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무역의 시대
상인에 대한 인식 개선, 납속으로 신분 상승…해외무역도 활발, 엽전 활성화
조선후기 상품경제 발달…전국에 시장 열리다
2019. 08. 14 by 김현민 기자

 

1617, 장령 한영(韓詠)이 광해군에 아뢰기를, “시장 장사꾼들이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으며 하인과 천인들이 자대(紫帶)와 주립(朱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신은 이런 폐단을 보고 항상 분한 마음을 먹어오던 터에 장사꾼이 비단옷을 입고 하인들이 사립을 쓰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라고 했다. 1)

한영이란 자가 말업(末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돈 좀 벌었다고 좋은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이 못마땅해 단속을 했는데, 누군가 고자질을 해 사직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사직하지 말라고 한다.

조선의 상인들은 돈은 벌었지만, 천하게 대우받았다. 돈을 벌었으니,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사는게 당연한데,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꼭대기에 있는 유자(儒者)들이 보기에는 고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 때가 되면 상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진다. 상업을 말업으로 보는 인식도 개선된다. 여전히 농업을 국가의 본업(本業)으로 중시했지만, 한양에서는 자본과 상인의 가치가 중시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서울은 돈으로, 팔도는 곡식으로 생업을 삼는다거나, “서울은 돈이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정조도 상인들을 힘써 일하는 자로 보았다. 조선 전기에 노력 없이 이익만 쫓는 무리로 보던 것에서 상당한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던 것이다. 2)

한양의 상인들은 주로 남쪽에 살았다. 상인과 부호들은 종로 이남에서 남산에 이르는 곳에서 살았는데, 안마(鞍馬, )와 제택(第宅, 집과 정자)이 호사를 이룬다고 했다.

상인들은 벌어들인 돈을 바쳐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조선 후기에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납속(納粟)이란 제도를 공식화했는데, 곡물을 바치면 노비에서 면천시키거나 양반이 되도록 해주었다.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이 이 제도를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구한말 잡화상 /서울역사박물관
구한말 잡화상 /서울역사박물관

 

정부와 시장(market)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시장이 이긴다. 조선 후기에 시장이 사회변화를 주도했고, 난전과 사상 도고(都賈)들이 관허 상인인 시전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선도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시장의 파워를 보여준 것은 칠패시장이었다. 칠패시장은 농토에서 유리(遊離)된 농민들이 먹고 살기위해 한양으로 올라와 장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이다. 북한의 장마당을 보면 조선시대의 난전(亂廛)을 이해하기 쉽다. ()의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장마당(場市)로 시작해 1791년 정조의 신해통공(辛亥通共) 조치로 합법화된다.

서울 남대문 인근 신한은행 본점 위치에 있었던 칠패시장은 개항 이후에도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들과 상권을 다투었다.

칠패(七牌)시장의 위치는 숭례문에서 서소문까지의 일대다. ()는 조선시대 한양 도성을 경계하는 구역을 말한다. 한양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3군문이 지켰는데, 서울을 8패로 나누어 그중 7패에 해당되는 구간에 시장이 형성되었기에 칠패시장이라고 했다.

칠패시장에서 처음 노점을 차린 상인들은 농촌이 어려워지자 서울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이 대부분이 었고, 그들은 자본도 별로 없이 근교에서 반입되고 있는 물품을 받아서 도성 내의 길거리에서 늘어놓고 팔았다. 그러나 이런 상업 행위는 난전이라고 하여 제재를 받자 남대문 밖의 칠패에 가게를 벌였다. 칠패까지 시전상인들의 규제가 미쳐오자 칠패상인들은 이를 피하고자 대체로 어물전의 중개인 구실을 했다.

칠패시장은 18세기에 종로 일재의 시전(市廛), 동대문 근처의 이현시장(梨峴市場)과 더불어 3대 시장을 형성했다.

종로시전은 종로와 남대문로에 자 형태 육의전을 비롯해 2,000개의 가가(假家, 가게의 원말)로 형성된 공인받은 시장이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성곽주위로 사람들이 증가하며 자연스럽게 민간 주도의 칠패시장이 형성되었고, 동대문의 이현(배오개)시장이 형성되었다.

 

마포나루 새우젓 축제 /마포구청
마포나루 새우젓 축제 /마포구청

 

동대문에 배오개길이 있다. 그 배오개가 이현(梨峴) 시장의 자리다. 재미있는 사실은 칠패시장에서는 주로 어물을, 이현시장에서는 채소를 팔았다고 해서, ‘동부채 칠패어’(東部菜 七牌魚)라는 말이 생겼다.

이는 한강과 관계가 있다. 한강은 5강이라 하여 5개의 큰 나루가 있었다. 현재 위치와 지명으로 보면 광나루, 마포, 용산, 노량진, 양화진이 그것이다. 그중에 마포나루가 가장 컸다. 용산에서 넘어오는 강물과 서해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 마포였다.

