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무역의 시대
아이누족의 고샤마인 봉기, 샤크샤인 봉기 등을 진압하며 홋카이도 영토화
일본인, 아이누족의 홋카이도를 빼앗다
2019. 08. 03 by 김현민 기자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막부(幕府) 우두머리 쇼군(將軍)의 공식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다. 쇼군은 나라, 헤이안 사대에 동쪽의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 파견하는 장군의 명칭이었다. 일본 군부가 정벌할 대상이었던 오랑캐는 에미시(蝦夷) 또는 에조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에조는 일본족인 야마토인들이 열도로 이주해 정착하기 이전의 원주민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에조는 오늘날 아이누족과 동일시된다. 아이누족은 일본 야마토족이 일본 열도에 거주하기 이전에 조몬(縄文)문화를 형성했고, 현재 아이누의 전설 유카 우포포에 "아이누족은 태양의 아이들이 오기 10만 년 전에 이 곳에 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는 야마토인이 원주민이었던 에미시를 쫓아내는 과정이었다. 일본 고대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진무(神武)천황이 동정(東征)하면서 에미시는 홀로 백 사람을 맞는 강한 병사라 가로되 사람 많아도 저항 없이 지고 말았네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야마토 시대의 에조 영역 /위키피디아
야마토 시대의 에조 영역 /위키피디아

 

에조는 일본에 복속을 거부했다. 서기 600년대에 에조는 관동(關東)과 동북지역까지 차지했으나, 그후 일본인들이 야금야금 땅을 넓히면서 본섬(혼슈)에서 에조를 몰아냈다. 13세기경에 에조는 홋카이도(北海道)로 쫓겨나 생활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홋카이도를 에조가시마(蝦夷) 또는 에조치(蝦夷地)라 부르며, 에조의 땅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족들은 그곳마저도 그냥 놓아 두지 않았다. 야마토인(大和人)들이 슬금슬금 홋카이도로 진출해 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홋카이도 서남부 오시마(渡島) 반도에 진출해 제철기술이 없었던 아이누인들과 교역을 했다. 야마토인들은 홋카이도에 12곳의 무역거점(道南十二館)을 두어 아이누족들과 거래를 했다.

 

1457년에는 고샤마인 전쟁이라 불리는 아이누족의 무장 봉기가 일어난다. 이 봉기는 지금의 홋카이도 하코다테(函館)에서 일본인 대장장이와 아이누인 소년간의 다툼이 원인이 되었다.

어느 아이누 소년이 일본인 대장장이에게 마키리(작은 칼)을 주문하려고 했는데, 품질과 가격문제로 실랑이를 벌였고, 대장장이가 소년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이 살인사건이 계기가 되어 홋카이도 동부 아이누 족장인 고샤마인이 아이누족을 단결시켰다. 14575월에 아이누족은 조직적으로 일본인에게 맞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아이누군은 각지에서 봉기해 일본인들의 무역거점 12곳중 10곳을 점령하며 기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458년 다케다 노부히로(武田信広)가 이끄는 일본 무사단에 의해 아이누군의 지도자인 고샤마인의 부자가 살해되고, 아이누 봉기군은 붕괴되었다. 아이누의 대()야마토 투쟁은 이후 1세기 동안 계속 되지만, 노부히로 중심의 무사단이 결국 마쓰마에 번의 지배권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이 봉기를 계기로 일본은 홋카이도 남쪽 꼬리 부분인 오시마 반도에 마쓰마에 번(松前藩)을 만들어 영토로 편입시켰다.

 

도남 12관 /위키피디아
도남 12관 /위키피디아

 

1464년 오닌(應仁)의 난을 계기로 일본 열도는 100년 이상 다이묘들 사이에 전쟁을 벌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돌입했다. 내전을 피해 많은 일본인들이 홋카이도로 건너갔고, 야마토인들의 대량 이주로 인해 아이누족의 터전은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일본 동북지방의 사무라이였던 카키자키(蠣崎)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부터 에조치(홋카이도)의 지배 및 교역권을 공인받았다. 에도 시대에 들어 카키자키 가문은 성을 마츠마에(松前)로 개명하고 다이묘의 반열로 올라서게 된다.

오시마 반도를 마츠마에 가문은 16세기 중엽에 아이누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교역으로 얻은 이익의 일부를 아이누의 추장들에게 분배했다.

마츠마에 가문은 아이누와의 교역을 독점하며, 교역 장소를 자신의 성 아래로 한정시켰다. 번은 오시마반도 남부에 와진치(和人地)를 두어 본토인의 거주지역을 한정하고, 아이누의 거주지역인 에조치와의 왕래를 엄격히 제한했다. 아이누족은 수산물, 동물가족, 조류의 깃털, 해초류를 팔았고, 야마토족은 철제품, , 목면, 자기류 등을 교환했다.

