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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무책임한 대출과열…1996년말부터 아시아 국가들의 성정정체로 불안의식 가중
[1997 아시아위기 원인③] 은행들의 탐욕
2019. 08. 07 by 김현민 기자

 

아시아 통화위기 직전에 국제 금융시스템에는 대출 과열 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세계은행(IBRD) 통계에 따르면 1996년도 개발도상국에 투자된 자금은 모두 2,850억 달러로, 한해전보다 20%나 늘어났다. 이중 80%2,438억 달러는 선진국 민간은행의 자금이고, 정부 베이스 지원이나 IMF등 공공기관의 자금은 412억 달러에 불과했다. 민간 자금의 증가율은 1996년 한해동안 전년대비 32.3%(600억 달러) 늘어난데 비해, 공공 자금은 오히려 23%(120억 달러)나 줄어들었다. 한국은 당시 세계은행 기준으로 개도국을 졸업했기 때문에 이 통계에서 한국에 투자된 해외자금은 제외돼 있다.

1990년에 선진국이 개도국에 투자한 자금총액중 민간자금과 공공자금의 비율은 거의 5050의 균형을 유지했었다. 그러던 것이 1996년에는 민간자금과 공공자금의 비율이 8020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 통계는 1990년대 들어 선진국 은행과 기업들이 엄청난 자금을 개도국에 퍼부었고, 특히 96년에 그 도가 극에 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1996년에 개도국에 신규 유입된 투자자금중 중국에 가장 많은 520억 달러가 들어갔고, 다음으로 멕시코 281억 달러, 인도네시아 178억 달러, 말레이시아 160억 달러, 브라질 147억 달러, 태국 133억 달러 순이다. 전체 민간자금 중에서 아시아 4개국에만 992억 달러로 40.6%에 이른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선진국 뱅커들이 아시아에 이처럼 많은 돈을 빌려준 것은 아시아 국가에서 높은 금리를 제공하고, 연간 10%에 가까운 성장을 하고 있었다. 국내 금리가 낮은 일본과 유럽은행이 미국 은행들보다 아시아 대출에 적극적이었다. 일본은 중앙은행의 오버나이트 금리가 0.5%1%에도 미치지 못했고, 유럽에서 대표적인 독일의 기준 금리가 4%에 불과했다. 5.25%의 기준금리의 유지하고 있었던 미국은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았고, 1980년대와 1994~95년 두차례에 걸쳐 라틴아메리카 경제위기로 은행들이 돈을 떼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투자에서 일본이나 유럽 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국제결제은행(BIS) 통계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일본 제외)에 대한 선진국 은행들의 대출액은 96년말 기준으로 일본이 1,186억 달러로 가장 많고, 독일 417억 달러, 프랑스 400억 달러, 미국 342억 달러, 영국 264억 달러였다.

선진국의 자금이 홍수처럼 몰려오자, 아시아의 번영은 한층 활기를 띠었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프르엔 세계 최대의 쌍둥이 빌딩이 건설됐고, 인도네시아는 수입품인 벤츠자동차와 경쟁하기 위해 국민차 생산을 추진했다. 태국 방콕의 운하 주변에 고층빌딩이 죽죽 들어섰다.

동남아 국가들은 1996년 상반기부터 수출이 둔화되고, 성장정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속성장을 기대하며 투자했던 선진국 은행과 기업들에게 서서히 불안의식이 느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아시아 금융위기는 결정적으로 선진국 은행들이 아시아에 투자한 돈을 빼나가면서 발생했다. 여기에 헤지펀드를 비롯, 국제 환투기자들이 지역 통화의 절하를 노려 투기행각을 벌임으로써 그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다.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이란 상품과 돈의 세계적 교역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나 국제시장에서 상품과 돈은 완연하게 다른 성격을 보이며 거래된다. 상품은 수요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고, 생산자 간에 치열한 경쟁을 한다. 한국의 현대와 기아가 만든 차가 미국 시장에서 경쟁을 하고, 일본 히타치의 냉장고가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의 냉장고와 유럽시장에서 경쟁한다. 상품 시장에서는 생산자의 기술과 생산비, 그 나라의 통화가치와 생산기반등 각종 요소가 경쟁 요소다. 세계적으로 과잉생산일 경우 국제 가격은 내려가고, 공급 부족일 경우 가격은 상승한다.

이에 비해 화폐, 즉 돈의 국제시장은 경쟁이 없다. 뉴욕 월가의 헤지펀드 자금이나 한국 종금사의 돈이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높은 국채 금리를 따먹기 위해 덤벼든다. 원화가치가 떨어질 우려가 있으면, 한국 돈은 금새 달러로 전환돼 미국 시장에 투자된다. 미국의 금리가 내려가면 월가에 몰려 있는 유동성 자금이 언제라도 미국 땅을 빠져 나가려 한다. 단일 시장에서의 금융상품은 국적과 가격이 무시된다. 본능과 광기, 심리적 패닉, 탐욕에 의해 움직인다. 한 헤지펀드가 브라질 헤알화를 공격하면 다른 헤지펀드도 함께 덤벼든다.

상품시장에서의 투기는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재기와 같은 제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금융 시장에서는 투기가 태반이다. 금융시장에서 하루하루 변하는 수치가 투자 및 투기 동기를 유발한다.

 

1990년대초 세계의 석학들은 아시아가 다음 세기를 주도할 것이라는 평가를 서슴지 않고 내놓았다. 서구 언론들은 동아시아 국가를 '아시아의 호랑이'라며 고도성장을 칭찬했다. 선진국 은행들은 아시아 지역에 탐닉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러나 그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한꺼번에 탈출했다. 극장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려고 불을 그었을 때 뒷사람이 "불이야" 하고 소리쳤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모두 좁은 문을 통해 도망치려고 하는 군중심리가 아시아에서 벌여졌던 것이다.

