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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상업중시, 부국강병, 중화주의 탈피 주장…정조 사망으로 종언, 개화파로 이어져
영·정조 문화시대에 피어난 실학파의 꿈
2019. 08. 12 by 김현민 기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양반가의 서자 출신으로, 실학파 중에서 가장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스승인 박지원(朴趾源)이 그의 과격성을 타이르기도 했다.

그는 1786년 정조에게 병오소회(丙午所懷)를 올렸는데, 그의 주장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해외 통상을 위해 해상로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통산하는 것이 천하의 공통된 이치입니다. 일본, 류큐(琉球), 안남, 서양 등이 중국 민중(閩中), 저장(浙江), 자오저우(交州), 광저우(廣州) 등과 교역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외국과 같이 수로를 통해 교역해야 합니다.”

당시 조선은 중국과 국경무역을 통해 관무역을 했는데, 박제가는 바닷길로 중국 항구를 연결해 외국과 무역을 하자고 했다.

그는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돼 베이징을 네 번이나 다녀오면서 선진문물을 익혔고, 당시 해외통상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중국과 통상을 해 상품경제화하고, 경제적 이득을 얻자는 것이다.

둘째는 베이징에 있는 서양 예수회 선교사들을 초빙해 앞선 과학기술을 도입하자고 했다.

신은 중국 흠천감에서 역서를 만드는 서양인들이 모두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정통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관상감 비용으로 이들을 초청해 잘 대우하고, 나라 안의 자제들에게 그들의 천문학 등을 배우게 한다면 몇해가 지나지 않아 경세(經世)에 쓸만한 인재가 무성해질 것입니다.”

그는 다만 천주교와 서학을 분리해 포교활동은 금지하되, 과학기술만 배우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주교가 불러올 사상적 혼란과 전통파괴의 우려를 인식했던 것이다.

셋째, 관직이 없는 양반층을 생업에 종사시켜 유민화(流民化)를 막을 것을 건의했다. “대저 놀고 먹는 자는 나라의 해충입니다. 놀고 먹는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족들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무리들이 나라 안에 가득차 있는데, 벼슬자리만으로 그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놀고 먹는 양반들을 수륙운송이나 상업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가 분명한 조선시대에 상업은 말업(末業)에 해당했다. 사족(士族)을 말업에 종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조정이 자금을 대서 점포도 원조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박제가가 주장한 것은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라 할수 있다. 이미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 상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거상들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조선에서만은 상업은 천시되고 기피되는 직종이었다. 박제가는 상업을 발전시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놀고먹는 양반층을 그 일에 종사시키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있더라도 서얼 출신이었고, 그의 주장은 실현되지 못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정약용 생가에 재현된 거중기 모형 /김현민
경기도 남양주시 정약용 생가에 재현된 거중기 모형 /김현민

 

18~19세기초 조선에 새롭게 등장한 실학(實學)은 서양의 학문을 접하면서 시대상황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하려는 노력이었다. 유교 경전의 자구 해석에 몰두하거나 가례를 어떻게 지내느냐는 예학(禮學)에 매몰되어 있던 당대 성리학의 부질없음을 질타하고, 실용 학문을 추구하는 흐름이기도 했다.

실학의 발생은 영·정조 시대에 탕평책으로 인재를 널리 쓰고, 정조가 규장각을 세워 인재를 모으는 등 식자 사회에 관용이 베풀어지던 시대와 맞물린다.

정조는 즉위하던 1776년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워 당파와 상관 없이 문신들을 등용하고 문헌을 모았다. 1780년에는 지배 정당인 노론의 정적인 남인 가운데 체제공(蔡濟恭)을 규장각 제학으로 발탁하고, 잡직으로 검서관(檢書官)을 두어 적서 차별에 의해 재능을 발휘할수 없었던 인재들을 임명했다. 이 때 검서관에 발탁된 사람이 박제가,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이다.

영정조 시대 실학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집권세력에서 밀려난 남인파에서 유형원, 이익, 이가환, 정약용등이 나왔는데, 이를 성호학파라고 한다. 또 주류였던 노론계 학자들 가운데 베이징에 사절단의 경험을 가졌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를 중심으로 북학파가 형성된다.

