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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외환투기자들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넘보자 마하티르 총리, 음모론 제기
[1997 아시아 투기세력②] 음모론 대두
2019. 08. 14 by 김현민 기자

 

19977월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툭툭 건드려본 글로벌 외환투기꾼들은 서서히 도시국가 싱가포르와 홍콩을 넘보았다.

중국 정부가 홍콩 땅을 넘겨받은지 한 달도 못되는 시점이었다. 홍콩 통화당국은 투기자의 공격을 선제 방어했다. 오버나이트 금리(단기금리)를 종전보다 1.25% 포인트 높은 6.25%로 인상했다. 주식과 채권등 자본시장에 들어와 있는 외국 자본에게 큰 이익을 남겨줌으로써 이탈을 막자는 것이다. 싱가포르 달러는 약간의 하락은 있었지만, 곧 안정됐다.

홍콩은 통화를 안정시킬 두 가지 큰 무기가 있다. 그 하나는 나중에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었던 통화위원회제도(currency board)이고, 다른 하나는 넉넉한 외환보유고였다. 통화위원회 제도는 자국 통화가 약세로 돌아설 때 금리 인상을 연동시켜 통화를 안정시키는 방식이다. 아르헨티나가 1990년대에 이 제도를 도입, 환율을 방어했다. 홍콩은 또 중앙은행 창고에 636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외환을 보유하고 있어 투기자들이 공격해도 충분히 방어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홍콩 통화당국은 홍콩에는 투기자들이 발 디딜 틈이 없고, 환율은 안정적이다고 장담했다.

싱가포르도 1인당 외환보유액이 홍콩을 넘어선다. 싱가포르는 일부 투기자들의 공격에 맞서 1개월 단기금리를 2.437% 포인트 올려 6%대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싱가포르 달러는 투기자들의 공격에 못 이겨 718일 하루만에 2.3%나 떨어졌다.

 

아시아에서 빠져나간 달러는 중남미와 유럽 증시로 흘러 들어갔다. 국제금융시장의 펀드매니저들은 수익이 나지 않는 곳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 핫머니들은 순식간에 돈을 빼내 이익이 나는 곳을 찾아 나선다. 자신들이 투자한 돈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우려가 있거나, 보다 수익이 많은 곳을 발견할 땐 언제라도 돈을 빼낸다. 아시아 국가들은 두 가지 모두에 걸려들었다. 경기가 하강했고, 투기자와 핫머니 펀드매니저들은 수익이 나는 곳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의 펀드매니저들에겐 아시아가 이젠 매력이 없는 나라로 전락했고, 중남미가 꿀이 흐르는 샘으로 여겼다. 그들은 1994년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브라질에서 대거 빠져나와 동남아로 몰려들었지 않는가. 그들이 몰려 다니는 곳엔 주가가 오르고 빌딩이 올라가지만, 그들이 빠져나간 곳에는 폐허와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

헤지펀드들은 그해 동남아를 휩쓸기 앞서 폴란드의 즐로티, 그리스의 드라치마, 체코의 코루나, 슬로바키아 코루나등 중유럽 통화를 공격, 이미 한몫을 잡았다.

 

여기서 환투기꾼들이 앞서 체코를 공략한 과정을 살펴보자. (체코는 당시 슬로바키아와 분리했으며, 지금까지 코루나(koruna)라는 자국통화를 사용하고 있다.)

체코 정부는 19974월 자국통화를 방어하는데 2주일여 동안 약 30억 달러를 까먹었다. 체코 중앙은행(CNA)426일 하루에만 코루나의 급격한 환율 하락을 막기 위해 프라하와 런던 외환시장에서 10억 달러를 쓸어 넣었다. 30억 달러는 4월말 기준 체코 외환보유고 117억 달러의 4분의 1 수준. 과다한 보유외환 사용에 역부족을 느낀 체코정부는 다음날 두손을 들고 말았다. “시장 환율에 코루나를 맡기지 않겠다고 포기선언을 한 것. 바츨라프 클라우스 총리는 이날 재무장관등 일부 각료까지 경질했다.

국제 환투기꾼들의 코루나 공략은 체코의 나빠진 경제사정과 관련 있다. 그 해초 4개월간 무역적자폭이 536억 코루나(179,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환투기꾼들은 체코 경제가 급속한 수입초과를 보이자 조만간 코루나가 평가절하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때문에 환율이 떨어지기 전에 팔아치우고 떨어진 뒤에 사들여 시세차익을 노렸다.