마츠마에 번은 가신들에게 에조치 내에 설치된 각지의 상업장(아키나이바)에서 아이누와의 교역권리를 부여했다. 아이누는 마츠마에 번 이외와의 교역이 금지되고 교역의 장소도 아키나이바()에 한정되었다. 마츠마에 번은 또 교역품의 가격도 일방적으로 결정해 아이누들의 불만을 샀다.

 

이아누족 봉기를 이끌었던 샤크샤인 동상 /위키피디아
이아누족 봉기를 이끌었던 샤크샤인 동상 /위키피디아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마츠마에 번은 아이누족을 가혹하게 지배하려 했다. 영주가 사냥을 하는데 필요한 매를 잡아오라고 요구하고, 아이누족의 영토에 마음대로 들어가 사금을 캐고, 아이누족의 생업기반은 연어를 대량으로 잡아갔다. 1665년엔 마쓰마에 번이 재정난이 심화되자, 연어 100마리와 교환하던 쌀의 기준을 종전 두말(30kg)에서 7(10,5kg)로 일방적으로 낮췄다. 이런 부당한 조치에 대드는 아이누족에게 아이를 잡아가겠다면서 협박을 가했다.

우타후라는 아이누의 한 족장이 마쓰마에 번청에 가서 무기를 팔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돌아오던 중에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천연두였는데, 아이누족들 사이에 마쓰마에 번이 독살했다는 소문으로 번졌다. 소문이 확산되면서 아이누족 중에 샤쿠샤인이라는 족장이 대표로 나서 각 부족에게 봉기를 호소했다.

16696월 샤쿠샤인의 요청으로 아이누족이 일제히 봉기에 나서 2,000명의 군대를 조직했다. 아이누군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사금광산, 상선을 습격하고, 일본인 356명을 살해했다.

기습을 당한 마쓰마에 번은 에도 막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막부는 3개 번에서 병력을 모아 마쓰마에번에 투입했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일본군의 승리로 진행되었다. 아이누족들은 활이 주요 무기였고, 일본군을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누족의 결전의식도 강했다. 그들은 1년간 장기전을 펼쳤다.

마쓰마에 번은 전쟁이 장기화하고 아이누와의 교역이 중단됨에 따라 피해가 커졌고, 막부가 아이누에 대한 독점 교역권을 해지할 경우를 두려워했다.

마쓰마에 번은 계략을 꾸몄다. 샤쿠샤인에게 화해를 제의한 것이다. 샤쿠샤인도 더 이상 전쟁을 끌기 힘들었고, 번청으로 가서 휴전을 하기로 약속했다. 16701023, 마쓰마에 번청에서는 일본인과 아이누의 화해를 다짐하는 잔치가 열렸다. 주연이 한창이던 시각에 마쓰마에 번의 군인들은 샤쿠샤인을 덥쳐 모살해 버렸다. 다른 곳에서 열린 화해의 주연에서 다른 아이누 부족장들도 동시에 주살되었다. 일본인들의 비열한 행동에 아이누족들은 분노했지만, 지도자를 잃은후 그 세력은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야먀토인들은 아이누족을 각개 격파의 방법으로 제압해 나갔다.

 

아이누족 (1902년) /위키피디아
아이누족 (1902년) /위키피디아

 

샤크샤인 전쟁 이후 아이누족은 야마토인의 노예로 전락했다. 일본인 상인들이 홋카이도 각지에서 교역과 어업생산을 장악하게 되었고, 아이누족들은 어장에 고용되어 과도한 노동에 이용되었다.

1789년에는 홋카이도 동쪽 쿠나시리메나시 지방에서 다시 아이누들의 봉기가 발생했다.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아이누들은 봉기해 일본 상인과 상선을 습격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조직적이지 못했던 이 봉기는 쉽게 붕괴되었는데, 마쓰마에 번은 아이누 71명을 사형시켰다.

이후 홋카이도는 일본인에 의해 완벽하게 통합된다. 1863년 나라여대(奈良女大)가 발행한 지목일지(知床日誌)라는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아이누 남성들은 낙도에 5~10년간 부역을 했고, 여성들은 위안부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누족들은 그후 일본인에 의해 전염된 천연두에 많은 사망자를 냈고, 1804년 현재 인구 23,797명으로 파악되었다.

 

이아누족 상징기 /위키피디아
이아누족 상징기 /위키피디아

 

메이지(明治)시대에 에조치(蝦夷地)를 홋카이도(北海道)라 개칭하고, 일방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 메이지 정부는 호적을 만들어 아이누를 일본국민으로 간주하면서도 구토인(舊土人)이라며 일본 본토인 와진(和人)과 구별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선주민인 아이누의 권리를 묵살하고, 어장은 일본인 경영자에 의해 독점되고, 사슴사냥이나 강에서의 연어사냥도 금지되었다. 토지는 개척자나 일본인 자본가에 우선 매도되었고, 아이누의 생활의 기반은 급속하게 약탈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토왜척결 2022-10-08 13:16:21
일본은 그때에도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군요. 참 더럽고 사악한 종족입니다

대한제국 2021-12-13 19:18:07
너무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