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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7월 2일 바트화 고정환율제 포기…아시아 금융위기 시발
[1997 바트화 폭락③] 항복문서
2019. 08. 10 by 김현민 기자

 

1997619, 태국에 재무장관이 바뀌었다. 새로 재무장관에 오른 사람은 타농 비다야(Thanong Bidaya)라는 49세의 젊은 경제학자였다.

타농 장관이 중병에 신음하는 태국 경제를 회생하기 위해서는 부실 은행을 파산시켜, 썩은 살을 도려내는 극약 처방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태국은 정치적 전환기였고, 불안한 정정이 지속되고 있었다. 정정이 불안한 나라의 집권 여당에게 수백만 명의 고객이 매달려 있는 은행을 파산시키고, 해외 자본이 요구하는 시장 개방을 단행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제 자본의 논리보다는 국내 유권자에게 영합하는 것이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켜준다.

과도기에는 정치인들이 국제 금융시장의 논리를 수용하는 본질적 해결보다는 진통주사로 아픔을 잠시 잊으려고 한다. 타농 장관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 그는 실무경험과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과감한 개혁을 드라이브할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가 내놓은 대책은 기업의 부채 만기를 연장해주고, 금융기관의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파국을 며칠 연장하는 조치에 불과했고, 병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중병에 시달리는 태국 경제에 가장 결정적인 치명타는 헤지펀드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외환보유액에서 엄청난 자금을 꺼내 썼다는 점이다. 정부의 보유 외환은 태국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나 외국 자본은 태국을 썰물처럼 빠져나갈 태세를 보였고, 이를 막을 외환보유액은 거의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627일 태국 중앙은행은 마침내 자금난에 시달리는 16개 금융기관에 대해 영업정지를 명령하고, 이들 금융기관에 합병 및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하라고 지시했으나, 이미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차왈릿 용차이윳(Chavalit Yongchaiyuth) 총리는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재무장관을 전적으로 의지해왔다. 그러던 그가 앞으로 경제는 내가 책임을 지고 챙기겠다며 직접 나섰다. 그는 1997년도 상반기를 마감하는 630바트화 절하는 절대로 없다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침몰직전의 자국화폐를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차왈릿 총리의 남은 선택은 도박이었다.

 

1997년 태국 바트화 위기 당시의 차왈릿 용차이윳 총리 /위키피디아
1997년 태국 바트화 위기 당시의 차왈릿 용차이윳 총리 /위키피디아

 

199771일 자정, 홍콩 밤하늘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대영 제국 왕관의 보석이라던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경축하는 축포가 터지고,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전세계에 대해 서구 제국주의의 종식을 선언했다. 155년전 대영 제국은 마약전쟁을 일으켜 중국 남쪽의 자그마한 섬을 빼앗았지만, 이름 없던 어촌은 보배가 돼서 중국에게 되돌려졌다. 중국 중심의 중화경제권이 형성되고, 아시아가 다음 세기에 세계 경제 중심지가 될 것임을 기뻐하며, 아시아인들은 이날의 의미를 새겼다. 앵글로색슨족의 모국은 이제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깃발을 내리는 뜻깊은 날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태국 중앙은행은 마침내 월가 헤지펀드의 공격에 무릅을 꿇었다. 태국은 유럽 제국이 동아시아에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할 때도 독립을 유지한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프랑스와 영국의 틈바구니에서 태국 왕국은 일찍부터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국가를 유지했다. 율브리너 주연의 영화 <왕과 나>는 당시 태국이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렸다. 덕분에 태국은 베트남, 캄보디아와 같이 독립과정에 비극적 내전을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태국은 유럽인의 무력이 아니라, 유럽인들의 자본에 무릅을 꿇었다. 거대한 중국이 영국 함대 몇 척에 땅을 내준지 한 세기 후에 태국은 국제투기꾼의 몇 푼 안되는 자금공세에 휘말려든 것이다.

 

