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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미국, 아시아통화기금 창설안 거부…결국 태국 개혁은 IMF가 주도
[1997 바트화폭락⑤] 일본 주도론 무산
2019. 08. 12 by 김현민 기자

 

19977월 태국이 금융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지자, 일본은 사태의 본질과 심각성을 깨달았다. 일본은 2년 전의 멕시코 사태가 아시아에 불어닥친 것으로 파악하고, 태국의 파장이 인근 국가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직감했다. 일본은 1997년 여름의 태국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일본 총리는 6월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선진 7개국 정상회담(G-7)에서 아시아의 경제 불안을 토론 주제로 올릴 것을 제안했다. 태국 바트화가 폭락, 아시아 사태가 가시화되기 2주전이었다. 그러나 다른 선진국 지도자들은 분명치 않은 주제를 토론하기 꺼려했고, 일본도 당초 계획을 포기했다. 1)

아니나 다를까, 태국에서 위기가 발발하고, 그 여파가 이웃나라로 확산될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로서 사태를 조기 수습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이 1,000억 달러의 기금을 조성, 태국을 비롯, 주변 나라를 도와주자고 제안했다. 이른바 아시아 통화 기금’(AMF: Asia Monetary Fund) 구상이었다.

만일 이 구상이 제대로 실현됐으면, 아시아 위기는 동남아에서 진화돼, 더 이상 북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시아가 주도하는 기금을 투입했더라면 미국 주도의 IMF가 아시아 경제를 오진하고, 아시아 국가에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 논리를 주입시키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아시아 국가의 최대 채권국은 일본이 아닌가. 태국엔 일본 기업들이 가전, 자동차등 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고, 태국 외채의 절반이 일본 엔화 차관이었다.

 

미국은 아시아 위기가 확산되자, 처음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아시아 위기를 자동차가 달리다가 자그마한 고장’(a little glitch)이 생긴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나중에 의회의 반대에 부딪쳐 IMF 분담금 180억 달러를 1년 이상 질질 끌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일본이 선수를 쳐서 1,000억 달러의 기금을 마련하겠다는 안은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였다. 미국의 일부 관료와 경제학자도 뒤늦게나마 일본의 당시 주장이 옳았다고 인정했다. 스튜어트 아이젠스타트(Stuart Eizenstat) 미국 국무부 차관은 1년후에 당시의 잘못을 인정했다. 2)

우리는 1년 전에 많은 교훈을 배웠어야 했다. 정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아마도 이것(일본의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 주장)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통화기금 안은 미국의 반대로 가볍게 묵살되었다. 일본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저항하지 못했다. G-7 정상회담에서도 그랬지만,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펴지 못하는 내성적 성격의 나라다.

당시 일본의 제안을 묵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미국 재무부의 티모시 가이스너(Timothy Gerthner) 차관보(국제 담당)이었다. 그는 워싱턴에 입성하기 직전에 중국, 태국, 일본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일본의 제안이 가진 속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등 윗사람들에게 건의해, IMF를 통해 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되, 별도의 기구를 통한 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미국 재무부의 입장을 정리했다.

일본은 자신의 제안을 포기했다. 결국 IMF가 아시아 지원의 주체로 나섰고, 미국은 IMF를 앞세워 아시아 국가에 미국식 자본주의 원리를 이식시켰던 것이다.

일본은 미국이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방콕의 위기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729일 사쿠라, 스미토모, 산와, 일본 장기신용은행등 주요은행들이 태국 외채의 만기를 연장해주고, 태국에 대출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태국 중앙은행의 보유외환은 6월말에 324억 달러나 됐으나, 7월 한달 동안 바트화 방어를 하는데 250억 달러나 소비했다. 태국 사태가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 일본 은행들은 현지에 투자된 일본 기업을 가동하야 한다는 실리 때문에 태국을 지원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일본이 국제 문제를 주도하는 것을 미국이 싫어했다. 일본 대장성은 태국의 금융위기가 악화될 경우 추가 지원을 할 수도 있다고 시사함으로써 주도권 상실에 대한 미련을 보였지만, 주도권은 미국에 있었다.

동경에서 열린 태국 지원 국제회의에서 미국은 물론 독일,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서방국가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만 강조했을 뿐 돈 내는데선 꽁무니를 뺐다.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이후 국제 문제에서는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미국의 요구에 ’(No)라고 반대해본 역사가 없다. 태국 문제에서도 일본은 가장 많은 돈을 내면서 주도권은 IMF라는 미국 주도의 국제 기구에 내줬다.

 

자료: 위키피디아
자료: 위키피디아

 

IMF가 태국과 합의한 구조조정안은 가혹했다. 동경회의에 앞서 86일 태국이 발표한 구조조정안을 살펴보자.

42개의 금융기관 영업 정지. 태국은 이미 바트화 절하 이전인 62716개의 금융기관에 대해 영업정지를 이미 내렸기 때문에 연초 91개에 이르렀던 금융기관의 3분의2에 해당하는 58개의 영업을 정지시킨 것이다. 은행의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한 태국의 대졸출신 엘리트들이 대량으로 직업을 잃게 됐다.