두 파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호학파의 주요 관심은 경세치용(經濟致用)을 위한 제도연구였고, 북학파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적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성호학파이든, 북학파이든, 성리학이나 예학과 같은 허황된 학문에 매달려 있던 당시에 현실의 문제를 직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창덕궁 주합루.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지은 건물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실학자들이 활동하던 공간. /문화재청
창덕궁 주합루.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지은 건물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실학자들이 활동하던 공간. /문화재청

 

실학파의 선구는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다. 남인이었던 그는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해 전라도 부안 벽촌에 20여년간 칩거하면서 <반계수록>을 완성했다.

유형원의 관심은 토지에 있었다. 그는 오늘날 개념으로 치면 토지공개념을 주장했다. 토지의 사유(私有)가 모든 악의 근원이므로, 토지를 공유(公有)로 바꾸어 경작자인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는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또 균전제를 바탕으로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을 병사화하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도 주장했다.

성호학파는 유형원이 주장한 균전제의 실현 가능성을 놓고 여러 가지 모델들을 제시했다. 이익의 한전제(限田制), 정약용의 여전제(閭田制)가 그것이다.

아버지가 당쟁에 휘말려 장살되는 것을 목격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 초야에 뭍혀 글을 읽었다. 그는 노비가 아버지의 신분에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노비라고, 그 아들이 노비가 되어야 하는 신분세습제에 반대한 것이다.

 

실학자 홍대용이 태어난 터.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산면. /문화재청
실학자 홍대용이 태어난 터.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산면. /문화재청

 

실학자들 가운데 서양의 아시아 진출을 민감하게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북학파였다. 베이징을 드나들며 세계의 흐름을 남들보다 더 많이 볼수 있었던 게 그들의 사상을 진일보시켰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지구자전론을 주장했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지구는 회전하면서 하루에 일주한다. 땅 둘레는 9만리이고 하루는 12시이다. 9만리의 거리를 12시간에 달리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벼락보다 빠르고 포환보다 신속하다고 했다.

그의 지구자전론은 하늘은 둥글고, 대지는 네모났는데, 그 중앙에 중국이 있고, 사방에 야만족이 거주한다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의 중화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중화사상에 매몰되어 청()에게 굴복한 후에도 북벌론을 외치고 있던 조선 주류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박지원(朴趾源)<열하일기>에 삽입한 호질(虎叱)이란 자작소설에서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에 빠져 있는 유자(儒者)들을 통렬히 비판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선생 묘 /문화재청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선생 묘 /문화재청

 

실학파의 대단원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끝맺는다. 그의 방대한 저서는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요약된다.

그는 <경세유표> 이용감조에서 이렇게 썼다.

옛날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사용했던 일본도나 조총은 이미 낡았다. 이후 남북에서 침략이 있으면 조총이나 채찍, 몽둥이 따위는 사용할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급선무가 북학이라고 말한 것도 실로 시무(時務)를 통달한 말이다.”

정약용은 북학(北學)만을 담당하는 이용감(利用監)이란 별도의 관청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그는 수학을 강조했다. “100가지 기술의 교묘함은 그 근본이 수리(數理)에 있다. 반드시 삼각형의 각 변이나 각도의 예리함과 둔함이 서로 들어가고 차이나는 근본원리를 밝힌 연후에 그 법을 얻을수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형이상학으로 도()를 우위에 두고 형이하학으로 기()를 그 아래에 두었다. 정약용은 형이하학으로 천대받던 기술을 독립적으로 발전시키자는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북학파든, 성호학파든 실학자들은 구체적인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비주류인 남인이거나, 서얼 출신들도 많았다. 따라서 실학자들은 하나의 사상적 흐름으로 대세를 이루지 못한채 1800년 정조의 죽음으로 영정조 문화군주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곧이어 1801년 신유사옥으로 남인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면서 소리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실학파가 본 세계는 이후에도 진행되었고, 그들의 사고는 후에 개화파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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