마포는 남한강에서 내려오는 뗏목의 집산지로서 제재소가 많았고 고기를 잡아 보관하는 옹기집이 많았다. 목재를 만지다보니 목에 먼지가 많이 끼었고 그 컬컬함을 없애기 위해 마포에 고기집이 성행했다. 지금도 마포에는 오래된 유명 음식점들이 많다. 특히 서해에서 잡아오는 새우젓이 많이 올라왔다. 상인들은 강화에서 올라온 새우젓과 생선을 지게에 싣고 만리재 고개를 넘어 칠패시장에서 팔았다. 새우젓장사는 아침에 해를 받으며 지게지고 올라오기 때문에 이마가 검게 탔다고 하고, 이현시장의 채소장사는 해를 등지고 오기 때문에 뒷목덜미가 새카맣게 탔다고 했다. 그래서 얼굴과 목덜미만 봐도 이 사람이 칠패시장의 새우젓장사인지, 이현시장의 채소장사인지 알았다고 한다.

시장에서는 도둑도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지갑이 없었으므로 남자들은 큰 도포자락에 끝 소매에 돈을 넣어 다녔다고 한다. 오른손으로 돈을 만지는 것은 부정하다하여 오른손 소매에 돈을 넣고 왼손으로 돈을 집어 물건 값을 지불하였는데 일종의 모리배들이 팀을 형성하여 앞길을 막고 말을 시키다가 옆에 있는 사람이 소매를 툭 치면 안에 있던 돈이 빠져나오는데 그것을 주워 가져 갔다 하는데 그것이 소매치기의 유래라고 한다. 그 소매치기가 성했던 곳이 칠패시장이라고 한다.

 

조선말 마포 /마포구청
조선말 마포 /마포구청

 

조선 후기에는 서점, 한방약국, 정육점등 전문 상가도 생겼다.

각종 책을 판매하는 책사(冊肆)가 육조 앞에 있었는데, 사서삼경과 한방서적, 꿈해몽 관련 책들을 팔았다. 약국은 구리개(을지로2) 좌우로 집중되었고, 쇠고기를 파는 현방(懸房)도 서울에 20여곳 있었다. 현방은 고기를 건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각종 글씨와 그림을 파는 서화사(書畵肆)도 있었다. 혼인할 때 공주나 옹주의 옛집을 빌려주는 금교세가(金橋貰家)도 있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결혼할 때 신부집이 누추해 혼례를 치르기 어려울 경우 왕가의 집을 빌려 사용한 것이다.

남대문에서 종로에 걸쳐 술집과 음식점, 색주가가 즐비했고, 천냥짜리 기생집인 청루(靑樓)가 등장하기도 했다.

상평통보 /화폐박물관
상평통보 /화폐박물관

 

조선 후기의 또다른 변화는 외국에서 도입된 물자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상품이 고추와 담배였다.

고추는 17세기 초엽에 전래되었는데, 식생활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이전까지 김치에는 고추를 넣지 않았는데, 고추가 들어오면서 붉은 김치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졌고, 고추장도 생겨났다.

담배도 17세기초 들어왔는데, 일본에서 왔다는 설과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설이 있다. 담배는 금새 대중화되었고, 담배를 피우는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 어른 앞에서 담배를 못하게 하는 풍토도 이때 만들어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고구마, 감자, 호박등 구황식품도 이때 도입되었다.

상품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물물교환이 이뤄지거나 면포가 교환수단이었던 시장에 화폐 사용이 활성화되었다. 1678년 숙종 때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해 유통을 촉진시키면서 급속히 보급되었다. 상평통보는 그 형상 때문에 엽전이라 통칭되었다.

 

해외무역도 활발했다. 17세기 중엽부터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공무역을 하던 개시(開市)와 사무역의 후시(後市)가 이루어졌고, 일본과 외교정상화가 이뤄지면서 왜관무역도 성행했다. 국제무역에는 의주의 만상(灣商)과 동래의 내상(萊商), 개성의 송상(松商)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상인들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 행차를 따라 현지에서 무역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숙종 때 대사간 이원정이 아뢰기를, "해마다 연경(燕京)에 가는 상인들의 차량이 그전보다는 배나 되어 수십리에 걸치고 있는데 …… 상인들이 제한없이 은()을 가지고 가는 소치입니다. 무역해 온 중국 상품은 왜관(倭館)에 전매(轉賣)하고 있는데 왜관의 물력(物力)으로는 감당하지 못하여, 현재 왜인들이 상환하지 못한 것이 백만여 냥()이나 된다고 합니다고 했다. 3)

무역 상인들이 중국행 사신을 따라갔다가 중국 물건을 구입해 부산의 왜관에 일본 상인들에게 팔아 이익을 남겼다는 것이다.

17~18세기에 개성을 중심으로 인삼이 본격적으로 재배되면서 조선은 인삼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1821년 의주상인 임상옥(林尙沃)은 사신단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인삼을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이 이야기는 후에 최인호에 의해 소설(商道)로도 나오고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사회가 상업이 부진해 정체했다고 주장했다. 해방후 우리 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분명한 것은 조선 후기에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 천대받던 상업이 독자적인 힘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자생적인 상업의 발전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발전하기 이전 단계에 외세가 밀려와 좌절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전국 곳곳에서 활약한 상인의 근성이 한국인의 DNA로 남아 해방후 한국을 세계적인 무역국가로 성장하게 하는데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

 


1) 광해군일기(중초본) 119, 광해 9(1617) 9262번째기사

2) 박은숙, 시장의 역사 (2008, 역사비평사) 179

3) 숙종실록 6, 숙종 3(1677) 823일 정묘 5번째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