체코의 외환위기는 주변국으로 확산됐다. 체코 위기가 확산되면서 외국 자본이 중유럽에서 빠져나갔다. 1995년 멕시코 외환 위기때 외국자본이 인접 중남미 국가들에서도 철수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중유럽의 경제여건은 동남아시아와 비슷했다. 유럽의 기준화폐가 되고 있는 독일 마르크화는 1995년초 이후 미국 달러화에 대해 37% 하락했다. 독일 경제의 영향력 하에 있지만, 달러에 환율을 고정시키려고 했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스 등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헤지펀드들에게 좋은 약탈 조건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엔화는 같은 시기에 달러에 대해 46% 하락, 마르크화보다 하락폭이 컸다. 아시아 국가들은 엔화보다 더 큰 폭으로 통화를 절하해야 일본 상품과 가격경쟁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에 환율을 고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것을 헤지펀드들이 모를 리 없었다.

 

1997725일 아시아 11개국의 중앙은행 총재들은 헤지펀드의 공격에 대한 공동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모였다. 그들이 합의한 내용은 고작 자국 통화가치 유지에 관한 공동연구를 하자는 것. 공동으로 헤지펀드의 공격을 방어하자는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했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었고, 그 동안 수억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까지 통화 방어에 부었던 중앙은행들은 이제 자기 살길을 찾아야 했다. 동남아시아의 통화 한두개쯤 무너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로 되었다.

아시아 중앙은행들의 모임을 지켜보며 공격의 강도를 다소 늦추었던 헤지펀드들은 다시 먹이감을 찾아 공세에 나섰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서서히 북상, 홍콩 달러와 한국 원화를 넘보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한국 원화는 이미 7월말에 헤지펀드의 공격이 시작됐다.

 

말레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1997년) /위키미디어
말레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1997년) /위키미디어

 

1997728일 아침,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한 호텔.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 미국 국무장관이 잠에서 깨어나 조간신문을 집어 들었다. 말레이시아 유력신문인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New Straits Times)였다. 그 신문은 그날 1면 톱기사로 유엔 헌장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제하에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ir Mohamad) 총리가 1948년 제정된 국제인권선언을 수정할 것을 희망한다고 썼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강대국이 가난한 나라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권선언을 제정했다면서 서방세계는 개발도상국들이 그들의 높은 가치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또 마하티르 총리의 말을 인용, 헌장이 모든 나라, 모든 국민들의 공동목표를 수용하지 못하고 단정했다.

키는 작지만, 당차기로 유명한 이 여걸은 이날 있을 ASEAN(동남아 제국 연합) 총회에서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작정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미국의 헤지펀드 대부인 조지 소로스를 동남아 외환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해서 격렬하게 비난했다. 민주주의 후원자요, 자선사업가로 존경받는 사람을 이렇게 심하게 공격할 수는 없다고 올브라이트 장관은 생각했다.

 

마하티르 총리의 공격은 직설적이었고, 당시 동남아 각국의 정서를 그대로 대변했다.

조지 소로스는 동남아 외환 위기의 배후조정자다. 그는 힘 있는 달러화나 파운드화는 건드리지 않고, 가난한 나라의 약한 통화에 시비를 거는 비열한 짓을 했다. 소로스는 정치적 동기를 가진 이중 인격자이며, 동남아가 수십 년간 이룩한 결실을 단 2주일만에 거둬갔다.”

마하티르는 소로스가 동남아 통화를 교란한 이유가 미얀마(옛 버마)를 아세안에 가입시킨데 대한 보복이며, 유태인들이 회교국가인 말레이시아를 전복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유태인 음모설을 제기했다.

소로스는 헝가리 출신 유태인으로, 그 동안 사회주의 국가인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을 반대했다. 미국 정부도 비공식적이지만, 소로스와 같은 입장으로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을 경계했다.

마하티르의 독설은 근거가 없었다. 그렇지만 환란을 겪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실제 외환투기자들이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통화를 공격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멀쩡한 나라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누군가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차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아시아라는 책을 쓰기도 한 마하티르 박사가 총대를 맨 것이다.

미국이 즉각 반격했다. 니콜라스 번스(Nicolas Burns) 미 국무부 대변인은 조지 소로스는 그런 일을 할 인물은 아니며, 어떤 음모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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