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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미국은 장기호황, 일본은 장기불황 진입…극심한 환율 변동에 투기꾼 형성
[1997 아시아위기 원인②] 미-일 환율전쟁 여파
2019. 08. 06 by 김현민 기자

 

20세기 후반의 국제 환율 구조는 미국과 일본, 독일의 세 나라 재무부와 중앙은행이 벌이는 힘의 대결에서 형성된다. 특히 미국의 이해관계가 일본이나 독일의 역학관계보다 환율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국제 통화질서는 미국이 한쪽에 버티고 서있고, 다른 한편에 일본과 독일이 미국 달러를 견제하는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 미국이 국내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를 올리면 엔화와 마르크화는 떨어지고, 미국이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달러를 절하하면 엔화와 마르크화는 절상됐다. 국제 외환 시장은 미국의 세계 지도력에 의해 요동쳤고, 브레튼우즈체제가 무너진 1970년 이후 그 현상은 더 심화됐다.

 

19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당시 폴 볼커(Paul Volker) Fed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지속적으로 인상했다. 물은 낮은데로 흐르고, 돈은 이윤이 높은데로 흐른다. 미국 금리가 올라가면 달러화 표시 금융자산의 이윤이 높아져 국제 시장의 유동성이 달러로 전환돼 달러 강세가 진행됐다. 1970년대 후반에 달러는 유럽 통화에 비해 50% 절상됐고, 일본 엔화에 대해선 190엔에서 260엔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무한정 달러강세가 지속될 수 없었다. 고금리는 미국 기업의 위축을 가져왔고, 달러 강세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가중시켰다. 미국 기업들은 국내에서 기업을 할 수 없었다. 달러가 강했기 때문에 인건비와 자재비가 싼 외국으로 공장을 옮겼다. 일본과 유럽 자동차가 미국 시장을 잠식해 들어왔고, 저가의 일본 반도체 유입으로 미국 반도체 산업은 거의 전멸 상태에 직면했다.

 

미국은 경기 부양을 위해 힘으로 달러 약세를 밀어부쳤다. 이른바 플라자 협정이다. 19859월 뉴욕 맨해튼 중심가 플라자 호텔에서 미국과 일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선진 5개국(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비밀리에 만났다. 이 모임에서 엔화와 마르크화에 대해 달러화를 절하한다는 합의가 전격 발표됐다. 갑작스럽게 발표된 선진국간의 합의는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었고, 곧이어 달러가 절하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시장개방과 통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동시에 달러 절하를 강요했다. 플라자 합의에서 선진국들은 금리를 인하하되,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를 좁히기로 했다. 미국의 당시 장기금리는 10.8%를 웃돌아 일본 금리에 비해 5.0% 포인트 높았으나, 그해 연말에 4% 포인트로 좁혀졌다. 금리 차가 좁혀짐에 따라 달러에 대한 매력은 줄어들고, 엔화 가치는 1달러당 200엔으로 올라갔다.(환율은 하락).

일본은 미국의 강요로 결정된 플라자 합의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엔화는 1987년까지 강세를 지속, 130엔까지 절상됐다. 그후 90년까지 일시 하락세가 있었으나,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199580엔까지 하락했던 것이다. 10년 동안 일본 엔화는 3배 이상 절상됐다.

엔화 강세는 초반에 일본 경제의 호황을 불러일으킨 듯 싶었다. 일본 부동산 값은 오를 대로 올라, 동경도() 땅을 팔면 미국 국토 전체를 살 수 있다는 평가도 있었다. 니케이 지수는 1990년대초 대망의 4만 포인트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일본 돈은 엄청난 위력을 떨쳤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의 호텔과 콘도, 별장은 거의가 일본인 소유였고, 하와이 선물가게에서는 엔화를 더 선호했다. 엔화를 가지고 있으면 은행 금리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선물 가게 주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서투른 일본어로 이라샤이마세하며 허리를 굽혀 일본 고객을 반겼다. 소니사는 미국의 자존심이라는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했고,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 센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소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기고만장함은 미국인들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미국이 일본에 진 채무를 캘리포니아 주와 바꾸자는 제안이 일본 내에서 나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안으로 곪아갔다. 10년전에 100 달러에 수출하던 물건이 같은 제조원가로 300 달러에 팔리는데 수출 지향적 공업국가가 이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또 일본은 미국 재무부 채권에서도 큰 손해를 보았다. 일본은 1 달러당 200 엔에서 미국 국채를 대거 샀는데, 엔화 강세가 무한정 계속되니, 손해가 막심했다. 일본 기업들은 동남아로 공장을 옮겨, 일본 내 산업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됐다.

1994년 노무라 증권의 한 경제학자가 엔화 강세가 지속되면 일본의 산업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개탄할 정도로 엔화강세는 일본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엔고가 장기화되면서 일본 산업은 위축됐고, 거만하던 일본 경제가 만들어낸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었던 일본 은행들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부실 여신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본의 호황은 1990년을 기점으로 막을 내리고 장기 불황에 접어들었다.