72일 타일랜드 은행은 그 동안 달러에 고정시켰던 환율제도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1 달러당 24 바트에 환율을 묶어두려고 발버둥치며 외환보유고를 풀었지만, 당해낼 힘이 없었다. 고정환율제를 해제하고 변동환율제를 도입키로 한 것은 중앙은행이 달러를 풀어 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환율 상승, 즉 바트화 폭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국 정부는 바트화 하락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차왈릿 총리는 TV 연설을 통해 바트화를 절하하면 태국은 가난해 집니다라며 결단코 환율을 방어하겠다고 선언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국제자본에 대항해 국민과 국내기업, 은행을 보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그러나 선진국 은행들은 태국에 빌려준 단기자금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고 돌려달라고 독촉해댔고, 외환보유액은 넉넉지 않았다. 이미 헤지펀드의 공격에 태국은 막대한 보유 외환을 써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10년 전 중남미 국가들이 겪었던 것처럼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급정지)을 선언하고, 경제는 파국 상태에 이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센 폭풍이 부는 바닷가에 배를 묶어두어 부서지느냐, 닻을 끊어 바다 위에 띄워 보내느냐의 갈림길에서 태국 정부는 마침내 닻을 끊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차왈릿 총리는 드디어 투기꾼들에게 항복키로 하고, 이틀전의 대국민 약속을 깨버렸다. 그리고 태국 중앙은행은 외국 자본에게 혜택을 주는 두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하나는 환율 안정장치를 제거, 바트화를 하락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금리를 올리는 것이었다. 외국 자본에게는 엄청난 이익을 돌려주는 것이지만, 국내 자본과 태국민에게는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조치들이었다. 수상은 국민들이 가난해 지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했다.

 

태국정부의 항복이 발표되자, 그날 뉴욕 맨해튼 남쪽에 포진한 외환딜러들은 미칠 듯이 기뻤다. 그들은 환호를 지르며,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타일랜드 은행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자 이날 하루동안 바트화는 1달러당 24.70 바트에서 29.55 바트로 무려 19.6%나 폭락했다. 태국에 100만 달러를 투자한 외국인은 하루만에 196,000 바트를 거져 얻는 폭리를 취하지만, 달러 빚을 지고 있는 태국인들은 그만큼 큰 부담을 안게 됐다. 태국 제품의 수출 가격이 낮아지고, 수입제품의 가격이 높아져 무역 적자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바트화로 표시되는 태국 은행과 기업의 대외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태국 은행과 기업이 지고 있는 부채가 700억 달러에 이르렀으므로 하루아침에 200억 달러에 해당하는 바트화 부담이 커진 것이다.

게다가 타일랜드 은행은 외국 자본이 태국 국경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금리를 대폭 인상했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게 빌려주는 단기 자금의 금리, 즉 재할인율은 하루만에 2% 포인트나 올라 12.5%로 치솟았다. 태국에 돈을 빌려준 선진국 뱅커들은 높은 이자 혜택을 누리지만 돈을 빌려쓴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이자 갚기도 벅찼다.

 

태국 정부와 언론들은 이 모든 원인이 미국의 헤지펀드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공격해 오지 않았더라면 경제 개혁을 통해 단계적으로 대외채무를 해소하고, 경제병을 치유할 수 있었는데, 벌떼처럼 덤벼든 국제 단기자본의 습격에 치명상을 당했다는 것이다. 고도 성장국가로 경제기반(펀더멘털)이 좋은 나라가 갑자기 파국으로 간데 대한 분노의 화살은 국제 투기자본으로 날아갔다.

태국언론의 타깃은 월가의 큰손 조지 소로스의 헤지펀드의 퀀텀 펀드였다. 90년대초 영국 파운드화 폭락에서 단물을 빨아먹은 경험이 있는 소로스의 펀드는 40억 달러로 태국 시장을 공격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이에 대해 소로스 사단의 사령관인 스탠리 드러큰밀러는 태국 언론의 주장을 부인했다.

40억 달러를 베팅했다는 얘기는 대단히 과장됐다. 바트화 하락으로 큰 이득을 볼 것으로 기대했지만, 태국 중앙은행이 바트화 하락을 지연시키고, 역외 바트화 거래를 조이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바트화 전쟁에서 이긴 것은 타일랜드 은행이지, 투기자가 아니다. 많은 투기자들이 돈을 잃었고, 중앙은행은 투기자들의 투매를 전환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소로스 측은 그러나 자신의 펀드는 약간의 이득을 보았음을 인정했다.

 

차왈릿 도박의 성패는 외국자본의 이탈을 막고, 환율을 진정시킬지 여부에 달려있었다. 차왈릿이 비장의 카드를 던진 그날, 태국 증권거래소의 SET 지수는 7.9%나 폭등, 잠시나마 승리의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서방의 자본들은 차왈릿 총리의 도박을 대단히 위험하게 바라보았다. 한 펀드매니저는 그가 미쳤거나, 대단히 용감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차왈릿 총리는 분열 직전의 연립 여당을 7개월째 이끌고 있었다. 외국 펀드들은 바트화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주식이나 채권, 외환시장에서 가격이 하락할 때 팔고, 상승할 때 사는 것은 투자자의 기본 원칙이다. 태국 중앙은행이 달러 보유자들에게 하루아침에 20%에 가까운 이상의 고수익을 보장했지만, 그들은 더 큰 것을 바라면서 태국 땅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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