부가가치세 세율을 7%에서 10%3% 포인트 인상.

1998년도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1,000억 바트(31억 달러) 삭감.

GDP에 대한 경상수지 적자비율을 5%로 제한.

 

태국은 IMF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여 경제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차왈릿 용차이윳(Chavalit Yongchaiyudt) 총리에겐 정치적 마지막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아시아 국가중 1997년에 IMF 구제금융을 받기로 합의한 나라의 최고통치자들은 모두 물러났다. 차왈릿 총리는 그해 118일 권력을 추안 릭파이(Chuan Leekpai) 총리에게 넘겨주었다.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은 권력 이양의 비운을 맞았다.

IMF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9월 중순 홍콩에서 발행되는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태국이 외환보유고를 확충하고 세금을 늘리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약속된 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IMF가 위협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태국 바트화는 물론 주가가 폭락했음을 당연하다. 태국 정부는 IMF 조건 이행을 다시 공포하고, 918IMF가 공식 성명을 통해 태국 지원을 보장함으로써 일과성 진동에 그치고 말았다.

IMF가 결정적으로 태국에 칼을 휘두른 것은 영업정지시킨 58개 금융기관중 얼마나 폐쇄시키는가 하는 문제였다. IMF는 다음 번에 지원할 8억 달러를 무기로 태국을 협박했다.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태국 정부는 영업정지시킨 금융기관중 많은 숫자를 살려주고 싶어했다. 미국과 IMF의 시각은 정치권과 밀착된 금융기관이 많았기 때문에 태국 정부가 지지부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IMF에 파견된 미국 대표 캐린 니사커스씨(Karin Lissakers)씨의 말을 인용해보자. 3)

태국이 파산의 시장원리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정치적 저항을 극복해왔다.”

 

IMF에서 이론을 만들어내는 경제학자들은 미국 재무부의 눈치를 많이 본다. 그들은 IMF가 빌려준 돈이 금융시스템 개선에 도움이 되어야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IMF는 아시아 스타일의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를 극복하지 않으면 아시아 금융위기는 극복할 수 없다고 인식했다. IMF는 국제 채권은행, 투자자, 투기자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채무국의 문제, 즉 정경유착 고리를 끊는데 주력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아들이 하는 국민차 생산계획을 포기하는데 과민하게 반응했고, 한국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보유 한도 철폐에 민감했던 것도 IMF의 이같은 정책 기조 때문이었다.

IMF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당신 나라가 해야할 일을 안하고 있으니 돈을 줄 수 없다고 하는 말 한마디다. 그러면 채무국은 벌벌 떤다.

한때 IMF에 근무했던 데이비드 폴커츠-란도(David Folkerts-Landau)씨는 이렇게 말했다. 4)

만일 IMF가 우유부단한 태국을 경고하기 위해 강경노선을 취했더라면 태국 경제는 파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따라서 외국 채권은행들이 채무만기를 연장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태국은 오랫동안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유지하면서 강대국의 논리를 잘 알고 있었다. 태국인들은 강대국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인내할 줄 알았으나, 인도네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IMF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수하르토 정권은 30년 독재를 종식시키고 말았다.

IMF는 자금 지급 중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불행한 결과가 오더라도 말을 듣지 않는 나라에는 산소 호흡기를 떼어버리는 잔혹함을 보였다. 태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그해 10IMF는 러시아가 세금을 증액하라는 조건을 이행하지 않자, 8억 달러의 예정된 자금을 끊어 버린 적이 있다.

태국은 마침내 IMF의 압력에 완전히 굴복했다. 128일 태국 재무부는 영업정지시킨 58개 금융기관중 두 개만 살려주고, 나머지 56개를 모두 폐쇄조치했다. 그러자 IMF는 말을 잘 안 듣는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태국의 개혁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8313일 워싱턴을 방문한 추안 릭파이 총리는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치하의 말을 들었다. 클린턴은 금융위기를 극복한 나라를 도와주지 않으면 투자자들은 손해를 볼 것이라며 월가의 투자자들이 태국에 가서 장사를 하라고 권했다. 클린턴은 태국에게 4억 달러 상당의 F/A-188대를 좋은 금융조건으로 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태국은 이웃 베트남과 미얀마, 중국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를 군사적으로 견제해야 하기 때문에 최신 전투기를 상당량 보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자들은 태국에 선뜻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태국은 98년초 퍼스트 방콕 시티은행, 사이암 시티은행, 방콕 오브 코머스등 3개 시중은행을 국유화했다. 미국의 시티은행은 퍼스트 방콕은행을, 네덜란드 ING그룹은 사이암 은행에 투자하기로 가계약까지 체결했으나, 그들은 아예 거져 먹을 생각으로 덤벼들었다. 태국 정부는 차라리 국민의 세금으로 이들 3개 시중은행을 사들여 국유화하기로 선택했다.

 


1) NYT, 98921Japan sees itself as a scapegoat of Washington in the Asia

2) 상동

3) NYT, 97128IMF's resolve to be tested in Thai case

4)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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