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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시전 상인에게 부여한 금난전권의 규제 해제, 조선말 상업 활성화에 기여
정조의 신해통공, 시장진입 장벽 허물다
2019. 08. 13 by 김현민 기자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조선이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주자학은 농업를 근본으로 했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농업은 본업이고, 공상은 말업”(農本也, 工商末也)이라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질서에서 상업은 말업(末業)으로 천시되었다. 태조 때부터 수공업과 상업(工商)은 천례(賤隸, 천한 노비), 무격(巫覡, 무당), 창우(倡優), 기생등과 동급으로 취급되었고, 농민에게는 관직을 주어도 상인과 수공업자에게는 관직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한양에 수도를 건설하고 누군가는 먹을 식량과 물자를 대야 했다. 수도의 인구를 구성하는 왕실과 사대부, 군인은 모두 비생산 소비계층이었다. 조선 조정은 인구 10만으로 시작한 한양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관제 시장을 만들었다. 종로와 남대문 일대에 건설한 시전(市廛)이 그것이다.

 

3대 임금 태종은 정부 비용을 들여 4차례에 걸쳐 종로와 남대문 일대에 행랑을 건설해 상인들에게 점포를 임대해주고, 그들에게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에 대한 독점권을 주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도성 좌우 행랑이 대략 2,027이라고 했다. 이곳에 상인들이 입주해 관납 물자를 조달하고 공급했다.

왕조가 안정되고 인구가 늘어나고 지배층의 사치가 만연해지면서 상업은 번성했다. 관제 시장에 도전하는 상인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거리에 좌판을 깔거나 노점상을 차려 물건을 팔았다. 시전 상인들의 영역이 미치지 않은 서소문 주변, 한강 나루에 민간인들이 시장을 열었다.

관청을 등에 업고 영업을 하던 시전 상인들은 무허가 상인들을 난전(亂廛)이라 부르며, 그들의 시장 잠식에 항의했다. 조정은 관제 상인들의 말을 들어 난전을 감시하고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 권한을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하는데, 시장진입 장벽이요 규제장치였다.

 

구한말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 홈페이지
구한말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 홈페이지

 

조선 초기에도 관청에 의한 시장진입 규제를 뚫고 민간 상인들이 무허가 시장을 형성했다.

1514(중종 9) 9월 중종실록에 우찬성 신용개가 아뢰었다. “태평한 세상이 오래 계속되어 인구가 번성하였으므로 …… 또 지방에서 부역(賦役)을 도피한 사람도 또한 서울에 모여들어서 골목마다 시장 아닌 곳이 없으니……1)

인구가 늘면서 서울의 골목마다 난전이 형성되었다는 얘기다. 동대문 밖 동묘(관왕묘) 앞에는 여인들의 채소시장이 열렸고, 남대문 일대의 칠패(七牌)시장, 동대문 일대의 이현(梨峴)시장이 출현했다. 지금의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또는 광장시장의 원조는 조선초기의 난전이 그 모태가 되었다. 한강 백사장에는 경강(京江)상인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은 싹이 트던 조선 상업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고, 국토는 황폐해 졌다. 1601(선조 34) 8월에 이항복이 아뢰기를, “인구수는 평시에 비해 겨우 10분의 1입니다. …… 난후에 팔도의 전결(田結)이 겨우 30여 만 결로, 평시 전라도 한 도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나라의 모양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2)

하지만 서서히 전란의 상처를 딛고 조선의 경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조선 후기에 모내기, 즉 이앙법(移秧法)이 보급되고, 농민들도 다양한 농기구를 개발하고, 제언(堤堰()등을 축조했다.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잉여 농산물이 생겨났다. 새로운 농경지가 개척되면서 대지주가 나타나고 소작농이 몰락하면서 농촌사회에서 인구가 방출되었다. 농촌을 떠난 사람들은 광산의 임노동자가 되었고, 도시에서는 난전 상인이 되었다. 수공업에서도 민영화가 활성화되어 유기, 철기등의 수공업장에 물주(物主)라는 고용주가 임노동자를 고용해 물건을 생산해 자본을 축적했고, 상인들의 요구에 의해 주문생산이 이뤄졌다. 농업에서도 담배·인삼 등의 상품성 작물재배가 성행했다. 3)

17세기 중반 이후 200여년간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분화 현상과 상품경제 사회가 조선에서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구한말 행상의 모습 /서울시
구한말 행상의 모습 /서울시

 

상품경제의 싹이 트면서 상업 부문에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조선전기의 관제 상인인 시전이 금난전권을 휘둘르면서 영향력을 도성 안팎과 경강지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에 맞서 난전 상인들이 칠패·이현 시장을 다시 복구하고 송파·누원(도봉) 등 서울 외곽과 연결해 급팽창했다.

또 전국적으로 장시(場市)가 급성장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19세기초에 전국적으로 1,061개의 장시가 있었고, 5일장, 10일장, 15일장 등의 형태 가운데 대체로 5일장을 선호했다고 한다.