 

MIT의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교수는 아시아 위기가 터지자 미칠 것 같이 좋아했던 학자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를 '토네이도 추적자'(tornado chaser)라고 말했다. 미국 중부 평원에서는 해마다 토네이도라는 대형 회오리바람이 불어 막대한 피해를 준다. 그런데 토네이도를 추적하는 광기 어린 사람들이 있다. 토네이도가 발생할 지역을 면밀히 관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면 쫓아가서 이를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영화 '트위스터'(Twister)가 토네이도 추적자를 소재로 했다.

크루그먼이 몇 해전부터 아시아에서 토네이도가 발행할 것이라고 주장할 때 아시아 국가의 지도자들이나 학자들은 그를 미친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발생해 엄청난 위력으로 북상하자, 그제야 세계적인 석학으로 존경받았다.

폴 크루그먼은 토네이도(금융위기가)가 일어날 조건을 몇 가지로 정리했다. 1)

금융위기는 금융시스템이 나쁜 나라에서 발생한다. 공공 자금과 개인 자금의 경계가 모호한 나라에서는 언제나 금융위기가 일어난다. 아시아에선 장관의 사촌과 대통령의 아들이 은행을 설립하고, 국내외 자금을 일으켜 기업을 세웠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책임도 없이 특혜를 받아 게임을 벌였다. 이런 방식으로 나간 대출이 부동산으로 흘러 들어갔고, 경기 과열을 일으켰던 것이다.

경솔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버블을 부풀려 놓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를 믿고 무조건 돈을 빌려줬다. 이런 무책임한 대출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과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시아(고객)가 번영해 영업 수지를 맞추길 기대했다.

그러나 아시아가 내리막길을 걷자, 예민해진 외국인 투자자들이 은행돈을 빼내기 시작했고, 자산가치가 폭락했다. 자산 가치가 떨어지자, 정부의 담보마저 불안하게 생각했다. 외국인들을 탈출구를 찾아 일시에 빠져나갔다. 통화마저 붕괴위험에 놓이게 됐고, 상황은 악화됐다.

 

미국의 언론들은 아시아의 위기가 아시아 은행의 문제에서 발생했다고 일방적으로 몰아쳤다. 그러나 미국 학자나 평론가 중에서 국제 채권은행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도 많다. '자유방임주의의 종언'(The end of Laissez-Faire)이라는 책의 저자인 평론가 로버트 쿠트너(Robert Kuttner)씨도 그런 부류다. 2)

"아시아 경제의 붕괴는 구조적인 문제로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 국가의 지나친 개입, 은행의 자본력 취약 등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시스템으로 어떻게 20여 년간 이례적인 성장을 해왔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이 아시아 국가들이 규제받지 않은 (국제) 투기자본의 변덕에 갑자기 노출됐다는 점이다. 몇 달 사이에 통화가 100%씩 흔들릴 때 효율적인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시아 경제의 펀더멘털은 아직도 부러움을 사고 있다. 높은 저축률, 교육을 많이 받은 잘 훈련된 근로자, 높은 생산성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조건을 갖춘 국가도 글로벌 자본의 투기 목표가 됐을 경우 갑자기 통제 능력을 상실한다. 핫머니들이 유입돼 비정상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는 빌딩이 죽죽 올라간다. IMF는 글로벌 자본에 이익을 주기 위해 위기에 처한 국가에 긴축금융(고금리)을 운영할 것을 요구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변덕스런 국제 투기자본에 고개를 숙임으로써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아시아 국가의 금융제도에도 문제는 있었다. 건강치 못한 금융구조는 고도 성장기에는 문제로 되지 않았지만, 경기 침체기에는 돈을 회전시키는데 역작용을 한다.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예를 들어보자. 199711월초의 일이다. 말레이시아 굴지의 대기업인 레농(Renong)사의 대주주인 탄 스리 할림 사드(Tan Sri Halim Saad) 회장이 돈이 필요했다. 그는 전격적인 기동작전을 폈다. 자신이 컨트롤하는 계열사를 통해 자금난에 시달리는 레농사의 주식 33%를 비싼 가격에 사도록 했다. 33%는 자신이 컨트롤하는 비공개 주식이었다.

68,700만 달러가 거래됐고, 마하티르 정부는 특별히 이를 승인했다. 일종의 내부거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투자자들이 분노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레농은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었다. 그런데 90년 비밀 거래를 통해 마하티르 수상의 집권당의 기업 재산을 인수, 지주회사로서 급부상했다.

그러나 이젠, 정부와 기업의 유착은 더 이상 아시아에서도 벽에 부딪쳤다. 1117일 레농의 거래 소식이 발표되자, 투자자들은 레농 주식을 투매했다. 쿠알라룸푸르 종합주가지수는 그후 19%나 폭락했다. 일주일 후인 1124일 말레이시아 정부는 레농 거래에 대한 특별 조치를 취소했다. 탄 할림 회장은 레농의 경영권 독점을 재고하겠다고 말했다.

 

정경유착에 의한 금융시장 독점은 아시아에서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밀물처럼 들어온 외국 자본과 주식 투자에 힘입어 아시아는 지난 10여 년간 고도성장을 했지만, 관료와 기업인들은 잘못된 금융관행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통화가 안정되고, 주가는 상승할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다가올 세기가 아시아 시대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시아 지도자들은 착각했다. 국제자본의 힘이 얼마나 위력적으로 그들이 일으킨 경제 성장 위를 덮고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1) Fortune, 9832Asia: What Went Wrong

2) BW, 98727What sank Asia? Money sloshing aroun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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