창시자 고노이케 젠에몬(鴻池善右衛門)은 에도 시대에 오사카 지역에서 활동하던 거상이었다. 해운업, 환전업을 거쳐 다이묘들을 대상으로 한 대부업을 하면서 상인으로서 크게 성장했다. 본명은 마사나리(正成)이며 스스로를 젠에몬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고노이케 젠에몬이라는 이름이 대대로 고노이케 가문 당주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후 고노이케 가문은 사업을 점차 확장하여 3대 젠에몬 시대에는 금융업의 틀을 잡았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10대가 이어졌다. 10대 젠에몬이 세운 고노이케 은행은 지금의 미쓰비시 UFJ 파이낸셜 그룹이 되었다.

 

이밖에 1662년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서 개업한 시로키야(白木屋) 포목점도 현재까지 사업을 이어가고, 오늘날 다이마루(大丸) 백화점은 1717년 교토에서 시작한 포목점의 연장선이다.

 

세계사에서 자본주의는 상업의 시대로 시작해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화하며 고도의 산업화 단계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쳤다. 일본은 19세기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화를 했는데, 앞서 에도 시대에 거상들에 의한 상업화 시기를 거치게 된다.

에도시대에 대중소비사회가 진척되었고, 시장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에도 정권은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 한 구멍만 열어놓고 쇄국정책을 취했지만, 내수의 왕성한 힘으로 자립자족과 상업의 시대를 창출하게 되었다. 에도시대의 자립자족 정책은 일본 내에서의 아우타르키(Autarkie) 경제를 형성하면서 경제 각 분야의 향상을 가져왔다. 농기구 혁신을 위해 제철 기술이 발달했고, 철 생산량이 증가했다. 어망은 삼베로 만들었고, 비단 생산을 위해 자체적인 노력이 가해졌다. 등유는 채소 씨앗과 면화씨 기름에서 만들었고, 자체적으로 염료를 개발했다. 이러한 상품 생산이 교환을 필요로 했고, 이를 중매할 상인을 태동시켰던 것이다.

시장경제는 현금 결제의 필요성을 높여 화폐경제가 형성되었고, 원격지 송금을 위해 어음이 활용되 신영경제를 창출했다. 고노이케와 미쓰이와 같은 거상들은 이 과정에서 큰 돈을 벌었다.

에도시대의 경제는 거상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거상들은 교토, 에도, 오사카의 삼도(三都)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방의 번에서도 지역상인들이 나타났는데, 하카다의 거상 시마이 상인이 그런 부류다.

막부도 다이묘도 거상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미쓰이, 스미토모, 고노이케의 3대 거상들이 금융자본과 상업자본을 주물렀고, 국가경제와 지역경제에 깊숙하게 간여했다.

에도시대의 유학자 가모 켄페이(蒲生君平)오사카의 호상이 한번 분노하면, 천하의 제후들이 움추린다는 명언을 남겼다. 오사카 상인들이 에도 막번체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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