거상들도 나타났는데, 당시에 이를 도고(都賈)라고 불렀다. 도고는 관상(官商)과 사상(私商)이 있었는데, 공히 막대한 자본을 활용해 대량의 물건을 매집해 독점적 상거래를 주도했다. 도고 상인들은 매점매석을 통해 물건가격을 인상하는 바람에 상거래를 문란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상품중개업자인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 한강변과 전국 주요 포구에 발달했다. 이들은 상품매매를 중개해주고 수수료를 챙겼으며, 상인들을 상대로 숙박업과 화물의 보관, 운반도 담당했다. 때로는 화물을 담보로 똔을 빌려주거나 어음을 발행하는 금융업의 기능도 했다.

두차례 전란이 끝나고 한양 인구도 늘어 1648(인조 26)95,000여명에서 1669(현종 10)194,000여명으로 두배나 늘어났고, 18세기 전반에는 유동인구를 포함해 30만명으로 늘어났다. 한양의 인구가 불어 나면서 민영시장의 기능도 커져 칠패·이현시장이 시전을 능가하게 되었다. 1781(정조 5)에 칠패·이현의 두 난전의 어물 거래액이 시전 어물전의 10배에 달했다고 한다.

관영 시장과 민영 시장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난전 상인들은 성내 구석구석까지 물건을 배달해 판매함으로써 시전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가만히 앉아서 관급 물자에 의존하던 시전 상인들은 난전 산인들이 지배하던 송파와 누원 등지의 시장까지 금난전권의 보도를 휘두르려 했다. 이에 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의 폐지를 주장하게 된다.

 

금난전권은 조정과 시전상인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생긴 제도였다. 조정은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자를 시전 상인에게 요구했고, 시전 상인들은 국역(國役)을 치르는 만큼 특권을 부여받아 이익을 독차지했다. 금난전권의 주무관청인 한성부는 시전 상인들에게 난전을 잡아 다스리고, 난전의 물건을 모두 몰수하고, 죄를 면하는데 필요한 속전(贖錢)이 모자라면 곤장을 때릴수 있도록 허용했다.

가장 먼저 금난전권을 행사한 곳은 육의전(六矣廛)이었다. 비단, 무명, 모시, 종이, 어물 등을 공급하는 육의전에만 한정해 부여했던 금난전권은 시전 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채소, 과일, 젓갈등 소소한 물품에까지 확대되었다. 시전 상인은 1630년에 30여개에 불과했으나, 18세기말에 이르면 120개로 급팽창했다. 결국 금난전권을 가진 상인과 갖지 않는 상인 사이에 육탄전과 소성전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의 영향력을 수공업자에게까지 휘두르려 했다. 수공업자들은 물건만 만들 뿐, 장사는 상인이 하는 것이라며, 수공업자들이 직접 상가를 개설해 판매하는 것도 저지했다.

 

서울 어느 장날의 풍경. (1923년) /서울시
서울 어느 장날의 풍경. (1923년) /서울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에 대한 난전상인들의 불만이 확산되면서 정조임금은 영의정 체제공(蔡濟恭)에게 해법을 찾으라고 명했다.

체제공은 노론파가 설치는 조정에서 정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선택한 인물이었다. 체제공은 박제가(朴齊家) 등 실학파의 젊은 피를 두루 수혈했다. 박제가는 1786년 정조에게 병오소회(丙午所懷)를 올리면서 해외 통상을 위해 해상로를 열 것 베이징에 있는 서양 예수회 선교사들을 초빙해 앞선 과학기술을 도입할 것 관직이 없는 양반층을 생업에 종사시켜 유민화(流民化)를 막을 것 등을 건의하며 중상주의 정책을 건의한 바 있다. 정조가 박제가의 건의를 받아들였던 것일까.

조정에서 금난전권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시전 상인들은 집권세력인 노론에 자금을 대며 제도의 유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영조 때에도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정책을 시도했지만, 기득권세력의 반발로 철회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791년 정조 임금은 체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하게 된다. 신해통공의 기본 취지는 금난전권의 규제장치가 상업을 경직시키고, 그로 인해 물가 상승을 촉발하며 결국, 도시민의 경제적 압박이 커지게 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내용이다.

금난전권 폐지후 일어난 일화를 소개한다. 체제공이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수원 유수로 부임했을 때, 시전상인 70여명이 수원까지 가서 호소했다. 이에 체제공은 너희들도 백성이고 저들도 백성인데, 조정에서 다독여 구휼하는 도리에 어찌 피차의 차이를 두겠는가라며 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체제공은 시전상인들에게 이런 말도 했다. “행상이건 좌판이건 서로 있고 없는 것을 무역하는 것은 진실로 떳떳한 일이다. 그런데도 저자의 가게 자리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자기의 물건을 가지고 매매하는 것을 구속하거나 내쫓아서 도성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 4)

정조와 체제공의 과감한 시장규제 개혁으로 조선의 상업과 화폐경제는 빠르게 발전하게 되었다.

 


1) 중종실록 21, 중종 9(1514) 1115일 계유 1번째기사

2) 선조실록 140, 선조 34(1601) 813일 무인 1번째기사

3) 박은숙, 시장의 역사 (2008, 역사비평사) 122

4) 정조실록 37, 정조 17(1793) 310일 계묘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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