엔고는 일본의 장기불황을 가져왔지만, 한국과 아시아에는 반대급부를 창출했다. 한국을 뒤따라오던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1990년과 95년 사이에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한국은 이 기간 연평균 7.5%, 인도네시아 7.7%, 중국은 무려 11.1%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의 주요 수출 대상국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엔화에 대해 자국 통화 약세를 유지함으로서 대일 수출을 늘렸고,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을 줄였다. 일본에서 탈출한 산업들이 대거 동남아시아로 옮겨갔다. 방대한 엔화자금은 국내 금리가 낮았기 때문에 아시아로 흘러 들어갔다.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불리던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등은 한마디로 엔고의 덕을 톡톡히 누리며 부를 살 지워 나갔다.

 

그러나 엔고는 더 이상 진행돼지 않았다.

로버트 루빈 /위키피디아
로버트 루빈 /위키피디아

 

1995년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두번째 재무장관으로 등장한 로버트 루빈은 입만 열면 강한 달러가 미국에 이익이라며 강한 달러’(strong dollar)를 노래하듯 외쳤다. 그는 일본의 장기 복합불황을 구제하기 위해 달러강세로의 반전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3(빅스리) 대표들이 루빈 장관을 찾아가 달러 강세로 수출경쟁력이 약화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때 루빈 장관은 그들의 호소를 가볍게 물리쳤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이자율이 높아지면 미국 자동차가 경쟁력이 높아집니까. 달러가 강하니까 수입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므로 오히려 제조원가가 낮아졌지 않습니까.”

 

월가의 프로 외환딜러 출신인 루빈은 강한 달러가 미국 경제를 더욱 강하게 한다고 믿었다. 저가의 수입품이 유입됨으로써 국내 인플레이션 요인이 사라진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요인이 제거되고, 생산 원가가 낮아진다는 것이 루빈의 지론이었다.

루빈은 통화(달러)가 강세이면 무역적자가 누적된다는 케인즈 학파의 이론을 따르지 않았다. 통화가 강세면 싼 수입물자가 대량으로 들어와 국내 물가가 낮아지고, 제조업의 원가가 떨어진다는 새로운 이론을 수용했다. 게다가 그는 월가의 외환 딜러 출신이었다. 그는 달러가 강세로 되면 국제 유동성 자금이 미국으로 집중하고, 그 돈이 증시에 몰려 미국 기업들이 그 돈으로 운전자금으로 회전할 수 있다는 미묘한 국제 금융질서를 잘 알고 있었다. 달러 강세는 뉴욕 증시 활황을 가져왔고, 미국인 개인의 부를 늘려주었다. 돈을 더 찍어 내거나, 물건을 팔아 돈을 벌어오지 않고, 단순한 환율 변동으로 미국은 세계의 부를 집중시켰던 것이다.

루빈의 지론은 중앙은행의 그린스펀 의장과 호흡을 맞추며 미국의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했다. 1990년 이후 지속된 미국의 장기호황은 달러 강세를 더욱 부추겼다. 재선에 성공한 클린턴은 1997년초 미국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며 달러 강세에 대한 자신감을 반영했다. 달러는 120엔을 넘었다. 미국은 1980년대말 일본 자본에 거의 내주다시피 한 하와이와 뉴욕 중심가의 빌딩을 다시 되찾았다.

 

1995년 이후의 달러 강세-엔 약세는 미국과 일본의 이해가 일치된 결과였다.

국제 환율 변동에는 반드시 승자가 있고, 그에 상반된 곳에는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1995년초 엔화에 대한 달러 가치는 3개월 사이에 20% 폭락했다가 다시 3개월후 20%나 상승했다. 6개월 사이에 100만 달러를 투자, 엔화를 매입했다가 달러를 다시 살 경우 무려 40%의 이문을 얻는다. 국제 금융시장의 두 초강대국은 현명한 외환투자자들에게 연간 80%의 초고금리를 보장했던 것이다. 물 끓듯 변동하는 외환시장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가령 1995년초 일본 투자자가 100억 엔으로 1억 달러 어치의 달러표시 유가증권을 샀다가 엔화 강세에 못 이겨 3개월 후에 팔았다면 20억 엔을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국제 외환투기꾼들을 발호하게 하는 조건을 형성했다. 투기자들은 국가간 환율 변동을 면밀히 감시, 조만간 환율을 인하 또는 인상할 국가의 화폐를 사고 파는 수법을 동원, 해당 국가 중앙은행과 한판 전쟁을 벌였다. 조지 소로스와 같은 외환 투기자들은 국제 외환시장 지각변동의 냄새를 정확히 맡고 덤벼든다.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은 전문적인 외환 투기자들에게 굴복했다.

 

국제 외환 시장의 극심한 변동은 승전국과 패전국의 확연하게 구분지었다. 어느 나라든 극심한 환율 변동을 피하려 한다. 국내 산업의 파괴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플라자 협정 이후 10여 년간 엔고 현상에서 재미를 보았다. 따라서 세계 최강국인 미국 달러에 환율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고, 엔저 현상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그런데 95년 이후 엔저가 빠른 속도로 진행된데다 일본 경제의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아시아 국가들은 서서히 속병을 곪아갔다. 한국과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과 일본의 환율 전쟁을 남의 나라 이야기로 강건너 불구경하는 가운데 외환 투기자들이 승부를 걸어왔다. 그들은 투기자들의 전력과 힘을 간과했다. 96년부터 이미 외환투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아시아로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97년 들어서면서 그들은 아시아 국가와 일대 전쟁을 계획하며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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